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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23강
로마로 가는 길
말씀 / 사도행전 27:1-44
요절 / 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평화를 표현하는 그림대회가 열렸습니다. 대다수의 화가들이 잔잔하고 투명한 호수, 양이 풀을 뜯는 초장, 그늘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수상자는 한 화가에게 돌아갑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바다에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데 중앙에 있는 바위에 새끼 새가 어미 새 품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폭풍이 나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서 풍랑을 만납니다. 이때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화를 누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풍랑을 만나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말씀을 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이사랴에서의 법정 공방이 마무리되고 드디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항해에 오릅니다. 이 호송을 책임지는 사람은 황제 직속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길이 바울에겐 외롭지 않았습니다. 몇 명의 동역자들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배를 타고’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함께 타고 있고 또 2절을 보면 ‘아리스다고’라는 데살로니가 사람이 든든한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 곁에 주님이 붙여주신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결코 바울 혼자 한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도, 교회 사역도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바울 혼자만 영웅이 아니라 함께 한 모든 동역자들이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사람 이름이 주~욱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잘 몰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고 바울과 동일하게 ‘충성스러운 종’들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여기 ‘작정되었다’라는 것은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까지 가는 여행에 있어 바울은 아무런 결정권도 없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참 많습니다. 고3 학생들이 대학에 지원할 때도 지원해 놓고 그분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취업할 때도 지원서를 내놓고 직장 오너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잘되었을 때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잘 안 풀릴 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혹시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분들의 결정에 따라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서 나의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대한 모든 결정을 세상 위정자들이 다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비전이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탄 배는 시돈을 거쳐 구브로 해안을 따라 가다가 루기아 지방에 있는 ‘무라’라고 하는 항구 도시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게 됩니다. 이 배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곡물 운반선이었습니다. 많은 양의 밀을 실었는데 길이가 4~50m에 폭이 15m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3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는 장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배였지만 속력이 나지 않았습니다. 초가을에 부는 맞바람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배는 2~3일이면 갈 거리를 여러 날을 걸려 간신히 ‘니도’라는 지역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만큼 풍세가 항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거셌습니다. 그래서 매우 큰 섬인 그레데를 바람막이 삼아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합니다. 이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7절에도 ‘간신히’, 8절에도 ‘간신히’ 불안한 모습으로 ‘간신히 간신히’ 가고 있습니다. 예상 시간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는 항해하기 힘든 계절로 접어들었음을 암시합니다.
미항에 도착한 때가 언제입니까?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함으로 금식하는 절기가 훨씬 지나서입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 달력으로 7월 10일에 시행되었던 대속죄일을 가리킵니다. 태양력으로는 10월 5일 정도입니다. 그때가 이미 훨씬 지나 11월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지중해는 여름에는 파도가 거의 없이 유리 바다처럼 잔잔하지만,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겨울에는 날씨와 바람을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 덕분에 나름 항해 경험이 많았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어떤 위험을 경고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앞으로 항해를 계속할 경우 세 가지 해, 즉 하물, 배, 승객의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움직이지 말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항해전문가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곡물 판매를 통한 수익을 더 생각했을 것입니다. 선장과 선주는 겨울을 나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이 여행을 조금이라도 더 감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여기에 호송 임무를 빨리 완수하고자 하는 백부장의 심리가 더해졌을 수 있습니다. 또 미항은 지내기가 불편했습니다. 좀 더 가면 정박하기도 좋고 더 넓고 쾌적한 ‘뵈닉스’라는 항구가 있습니다. 겨울을 지내더라도 거기서 지내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처음엔 남풍이 불어 순항하니 그들의 판단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납니다. 유라굴로는 그레데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m 높이의 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개의 반대 기류가 충돌해 생기는 광풍입니다. 이 광풍을 만나면 배가 지중해에서 북아프리카 쪽으로 떠밀려가다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 이쪽은 북서부 아프리카 해안이었습니다. ‘스르디스’로 나오는 모래톱이 길고 넓게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모래톱이나 암초에 걸리면 배는 좌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최대한 배를 가볍게 하고자 하물을 버리고 배의 기구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물과 배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실현됩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파악했던 해도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방향도 잃고 시간의 흐름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구원의 여망, 살 수 있다는 소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체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에 정말 빨리 가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생명을 생각해 가지 말고 머무르자고 했는데 가자고 우긴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상황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원망하거나 냉소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잘못은 짧게 지적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격려의 말을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안심하시오. 