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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60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부활 제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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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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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byQrTNkn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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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의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오는 인간적이고 세상적 기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진정으로 참 기쁨을 느꼈던가 돌아봅니다. 즐기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에 몰입할 때의 기쁨도 컸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성취한 것에 대한 기쁨도 컸습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점이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데서 오는 기쁨, 좀 더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기쁨, 손톱만한 봉사지만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 사목적 헌신과 그 결과에 따른 보람에서 오는 기쁨...
결국 참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기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 영혼과 정신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쁨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란 표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그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기쁨 충만한 우리의 삶이랍니다.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들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솔로몬의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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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pbvlRA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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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성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마티아는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도입니다. 그리고 성 마티아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의 자리를 교회가 스스로 다시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도인 것입니다.
성 마티아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을 잃게 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하며 사도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요구하는 소명을 채워야 합니다.
끔찍한 상상이겠지만 만약 영화 ‘에일리언’에서처럼, 태중에 있는 아기가 부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부모는 그 아기를 더는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자녀로서의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부모도 자녀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가 당신의 ‘계명’(뜻)을 지키기만 한다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당신께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녀의 행복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만 하면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사랑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에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느낀 것처럼 그런 천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다 보니 이번 어린이날 어떤 아이가 1억 원이 넘는 작품 위에서 놀다가 작품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물은 한국화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었습니다. ‘김생 임서’라는 작품인데, 김생의 글씨를 따라 쓴 작품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는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는 말리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어줍니다. 박대성 화백이 어린이는 다 그런 것이라며 이해했기에 망정이지 아버지는 큰돈을 물을 뻔하였습니다.
부모는 왜 아이를 말리지 못했을까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계속 잘못 나가면 결국 아이는 자신을 그렇게 키운 부모를 원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부모는 아이에게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존중의 법을 어긴다면 부모도 자녀의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의 부모인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고 싶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모든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일을 하나도 이룰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기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기쁨-평화’로 나가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도 평화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자산어보’(2021)는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과 청년 어부 ‘창대’의 갈등과 우정이 그려집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관한 책을 써서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 하고 창대는 글을 배워 세상에서 출세하려 합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란 책을 내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12년간의 노력으로 탄생한 자산어보는 세계 최초로 수산 동식물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한 책이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대는 과거에 급제하여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신물이 나는 세상을 등지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약전이 마티아 사도로 비유된다면 세상 출세를 쫓으려 했던 창대는 유다의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기쁜 삶일까요?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일까요, 아니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삶일까요?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는 세상에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독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소와 같은 인물이 마티아였다면 반대로 뱀과 같은 인물은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으로 살아야 사랑받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말하자면, 사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합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이 첫 딸을 낳았을 때 길어야 1년밖에 못 산다는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딸이 그가 세상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딸의 미소를 보고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의 아이에게서도 자기 딸 아이의 미소가 생기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딸의 병이 나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 알 때는 병을 얻어 1년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그 아이의 감사 편지를 받고는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선재단도 만들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됩니다. 병도 나았고 장수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책에 보면 성공하려면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나 발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게 된다면 하느님은 실수를 통해서라도 그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기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소가 되게 키울 것입니까, 아니면 뱀이 되게 키울 것입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결국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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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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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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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1)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제자가 된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 은총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은총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은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그런데 자기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를, 또 여러 주님들 가운데 한 분을 자기 권한으로 자기가 골라서 선택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참 종교는 하나뿐이며 참 주님은 한 분뿐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주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준으로 하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주님을 고르고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또 그 생각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한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주님을 버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말은, 어떤 사람은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부르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지만,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부르심을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데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사람을 처음부터 따로 정하셨다면, 그것은 구원할 사람과 구원하지 않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고,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만일에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신앙인이 되었더라도 이 응답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2)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임무 수행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생활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신앙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냥 일부가 아니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언제나’ 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열매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명령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즉 우리가 얻는 구원과 생명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앞의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 우리가 가장 먼저 원해야 할 것과 청해야 할 것은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바로 그것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이유도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이유도 없습니다.) 7절의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아무거나”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구원과 생명,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 즉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인내심, 의지력, 용기 등입니다. (2) 아버지께 청하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예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뜻도 우리의 구원입니다.) 