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6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후원으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연구한 결과인 『노동의 미래의제: CSR』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
1. 머리말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이하 CSR)이라는 새로운 주제가 기업전략 및 공공정책의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CSR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다양한 토론 및 실천 활동에 비해 국내의 CSR 논의는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CSR 논의가 촉진되지 않는 데는 한국의 독특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연관되어 있다. 외환위기 이후 고착된 높은 고용 불안정 속에서, “양극화와 빈곤의 돌파구는 곧 기업의 성장에 달려있다”는 식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천억원의 분식회계와 횡령으로 구속된 기업가들의 사면복권은 다반사로 반복되고 있으며, 법을 집행해야 할 법무장관은 법과 정의의 확립보다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선동적인 구호를 남발하고 있다.
CSR 운동의 핵심은 “기업의 역할이 이윤 추구 및 법률 준수를 뛰어넘어 지역 및 이해당사자에 대한 폭넓은 책임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은 고사하고 가장 기본적인 법률 준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기업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및 노동계에서조차 CSR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다국적기업의 위상 및 권한 확대에 따른 기업 규제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고, 또 글로벌기업들의 자발적인 CSR 참여가 확대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사회가 언제까지나 CSR 논의에서 비껴나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도 2005년부터 GRI 가이드라인과 같은 글로벌 지표들을 벤치마킹하여 BSR(B.E.S.T 지속가능보고서) 가이드라인 작업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9년에는 국제표준화기구(ISO) 주도로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기준(ISO 26000)이 확정될 예정이다. 게다가 한국기업의 해외진출이 확대됨에 따라 삼성, LG,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들의 현지경영 성공을 위해서도 CSR 문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숙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CSR 의제를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노동조합운동에 있어 CSR은 ‘양날의 칼’과 같다. 이것은 CSR 운동이 기업 주도의 자발적인 활동이라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노조활동가들은 CSR이 국가 및 전통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CSR이 실행력이 담보되지 않는 기업의 일방적인 홍보활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위험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CSR은 노동조합운동의 이해당사자로서 개입력을 신장시키고 노조운동의 의제를 사회화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관점도 존재한다.
그간의 관행을 보면 노동계에서는 CSR보다는 노사 당사자 간 단체교섭을 통해 국제기본협약의 체결을 확대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때문인지 국내 노동계의 CSR에 대한 태도 역시 모호하며, 이는 곧 무대응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운동의 조직목표 실현을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이 사회적 시민권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서 CSR 운동에 대한 방관자 입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주장한다. 즉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통해 이해당사자의 역할에 충실하여야 함을 주장한다. 또한 CSR이 노동운동과 시민사회 연대의 매개고리이며, 노동조합운동의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2. 기업 역할의 재정의 작업: CSR의 내용 및 정의
왜 CSR이 제기 되었는가
CSR 논의는 최근 부상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출발과 함께 지속되었던 쟁점이었다(Segal et al 2001; Sobczak 2003). 산업사회는 어느 역사적 시기보다 물질적 부(富)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지만, 동시에 노동착취, 환경오염, 불평등 분배 등으로 인한 극단적인 사회문제와 갈등요인들을 양산하였으며,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 기업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각국에서는 기업에 대한 법률적 규제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보장과 복지국가 시스템의 구축 등을 통해 사회갈등을 조정·완화하여 왔다.
그러나 경제의 세계화와 자유화, 탈규제, 민영화 정책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체제는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을 한 순간에 뒤바꾸어 놓았다. 즉, 국가(정부)의 역할은 축소되고 기업권력이 강화된 새로운 환경이 형성되었다. 경제의 세계화가 촉진되면서 기업은 활동과 자산을 국제화하고 내부생산망과 지배구조를 변형시켜, 기업의 책임에 대한 국내 차원의 제도를 교묘히 피해가는 한편, 여러 종류의 제도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받게 되었다. 반면 기업의 공적 규제자였던 정부는 거꾸로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각종 규제 완화 경쟁에 빠져 들고 말았다.
그러나 공적 규제의 형해화라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거꾸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제를 더욱 강력하게 제기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CSR이 제기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와 다국적기업의 영향력 확대를 지적할 수 있다. 다수의 기업이 경쟁적 조건에서 활동을 수행하는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개별기업 활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독점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업의 규모 및 영향력은 지역사회를 뛰어넘어 국가 및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다국적기업의 자율적 의사결정은 해당 기업의 이익(또는 손실)에 끝나지 않고, 사회적으로 종업원, 소비자, 지역사회, 하청기업 등과 더 복잡한 이해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서 기업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회구성원 및 이해당사자 조직들이 상응하는 ‘기업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김인재, 2005).
