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안회와 더불어 종일토록 말하였는데, 어긋나지 아니함이 마치 어리석은 것 같았다. 물러가서 안회가 사사로이 다른 제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살펴보니, 역시 내가 말한 취지를 말하는 것이 충분하였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다.”라고 하셨다. 回, 孔子弟子, 姓顔. 字子淵. 不違者, 意不相背, 有聽受而無問難也. 私, 謂燕居獨處, 非進見請問之時. 發, 謂發明所言之理. 愚聞之師曰: “顔子深潛純粹, 其於聖人體段已具. 其聞夫子之言, 黙識心融, 觸處洞然, 自有條理. 故終日言, 但見其不違如愚人而已. 及退省其私, 則見其日用動靜語黙之間, 皆足以發明夫子之道, 坦然由之而無疑, 然後知其不愚也.” 회는 공자의 제자이고, 성은 안이며, 자는 자연이다.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뜻이 서로 배치되지 않아서, 들은 것을 받아들임만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물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는 안회가 홀로 거처하는 곳에 있을 때로서 들어와 뵙고 질문을 청하는 때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발이란 말한 바의 이치를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스승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안자는 깊이 생각하고 순수하여 그가 이미 성인의 체단을 갖추었다. 그가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서 묵묵히 이해하여 마음으로 녹여서 닿는 곳마다 막힘없이 통하니, 저절로 조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말해도, 단지 안회가 어긋나지 않을 뿐이었으니,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을 따름이다. 물러나서 그 사사로이 있는 것을 살핌에 이르면, 안회가 날마다 쓰고 움직이고 멈추며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모두 스승의 도를 밝게 드러내기에 충분하였고, 평탄하게 그 도를 말미암아서 아무런 의혹도 없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후에 그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
2 | 新安陳氏曰 發如發揮發見之發 非以言語發明之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발은 ‘발휘한다, 발현한다’의 발과 같은 것이지, 말로써 드러내어 밝힌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朱子之師 姓李氏 名侗 字愿中 號延平先生 주자의 스승은 성이 이씨이고, 이름은 동이며, 자는 원중이고, 호는 연평선생이다.
慶源輔氏曰 深潛謂不淺露而德性淵宏 純粹謂無瑕疵而氣質明淨 경원보씨가 말하길, “심잠이란 얕게 드러나지 않고 德性이 깊고 큰 것을 말하고, 순수란 하자가 없고 기질이 밝고 깨끗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致堂胡氏曰 夫子久已知顔子之不愚 必曰退省其私者 以見非無證之空言 且以明進德之功 必由內外相符 隱顯一致 欲學者之謹其獨也 夫子與言終日則所言多矣 今存者幾 惜哉 치당호씨가 말하길, “공자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안자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반드시 물러나 그가 사사로이 있는 것을 살폈다는 것을 말한 것은, 이로써 증거가 없는 헛된 말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고, 또한 이로써 덕을 증진하는 공은 반드시 내외가 서로 부합함와 숨은 것과 드러난 것이 일치함으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을 밝히신 것은 배우는 자가 홀로를 삼가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더불어 종일토록 말하였으므로, 말씀하신 바가 많았을 것이나, 지금 보존된 것이 몇밖에 없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默識心融 固是他功深力到 亦是天資高 顔子乃生知之次 比之聖人 已具九分九釐 所爭只一釐 孔子只點他這些 便與他相湊 他所以深領其言而不再問也 融字如消融相似 如雪在湯中 若不融一句 只是一句 如何發得出來 如人喫物事 若不消 只生在肚裏 如何滋益體膚 退省其私 私者他人所不知而回自知者 夫子能察之 如心之所安 燕居獨處之所爲 見識之所獨 皆是與中庸謹獨之獨同 주자가 말하길, “묵묵히 알아서 마음으로 녹여내는 것은 본래부터 그의 공이 깊고 힘이 그에 미친 것이지만, 이 역시 천부적 자질이 높은 것이다. 안자는 곧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의 다음이니, 성인과 비교한다면, 이미 99퍼센트는 갖추어져 있고, 다툼이 있는 것은 그저 1퍼센트일 뿐이다. 