억보는 스물두살 노총각이다. 5년 동안 최 진사네 머슴살이해주고 새경으로 악산 하나를 받았다. 동네에서 한식경이나 떨어진 그 산자락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혼자 살고 있다.
억보는 일가친척도 없는 혈혈단신이지만 힘이 장사고 부지런한 데다 성품이 착하다. 산비탈에 나무를 캐고 돌멩이를 주워 치우고 화전 밭뙈기를 만들어 콩 심고 조 심고 들깨도 심었다. 감나무와 밤나무도 심어 겨울이면 뜨끈뜨끈하게 군불을 지펴두고 아랫목에 앉아 다락의 홍시도 꺼내 먹고 화로에 밤도 구워 먹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억보는 새를 좋아한다. 참새떼·박새떼가 들깨를 쪼아 먹어도 훠이 소리 한번 지르지 않는다. 찌르레기란 녀석들은 시끄럽게 몰려와 감이 익는 족족 다 쪼아 먹지만 억보는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구경한다. 곤줄박이는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손바닥에 들깨를 한 움큼 쥐고 있으면 팔뚝이며 어깨, 머리 위에도 바글바글 앉아 짹짹거리며 들깨를 쪼아먹는다.
밭에서 일할 때도 곤줄박이는 어깨에 앉고 장날이면 이십리나 떨어진 저잣거리에 갈 때도 곤줄박이들은 어깨 위나 지게 위에 앉아 조잘거린다. 장에 가면 억보는 곤줄박이들이 모처럼 대접받을 것을 기대하고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 파장 때가 되면 땅콩장수는 팔다 남은 찌꺼기와 부스러기 땅콩을 한 됫박이나 갖다준다. 억보와 곤줄박이는 장날에 구경거리가 됐다. 억보는 콩이다 들깨다 화전밭에서 추수한 곡식을 몽땅 장에 내다 팔지 않는다. 겨우내 산새들이 배고프지 않게 넉넉히 남겨둔다.
억보네 화전 밭뙈기 뒤로는 산신령이 산다는 선학산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다. 그는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산신령께 큰절을 세번 올려 무병 무탈함에 감사인사를 드린다. 모아놓은 돈은 없어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산신령이 나타나 “네게 큰 선물을 줄 테니 착한 일에 써먹어라” 하고 말했다. 하도 생생해서 그날 아침에는 북어포를 놓고 절을 올렸다.
꿈속 선물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뭐라고? 유 참사네 삼대독자가 다 죽어간다고?” 곤줄박이들이 머리맡에서 지저귀는 소리가 억보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다시 귀를 기울이자 “대들보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검정지네를 없애야 하는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억보는 벌떡 일어나 짚신을 신는 둥 마는 둥 냅다 뛰어 동네로 가서 고래 대궐 같은 유 참사 집에 갔다. 문을 쾅쾅 두드리자 하인 하나가 나와서 억보를 힐끗 보더니 대문을 닫아버렸다. 쾅쾅 발로 대문을 찼더니 그 하인이 “집안에 우환이 있으니 조용히 물러나거라” 하며 대문을 열지 않고 위협적인 말로 언성을 높였다.
이번에는 커다란 돌멩이를 들고 대문을 부술 듯이 내리치자 나이 지긋한 집사가 나왔다. 말도 하지 않고 밀치고 들어가 부엌 아궁이에서 불꽃이 너울거리는 장작을 들고 뒤꼍에서 사다리를 가지고 대청으로 들어가 대들보 위에 올라 장작불을 대니 ‘찌익’ 길이가 대여섯자나 되는 새카만 지네 한쌍이 쿵 대청에 떨어졌다.
식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억보는 벌겋게 달아 있는 장작으로 지네를 지졌다. 그때 안방에 누워서 가느다란 숨을 할딱이던 삼대독자 유 참사 손자가 “으아악” 고함을 지르고는 땀범벅이 돼 벌떡 일어나 머리맡의 꿀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3년 동안 팔도강산에 용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도 차도가 없던 삼대독자를 억보가 단숨에 살려낸 것이다. 유 참사는 억보의 두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유 참사는 억보에게 아담한 기와집 한 채와 문전옥답 서른마지기를 줬지만 동네 기와집으로 이사 가지 않고 산자락에 머물렀다. 땅콩 한가마를 사와 곤줄박이를 비롯해 모든 새들에게 뿌려줬다.
억보는 무릎을 쳤다. 산신령님의 선물은 바로 곤줄박이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 참사 삼대독자를 살린 것뿐만이 아니다. 장날마다 어수룩한 농민들을 울리던 야바위꾼들이 결딴나고 소매치기들도 곤줄박이들에게 두손을 들고 도둑놈들도 일망타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