둘째, 시민사회 및 노동의 요구를 꼽을 수 있다. 세계화가 기업에게 무한한 성공가능성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기업의 투자대상 물색(regime shopping)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생산시설 해외 아웃소싱은 시민사회의 반발을 불러왔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진영은 다국적기업의 하청구조와 자유무역지대에서 발생하는 노동·환경·인권 침해문제를 제기하며 기업경영에 도전했다. 이러한 도전의 대상이 된 것들 중에는 기업 입장에서 보자면 합법적인 활동들도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는 기업의 무형자산인 브랜드가치와 명성을 파괴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시민사회는 환경을 오염시킨 기업이나 인권을 억압하는 기업들을 규탄하고, 그 기업들의 제품에 대해서 보이콧운동을 하거나, 독자적인 기준을 마련하여 기업을 평가하고 그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여 제품구입을 장려하기도 한다.
셋째, 국제기구 및 비정부기구(NGO)의 기업행동규범 및 기업책임성지표 등의 개발과 이를 통한 활동이다. 다국적기업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기업 책임을 요구하는 다양한 규범 및 기준들이 국제기구와 NGO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규범 및 표준화 작업은 환경문제 중심의 지속가능개발지표 개발에서부터, 노동, 안전, 기부 등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최근에는 GRI의 지속가능보고서, ISO의 SR 표준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지표들은 법률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니나, 기업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 CSR은 경제의 세계화와 다국적기업의 영향력 확대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시민사회의 압력에 조응한 기업의 전략으로서 탄생한 새로운 의제이다. 이 때문에 CSR은 기업 주도 경영전략으로 그 위상이 폄하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규제(state regulation)를 대신해 기업정책을 바꿀 시민규제(civil regulation)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되기도 한다(Utting, 2002).
CSR의 정의 및 내용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개념 규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CSR은 “움직이는 과녁”처럼 일의적으로 정의하기 힘들다(Votaw, 2003; Lisa, 2006). CSR 개념이 혼선이 빚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CSR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학문적인 합의가 도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각 논자마다 CSR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성과”, “사회 공헌”, “기업윤리”, “윤리경영”, “사회적 반응” 등 다양한 용어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미국은 경영방식이나 회계제도, 투명성과 건전성 등 ‘기업윤리’ 측면을 강조한다.
둘째, CSR 연구가 경영학뿐 아니라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의 시각에서 접근되기 때문이다. 즉, CSR이 여러 학문의 시각에 의하여 형성된 개념을 구성 요소로 하여 정의되므로, 각 구성요소의 바탕이 되는 학문의 시각이 변하면 CSR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방법이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CSR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예를 들어, 1989년 엑손 발데즈(Exxon Valdez) 유조선의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었고, 1990년대 초 나이키, 갭(Gap) 등 의류기업들의 저개발국 착취공장(sweatshop)문제가 부각되었을 때는 인권과 노동문제가, 2000년 초 엔론(Enron) 사태를 계기로는 기업지배구조와 경영자의 윤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최성호 외, 2005). 이처럼 CSR은 각 국가의 특성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공통되는 것도 있고 차이가 나는 사항도 있다. 이에 따라 CSR은 “자원을 활용하여 기업의 효율을 확대하는 것에 있다”는 프리드만의 입장에서, 기업이 “법을 준수하고 이익을 내며, 윤리적이고 좋은 기업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폭넓게 규정하는 캐롤의 입장까지 그 편차가 크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CSR 논의는 1953년 보웬이 자신의 저서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에서 처음 제기하였는데, 그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기업가에게 주어진 사회 전체의 목적이나 가치에 알맞게 자신들의 정책을 추구하고 의사결정을 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에 옮길 의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맥과이어는 그의 저서『기업과 사회』(1963)에서 사회적 책임을 “기업의 사회에 대한 경제적 법적의무뿐 아니라, 이러한 의무를 넘어서 전체 사회에 대한 책임까지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논의는 기업의 책임을 기업가의 의무 및 윤리로 정의하여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양적 측정이 어렵다는 한계가 제기되었다.
이후 CSR 연구는 기업의 사회적 성과(corporate social performance)와 연동되면서, 경영자의 경영윤리보다는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책임 있는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이장원, 2006). 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는 캐롤인데, 그는 CSR을 사회적 성과모델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켜 △경제적 책임, △법률적 책임, △윤리적 책임, △자선적 책임 등 4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캐롤의 4단계 피라미드 모형은 그녀 스스로 지적하였듯, CSR 영역들 간에 우선순위가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중첩되는 CSR 영역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의 한계를 보였다.