공자께서 그저 그에게 이런 것을 점찍어 말씀하시기만 하면, 곧바로 그와 더불어 서로 부합하였으니, 그는 이 때문에 그 말을 깊이 이해하고 더이상 질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융이란 글자는 마치 녹는다는 것과 비슷한데, 예컨대 눈이 국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약 한 구절이라도 녹이지 못한다면, 그저 한 구절일지라도 어떻게 발현해낼 수 있겠는가? 예컨대 사람이 사물을 즐겨 먹음에 있어, 만약 소화하지 못하고 그저 뱃속에 생으로 있다면, 어떻게 몸과 피부에 보탬이 되겠는가? 물러나서 그가 사사로이 있는 것을 살펴본다는 것에서, 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안회 스스로는 아는 것인데, 공자께서는 이를 능히 살펴보실 수 있었다. 예컨대 마음이 편안히 여기는 바, 편안하게 홀로 거처할 때의 행한 바, 식견 중에 자기 홀로 갖추고 있는 바와 같은 것은 모두 중용의 근독에서 독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不違如愚 不消說了 亦足以發 是聽得夫子說話 便能發明於日用躬行之間 此夫子退而省察顔子之私知此 且如說非禮勿視聽言動 顔子便眞箇不於非禮上視聽言動 集註謂坦然由之而無疑 是他眞箇見得 眞箇便去做 ‘어긋나지 않음이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는 것은 말해줄 필요도 없이 또한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는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능히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사이에 드러내어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공자께서 물러나 안자가 사사로이 행하는 바를 살펴보시고 이를 알았던 것이다. 또한 예컨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씀하시자, 안자가 곧바로 진짜로 예가 아닌 위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집주에서 ‘담담하게 그것을 말미암으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가 진짜로 보아서 터득하고서 진짜로 그 즉시 가서 행하였다는 것이다.
退非夫子退 乃顔子退也 發啓發也 始也 如愚人似無所啓發 今省其私乃有啓發 與啓予之啓不同 물러난다는 것은 공자께서 물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안자가 물러난다는 것이다. 발이란 계발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아서 계발하는 바가 없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사사로이 행하는 바를 살펴보니, 도리어 계발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니, 계여의 열다와는 다른 것이다.
顔子所聞 入耳著心 布乎四體 形乎動靜 則足以發明夫子之言矣 안자는 들은 바가 귀에 들어오면 마음에 붙여서, 사지에 펴고 동정에 드러나게 하니, 공자님의 말씀을 드러내어 밝히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問顔子不違與孔子耳順相近否 曰 那地位大段高 不違是顔子於孔子說話 都曉得 耳順是無所不通 누군가 묻기를, “안자의 불위는 공자님의 이순과 서로 가까운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저것은 경지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불위는 안자가 공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모두 깨우쳤다는 것이고, 이순은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省其私 私不專在無人獨處之地 謂如人相對坐 心意默所趣向 亦是私 그 사사로움을 살핀다는 것에서, 사라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없이 나 혼자 거처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남과 서로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과 뜻이 묵묵히 향해 가는 바도 역시 사사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問亦足以發 是顔子於燕私之際將聖人之言發見於行事否 曰 固是 雖未盡見於行事 其理亦當有發見處 然燕私之際 又見 顔子踐履之實處 又曰 與之言 顔子都無可否 似箇愚底 及退而觀其所行 夫子與之言者 一一做得出來不差 豈不足以發明夫子之道 如今人說與人做一器用 方與他說箇尺寸高低形製 他聽之全然似不曉底 及明日做得來 却與昨日所說底 更無分毫不似 누군가 묻기를, “또한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안자가 편안히 사사로이 지내는 즈음에 성인의 말씀을 가지고 일을 행하는 데에서 발현된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말하길, “본디 그렇다. 비록 일을 행하는 데에 드러나는 것이 미진하다 할지라도, 역시 그 이치가 발현하는 부분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편안히 사사로이 지내는 즈음에, 또한 안자가 실천하고 이행하는 실질적인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더불어 말함에 있어, 안자는 항상 찬성과 반대가 없어서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물러간 후 그가 행하는 바를 살펴봄에 미치면, 공자께서 그와 더불어 말씀하신 것을 하나하나 실행해내어서 어긋남이 없었던 것이니, 어찌 공자님의 도를 드러내어 밝힘에 부족함이 있겠는가? 