7절의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라는 말씀을 풀어서 표현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들어 주십니다.(요한 11,42) (3)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이고, 7절의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전체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충실하게 ‘삶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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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에서 ‘시지프스’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예전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처럼 미래에서 사람이 현재로 온다는 설정입니다. 터미네이터와 같이 시지프스에서도 미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현재보다 궁핍합니다. 자연은 파괴되었고, 문명도 파괴되었으며, 먹을 것도 없는 미래입니다. 그런 미래에서 성공확률이 5%도 안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현재로 사람들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미래의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 중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에 와서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은 정보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주식, 복권은 미리 결과를 알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현장도 미리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고통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현재에서의 풍요와 안락함은 가치가 없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드라마에서 몇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 왔습니까?’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말은 공간의 문제입니다. 언제라는 말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왔든지. 언제 왔든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하나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하러 왔습니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잘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잘 모릅니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부활로 꽃이 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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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지상에서의 당신 사명을 대신하도록 택하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명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갈라 5,14).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다른 이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론적인 사랑에는 강하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큰 사랑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당신 목숨까지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이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 제물이 되셨지요.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처럼 대속 제물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도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이런 부르심이 바로 참된 제자로 선택받은 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아무런 잘못과 이유도 없이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을 대속 제물로 받아들여, 오히려 인류 구원을 위한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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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에서 선택되어, 유다 이스카리옷이 내버린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의 초기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이와 제비뽑기에서 선택된 마티아는 무엇이 다를까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티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입니다.
재물과 부귀영화가 따르는 행운을 우연히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할 사도로 선택된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스트로마타』라는 저술에서, 마티아 사도가 언행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방 또는 이집트에서 순교하였다고 초기 교회의 오래된 전승은 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려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신비로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외면적이거나 짐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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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예수님께서는 오늘,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만드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우리 사이의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우리를 서로 친구가 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곧 당신이 주신 ‘친구’라는 은총의 영으로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곧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갈라 5,22-23,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도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을 채우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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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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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뽑힌 우리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로 뽑혔습니다. 열두 사도와 마티아 사도는 '기도로 뽑힌 사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6,12-13)
"그러고(기도하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1,26)
이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들을 뽑아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열세 번째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뽑힌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사제로, 수도자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사목위원으로, 전례봉사자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봉사직의 부름을 받을 때, "아니요!"나 "나는 못합니다!"라고 응답하면 안 되고,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순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마태10,20),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갈라2,20), '하느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영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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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사랑>
요한 15,9-17 (나는 참포도나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과 사랑>
사랑이
사랑을
품으시네
사랑만이
사랑을
품으실 수 있네
사랑이
사랑에게
안기네
사랑만이
사랑에게
안길 수 있네
사랑이
사랑에게
머물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에게
머물게 하실 수 있네
사랑이
사랑에게
머무르려하네
사랑만이
사랑에게
머물 수 있네
사랑이
사랑이네
사랑만이
사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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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때 일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적이 있습니다. 1993년 미국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주장한 이론으로 무슨 일에서든지 일만 시간을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람들의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일곱 시간 공부한 사람보다 한두 시간 공부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얻고,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앤더슨 에릭슨은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습니다. 시간보다 발전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무조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나아질까?’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질’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꾸준히 기도와 묵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같아져서 자기 자신도 전능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질’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종종 방송에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길을 가는 것뿐, 다른 정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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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갑자기 정전으로 불이 꺼진 것입니다. 지하에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력 회사에서는 언제 복구될지 모른다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훔쳐 가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바로 그때, 슈퍼마켓 직원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전으로 불편하게 해 죄송합니다. 전기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바구니 안에 담은 물건은 그냥 집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그 값은 여러분이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해 주세요.”