우드(Wood, 1991)는 캐롤이 주장한 기업의 4가지 책임 요소를 수용하긴 했지만 기업의 사회제도적 기능이 단순히 경제적 기능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을 경제적 기능과 동시에 사회통합, 사회유형 유지, 목표지향 기능을 수행하는 ‘다기능 조직’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라 우드는 기업의 다기능성을 고려하여 CSR 요소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캐롤과 달리 규정한다. 즉, 기업이 윤리적,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행 없이 경제적 책임만을 최우선시 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며, 기업이 사회적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이윤을 창출해야 하나 이윤의 창출은 도덕적이나 법적으로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기업으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되 도덕적, 법률적 측면에서 할 일을 다 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문용갑 2006).
이후 CSR 연구는 정의나 개념 규정에 대한 논의보다는 실증적 연구와 대안 모색 같은 보다 구체화된 작업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Clarkson(1995)은 이해당사자 모델을 사용하여 기업의 이해당사자를 ‘1차 그룹’과 ‘2차 그룹’으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여기서 1차 그룹은 투자자, 노동자, 소비자, 공급자를 포함하며, 2차 그룹은 기업의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와 특별한 이해관계자 그룹(시민단체)등으로 구성된다.
한편, Bredgaard(2003)는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추진하느냐”를 기준으로 CSR 접근의 유형을 구분한다([표1] 참고). 그는 CSR의 유형화를 위해 기업주도(bottom-up)인가 정부주도(top-down)인가를 구분하고, 그것이 사회적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노동시장 책임에 초점을 두는 가에 따라 4가지로 유형을 구분한다. 그의 구분에 따르면, [Ⅰ]유형은 기업 주도의 사회책임에 초점을 둔 CSR 활동으로,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된다. 이 유형의 자발적 CSR 활동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결여에 따른 기능적 균형으로 이해된다.
[Ⅱ]유형은 [Ⅰ]유형과 유사하지만, 책임영역을 기업내부의 노동시장으로 좁게 설정한다. 이 유형은 국가별 차이를 뛰어 넘어 인적자원관리에 초점을 둔다. [Ⅰ], [Ⅱ] 유형 모두 정부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Ⅲ]유형은 정부 주도이며, 사회적 책임에 초점을 둔다. 이 유형은 유럽 국가에서 확인되는데, 정부 주도로 기업을 설득하는 모습을 띤다. [Ⅳ]유형은 정부 주도라는 점에서 [Ⅲ]유형과 동일하지만, 노동시장에 국한하여 책임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또한 [Ⅳ]유형은 [Ⅱ]유형과는 달리 기업 외부의 노동력 수급, 장기 실업 등 사회적 통합에 관심을 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접근방법이 존재하며, 아직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각 CSR 정의 및 이론들은 시간을 경과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정한 수렴 결과를 보이고 있다.
첫째, CSR은 기업과 사회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기업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기업의 역할을 이윤 추구만으로 여기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를 경제적 영역에 한정하려는, 주식소유자(shareholder model) 모델로 CSR을 설명하는 접근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둘째,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성과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선순환할 수 있다는 인식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드러커(Drucker, 1984)도 지적하듯이 기업의 이윤추구와 사회적 책임은 양립 가능한 활동임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인식은 단지 재무적인 요소뿐 아니라 브랜드 평판(reputation risk) 역시 기업 자산으로 중요시하는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셋째, 사회공헌과 CSR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공헌은 CSR과 대치될 수 없다. 이런 혼동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특히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기업의 자선활동은 CSR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어도 CSR 자체는 아니다. 이런 논의는 미국의 엔론 사태 이후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엔론은 미국 사회에서 사회 공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기업이었으나, 분식회계에 따른 기업 파산으로 노동자 및 국가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기업이기도 하다.
넷째, CSR 정의에 대한 논의보다는, CSR의 범주 및 내용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실용적 접근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CSR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확립되면서 이를 어떻게 적용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접근이 확대되고 있음을 뜻한다. CSR의 범주는 무엇이며 이것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범주 내 세부항목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라는, 측정지표 개발의 문제이다.
CSR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고 있는 장점이자 한계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듯 CSR을 둘러싼 이론적 논의는 진화 중이며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는 기업의 위상 및 역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기업의 토대인 사회의 요구가 다양하고 복잡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적 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업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은 중단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CSR을 “기업활동을 통해 이해관계자를 만족시키고, 경제·사회·환경의 문제에서 기업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한 책임 있는 활동”이라는 일반적 정의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3. CSR 국제기준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유엔(UN), 국제노동기구(IL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들은 CSR의 추진에 관한 다양한 문서들을 채택하여 왔다. 최근 들어서는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소비자운동단체 등 NGO들도 CSR의 규범화를 추진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노동권이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은 1919년으로, ILO가 국제적으로 구속력 있는 조약을 채택하면서였다. ILO 설립 이후 기업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으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근로자 보호 및 사회보장에 관한 많은 협약과 선언들이 채택되었다. 이들 협약과 선언들은 노동 분야에 있어 CSR에 관한 중요한 행동규범이 되고 있다.
