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 6:10~12).
참 행복의 길이란~~~~~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 영이 만족함을 얻을 때에 궁극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가장 귀한 가치로 여겨 이러한 것들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이를 얻기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 이와 같은 가치들은 영원하지 못한 것들로서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며, 우리에게 외적인 편안함과 부요함으로 인한 쾌락과 만족을 줄 수는 있겠으나, 우리의 내면까지도 완전히 만족하게 하고 평안하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들을 채우면 채울수록 욕망도 더 커져서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 공허함을 가중시키며, 그 공허함을 억지로 채우기 위해 범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와 존귀와 장수 등 모든 것을 이룬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나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다 갖추고 누려보았던 솔로몬은 이러한 인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허무함을 말하며 영적인 삶을 추구할 것을 권면한다.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영혼의 양식을 외면하고 영혼의 갈증을 이러한 지상의 것들로 채우려고 한다면 더 큰 영혼의 절망만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눈, 신앙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굳게 잡고 거기에 더 큰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인생의 허무함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정녕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자 한다면 끝끝내 허무와 절망만을 맛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눈을 돌려 참 행복의 길이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절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부귀영화와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하여도 그 심령에 낙이 없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전 6: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심령의 즐거움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만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들은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도 영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에 빠져 재물과 명예를 얻기에 급급해 하다보니 온갖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창조된 이들로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