아무도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물건값을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슈퍼마켓은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그날 나간 상품 금액은 4,000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프닝이 언론에 알려졌고, 일주일간 언론에 노출된 회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얻은 광고 효과는 자그마치 40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손해일까요? 이득일까요?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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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 서로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제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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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공부工夫, 평생 학인學人>
-“서로 사랑하여라”-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선사膳賜된 날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사랑을 공부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사랑 공부인 강론을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랑의 학인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공부하라 사랑의 학교,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교회는 아름답다. 신랑이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다. 신랑의 사랑은 교회를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다.”
교황님께서 책 서문에 쓴 내용중 일부입니다. 교회 대신 우리 하나하나를 넣어 ‘우리는 아름답다. 신랑이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다. 신랑의 사랑은 우리를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다’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이요 날마다 주님 사랑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우리들입니다.
며칠전 말없이 피정하던 수녀님이 피정 끝나고 떠난다 하며 강복을 받으러 집무실을 찾았을 때, ‘아, 사람 하나하나가 신비이구나! 사랑의 신비!’ 순간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진심으로 환대와 포옹, 경외와 겸손, 경청과 응시, 침묵과 개방, 존경과 사랑, 판단 보류와 배움임을 마음 깊이 확인했습니다. 어제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난 하루였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짧은 잠언같은 깨달음의 글입니다.
-“주방장님, 감사합니다. 잘 먹고 잘 시작합니다. 오늘도 축복 많이 받으세요.”
“비워지니 채워지는구나. 비움이 채움이네. 은총의 선물이다.”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겸손의 역설, 초월의 원리, 충만한 삶, 행복한 삶”
“덜 먹고 덜 쓰는,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쓰레기를 덜 내는, 무공해의 작은 삶, 잘 사는 삶”-
네 짧은 잠언성 시같은 글, 모두 사랑에서 일치합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꽃처럼 사랑하며 꽃다운 사랑의 삶을 살라고 곳곳에서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수하고 다양한 꽃들입니다. 얼마전 깔아 놓은 야자매트 좁은 틈바구니에서 올라오는 푸르른 생명의 싹, 사랑의 싹이 감동이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그대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고 받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파스카의 삶, 파스카의 신비! 선물입니다. 행복하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신비! 놀랍습니다.”-
-“파스카의 신비! 축복 선물 받으시고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어머나 신부님!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니 생각이 어지러운데 파란 생명력처럼 저도 힘을 얻습니다. 건강하세요.”-
하루하루 사랑하라고 주어진 날들입니다. 오늘은 마티아 사도 순교 축일입니다. 빨간 제의와 영대가 순교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사랑의 순교를 통해 영원히 사랑의 주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랑의 사도, 사랑의 순교자 마티아 사도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마티아가 사도로 뽑히는 과정을 보면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확인합니다. 사도 축일 새벽 성무일도시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주 예수님 사랑에 담겨/그자리 그영광을 넘겨받으니
베드로 말씀따라 제비 뽑혀서/성령의 은덕으로 이루셨도다
깊고도 크시어라 그 사명이여/복음을 이교인에 드러내시고
당신은 죽기까지 열성을 다해/주님을 피흘려서 증언했도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랑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네 단락의 말씀이 사랑의 본질을 환히, 분명히 밝혀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 공부이자 사랑 숙제입니다.
1.“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2.“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를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4.“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순수한 사랑, 무사한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존중과 연민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당신의 친구로 뽑아 주신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주님이자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정주할 때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와 겸손의 성심聖心에 샘솟는 순수와 열정의 삶입니다.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어디나 서로 사랑하면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새삼 사랑의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쉼터, 샘터, 배움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학교에서 사랑의 학인學人되어 꽃같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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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인간의 노력이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사도 1,15)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뽑힌 열세 번째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채웠지요.