당신네들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오직 배만 파괴될 것입니다.” ‘안심하라’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 의미는 ‘기뻐하라’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기뻐하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마저 사라진 판국에 바울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기뻐하라, 안심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신에 찬 말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바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먼저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하나님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대부분은 이방인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이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바로 그때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과도 유사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거센 인생의 광풍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반드시 로마 황제 가이사의 법정에 서려면 파선으로 죽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로마 황제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로마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그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도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 때문에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도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우리 성도들은 사명을 감당하다가 위기를 만날지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명은 사명을 마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신실해서 그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분명하게 신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23절에서 어젯밤에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방향도 시간도 모르고 어둠 속에 풍랑으로 배가 요동치는 여러 날 동안 하나님께 집중했음을 의미합니다. 집중하지 않고 현실 문제에만 호들갑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령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 상황에 휩쓸려 가지 않고 영원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죽게 되었다며 호들갑 떨고 있는 제자들,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단잠을 주무셨습니다. 바울도 며칠 동안을 풍랑과 싸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풍랑과 싸워 믿음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바울에게 약속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그랬고 고린도에서도 그랬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정을 보면 바울이 훌륭하고 담대해서 그렇게 많은 열매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기에 동일하게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있는 바울에게 말씀과 비전과 위로를 주시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항해한 지 열나흘째 되던 날 밤이 되었습니다. 점차 날이 새 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합니까?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해안에 도착해도 헤엄칠 힘이 없어 중간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음식을 먹어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떡을 떼어 맛있게 먹습니다. 목자는 먹을 것을 양에게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양식을 잘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엄마가 잘 먹어야 아기에게 줄 모유도 나옵니다. 목자가 잘 먹고 으쌰 으쌰 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른 사람도 동기부여가 되어 생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먹방 유튜버처럼 감사하며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었습니다. 276명 전원이 배부르게 먹고 나서야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때로는 예언자가 되고, 때로는 파수꾼이 되고, 때로는 먹방 유튜버가 되며 한 생명조차 꺼지지 않도록 섬기는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이 배의 캡틴입니다. 광풍을 만난 배 안에선 선장도 선주도 백부장도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풍랑 속에 항해의 리더가 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자 선원들은 어느 땅인지 모르지만 모래 사장이 있는 항만을 발견하고 그곳에 배를 대려고 합니다.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답니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두 물살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됩니다. 배가 큰 물결에 깨어져 갑니다.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갈까 해서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죄수의 몸으로 온 바울을 살릴 생각으로 군인들의 뜻을 막습니다. 대신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뛰어내려 육지로 가도록 합니다. 남은 사람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의지해 육지에 오르게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구조됩니다.
그러면 로마로 가는 길에서 겪은 고난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하심이나 실패가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 가게 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한두 번 말씀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바울에게 자꾸 회의가 들고 낙심하게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광풍이었지만 276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게 하심으로 바울에게 두신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게 두신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고난 속에서 알려주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처럼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노라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배우려면 바다로 가라.” 인간은 누구나 항해자입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갈 때도 있지만 유라굴로 같은 광풍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순풍에 돛 달고 갈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과 능력을 의지합니다. 이리 가는 것이 위험해 보이면 저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저쪽으로 가다가 실패할 것 같으면 이쪽으로 키를 꺾습니다. 몇 차례 성공도 거둡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주변에서 그건 너무 무리라고 말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순풍만 있지는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광풍이 불어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부심을 가졌던 직장에서 명퇴당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병고로 잃어버립니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립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문제 아이가 됩니다. 잘 자라던 양이 어느 날 이별을 고합니다. 이처럼 인생에 광풍이 불어닥치면 사람의 지혜와 경험과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떠밀려 가는 인생이 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광풍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은 광풍이라는 시련을 통해 결국 우리의 인격과 신앙을 다듬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최종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길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할 때 주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십니다.
셋째, 로마 선교는 로마에 가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영혼들 가운데서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말씀 전파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닮은 목자로 살아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특정한 목적지에 가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로마로 가는 과정에서도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일부터 목자로 살려고 하지 말고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힘과 격려가 필요한 분들에게 짝꿍이 되어주는 등 오늘부터 목자로 살려고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목자로 살아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인생 항해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삶 속에서 삶으로 선교하므로 우릴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