예컨대 지금 어떤 사람이 남과 더불어 그릇 하나를 만들어 쓰자고 말함에 있어, 바야흐로 그와 더불어 척촌과 고저 등 형상을 말해도, 그는 말을 듣는 것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날에 이르러 만들어내는 것은 도리어 어제 말한 바와 털끝만큼이라도 같지 않은 곳이 없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亦足以發 其請事斯語之驗 與默識心融 此於聖人耳順地位 雖未幾及而已 同是一般趣味矣 남헌장씨가 말하길, “또한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청컨대 이 말씀을 일삼고자 합니다’라는 것의 징험이니, 묵묵히 알아서 마음으로 녹인다는 말과 더불어 이것들은 성인의 이순의 경지에는 비록 아직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똑같이 한 가지 종류의 취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發者固是發明此理 疑亦有發見活潑處之意 夫子再以不愚而信之 所以深喜之也 각헌채씨가 말하길, “발이라는 것은 본래 이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지만, 의문을 품는 일도 또한 발현이 활발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공자께서 재차 안회가 어리석지 않다고 믿은 것은 그를 깊이 기뻐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默識是不待言說而自喩其意 心融是不待思惟而自與之爲一 觸處洞然自有條理者 謂如行自己家庭中蹊徑曲折 器用安敦 條理次序 曉然在吾心目之間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묵식은 말해줌을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그 뜻을 아는 것이고, 심융은 생각함을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그것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며, 접촉하는 곳마다 환히 알아서 저절로 조리가 있음이라는 것은 마치 자기 집 정원 안에 있는 오솔길을 구불구불 가고, 그릇을 만들어 쓰는 일을 안돈하듯이, 그 조리와 순서가 내 마음과 눈 사이에 일목요연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顔子之資 隣於生知 故無難疑答問 而自有以知夫子所言之理 顔子之學勇於力行 故雖燕居獨處而亦足以行夫子所言之理 不曰行而曰發 此一發字 最有力 夫子嘗曰 語之而不惰者其回也歟 惰則不發 發便不惰 孟子曰 有如時雨化之者 先儒以顔子當之 物經時雨便發 顔子一聞夫子之言 便足以發 故周子曰 發聖人之蘊 敎萬世無窮者 顔子也 且不徒發之於人所共見之 時 而能發之於其所獨知之地 顔子蓋眞能發夫子約禮之敎而爲慎獨之學者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안자의 자질은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고 의문 나는 것을 묻고 답함이 없으면서도, 저절로 공자님이 말씀하신 이치를 알 수 있었다. 안자의 학문은 힘써 행함에 용감하였기 때문에, 비록 편안히 거처하고 홀로 있을지라도, 또한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충분히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행한다고 말하지 않고 드러낸다고 말하였는데, 이 하나의 발자가 제일 힘이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시길, ‘말해주면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안회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게으르면 발현하지 못하고, 발현하면 곧 게으르지 않은 법이다. 맹자가 말하길, 때 맞춰 내리는 비처럼 변화시킨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옛 선비로는 안자가 그에 해당한다. 사물은 시우를 거치면 즉시 발현하는데, 안자도 공자의 말씀을 한 번 듣자마자 즉시 발현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길, 성인께서 온축하신 것을 발현하여 만세를 무궁토록 가르치신 사람은 안자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부질없이 사람들이 함께 보는 것에 그것을 발현하지 않고, 때때로 자기 혼자 아는 곳에다 그것을 발현할 수 있었으니, 대체로 안자는 진짜로 ‘예로써 요약한다’는 공자님의 가르침을 발현함으로써, 신독을 행하는 학자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純曰: “私者, 公之對. 孔門弟子以進見孔子爲公, 其他朋友相與, 謂之私.” 순이 말하길, “사라는 것은 공에 대비되는 것이다. 공문제자들은 공자에게 나아가 뵙는 것을 공으로 삼았고, 기타 친구들이 서로 더불어 있는 것을 일컬어 사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