사도들은 자기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믿기에 그 수를 채우고자 합니다. 당시 모인 사람들에 대해 성경 저자가 "백이십 명"가량이라고 구체적 수를 기술한 이유는, 완전한 수인 '열둘'을 '열 차례' 되풀이 더한 수로써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완전체에 가까웠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던 시대에, 스스로의 죄악으로 소멸 위기에 처했던 벤냐민 지파를 되살리기 위해 열한 지파가 모여 고민하고 결정했던 자구책이 떠오릅니다.(판관 21장 참조) 현대를 사는 우리의 눈에 이해나 용납이 불가한 방식이기는 하나, 그만큼 열두 지파의 존속과 유지가 중요했음을 보여 주지요.
"우리와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2)
하지만 지금 사도들은 그 목적뿐만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도 주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고 있기에 구약 판관시대의 사건과 명백히 결을 달리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증인"을 간청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들이 열둘을 채우려는 의지는 단지 숫자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선포 사명을 더욱 충만히 수행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아울러 실제 예수님의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열둘에 끼지도 못한 우리에게도 열세 번째 자리가 열려 있다는 영적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사도 1,24)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 추가적 선출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주도권을 행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손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이 말씀이야말로 주님 곁에 머무르는 특권의 원리입니다. 주님의 선택! 교회 안에 여러 신분과 제도 안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모든 부르심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성되고 움직이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 역시 그렇게 불리워 감히 주님의 곁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적인 모자람을 오히려 부활의 증인이 될 자질과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주님 덕분에 가능한 기적이었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활의 증인으로 새롭게 부르심 받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어느 자리건 거기에 우리까지 있어야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좀 더 근접해 나간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부르심의 길을 걸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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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가치 철학의 일곱 가지 가치 중 : 2) 신체적 생명 가치
「신체적 생명 가치」도 낮은 가치이다. 건강, 장수, 육체미, 인간의 힘, 젊음 등은 신체적인 생명가치라고 불린다.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든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육체의 건강이 정신의 견실堅實과 동의어는 아니다.
허약한 육체에도 강인한 정신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단련을 경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육체의 단련은 정신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육체를 단련하는 것은 정신 수양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곱 가지 가치 중 가장 낮은 가치이다. -헬므트 ․에르링하겐, <선과 신을 찾는 사람을 위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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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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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dpoKAifUn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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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 16)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떠나보내는 것도
맞아들이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다.
가장 높은 곳의
사랑이
가장 낮은
이곳에 오셨다.
우리의 믿음이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믿음을
잃은 것이지
사랑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나약한 믿음을
치유하시는
하느님
사랑이시다.
부족한 우리를
뽑아 세우시는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사랑이
되는 것이다.
빠름도
더딤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계획과
계획사이에
관계와
관계 사이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함께하는
머무름이다.
머무름의
무게가
약속의
무게이다.
마티아를 통해
머무름의 축제가
다시 시작되었다.
주님의 초대도
머무름이고
주님의 간택도
머무름이다.
머무름을 통해
알게되는
사랑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고
살아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하느님 사랑을
통하여
쏟아져 내리는
은총과 희망이다.
사랑 속에서
빛나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이다.
모든 것 안에서
가장 지극한
사랑을 만나는
눈물의 시간이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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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마티아라는 인격을 주님께서 뽑아 세우시듯 우리의 인격을 친구로 부르십니다. 인격에 가장 걸맞는 일은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일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격을 충만케 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또한 사랑해야합니다. 사랑만이 서로를 풍요롭게 열매 맺게 하는 충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명령은 우리 존재의 이유이며 존재의 목적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매순간 사랑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편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된 사랑은 하느님을 알게하며 하느님께 언제나 머물게 합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뽑아 세우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뽑힌 사람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친한 친구답게 우리도 진심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친구의 일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참된 기쁨의 하루 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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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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