한편, 과거 CSR의 내용이 환경, 노동 등 특수 이슈에 국한된 측면이 강했다면, 1990년대 후반부터는 경제·사회·환경(Three Bottom Lines)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속성에 따라서 가이드라인, 협약, 행동강령, 운영표준, 기업지배구조 등 그야말로 다양한 CSR 국제기준들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UN의 글로벌 콤팩트(Global Compact), 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 GRI 지속가능보고서 등을 살펴본다.
UN 글로벌 콤팩트
UN의 글로벌 콤팩트는 1999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의 제안으로 2000년 7월 공식출범한 대표적인 기업 행동규범이다. 이 협약은 ‘10대 원칙’을 기업활동에 부여하고, UN의 목표를 지지하는 활동을 촉진하는 걸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5년 현재 세계 2,300여 기업이 이 협약에 가입해 있으며, 한국(2006년 12월 기준)은 한국전력을 비롯한 12개 기업과 2개 NGO단체가 등록되어 있다. 세계협약의 10대 원칙은 [표2]와 같다. 이중 원칙 10은 2004년 6월에 신규로 추가되었다.
글로벌 콤팩트는 세계 인권선언, 노동의 기본원칙 및 원리에 관한 ILO 선언, 그리고 전 세계 수뇌회담에서 채택한 의제21(Agenda 21) 환경 원칙 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글로벌 콤팩트는 협약준수 여부가 기업 자율에 맡겨져 있으며 행동 결과를 평가·측정할 수 없다. 때문에 어떻게 실효성을 확보할 것인가가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고하기 위하여 1976년 제정된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뇌물방지와 소비자 보호 등을 추가하여 2000년 6월 새롭게 개정된 가이드라인이다. 개정 가이드라인은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이드라인을 수락한 한국을 포함한 33개국이 각각 연락사무소(NCP: National Contact Point)를 설치하여 홍보 및 관련 문제처리를 진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이드라인은 회원국 공동명의로 다국적기업에 대해 일정한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국제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이드라인은 기업이 준수해야 할 일반적인 원칙으로 △정보공시, △고용 및 노동관계, △환경, △뇌물방지, △소비자 이익, △과학기술, △경쟁, △세금 등의 8개 항목에 대한 상세한 행동기준을 규정하고 있다. 노동관련 내용은 제4장의 고용 및 노사관계에서, “다국적기업은 법령과 노사관계 및 고용에 관한 일반적인 관행의 기본 틀 안에서 아래의 사항을 이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아래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업은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대표에 의해 대표되는 근로자의 권리를 존중하여야 하고, 고용조건에 관하여 이들 대표와 개별적으로 또는 사용자단체를 통해 협상에 임해야 한다. ㉡기업은 아동노동을 실효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기업은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근절시켜야 한다. ㉣기업은 근로자의 인종, 피부색, 성별, 종교, 신조, 국적,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고용 또는 직무에 있어서 차별하여서는 안 된다.
둘째, ㉠기업은 효과적인 단체협약의 진행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편의를 근로자대표에게 제공하여야 한다. ㉡기업은 고용조건에 대한 효과적인 협상을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근로자대표에게 제공하여야 한다. ㉢기업은 관심사항에 대하여 근로자들 또는 근로자대표 사이의 협력·협의를 촉진하여야 한다.
셋째, 기업은 근로자 및 그 대표들이 개별사업장의 성과나, 필요한 경우 당해 기업 전체의 성과에 대해 사실적이고 공정한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넷째, ㉠진출국에서 상응하는 사용자가 준수하는 기준보다 불리하지 않은 고용 및 노사관계 기준을 준수하여야 한다. ㉡기업은 직업상 건강, 작업 중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적정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다섯째, 기업은 그 운용에 있어 가능한 최대로 현지 인력을 채용하고, 근로자대표 또는 적절한 경우 관련 정부당국과 협력하여 숙련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여섯째, 기업은 근로자들의 생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기업 운영상의 변화를 검토함에 있어, 특히 집단 정리해고를 수반하는 사업장의 폐쇄를 검토하는 경우, 그러한 변화사항을 근로자대표 또는 적절한 경우 관련 정부당국에게 합리적으로 통보하여야 한다. 그리고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근로자대표 또는 적절한 정부당국과 협력하여야 한다. 각 경우의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되, 경영진은 최종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러한 통보를 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정에 따른 영향을 완화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일곱째, 고용조건에 대해 근로자대표와 신의 성실한(bona fide) 협상을 진행 중이거나 근로자들이 단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업은 그러한 협상에 부당하게 영향을 행사하거나 단결권의 행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작업부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당해 국가로부터 이전하겠다고 위협하거나 근로자들을 당해 (다국적)기업의 일정 사업장에서 다른 나라로 전근시키겠다고 위협해서는 아니 된다.
여덟째, 기업은 권한을 부여받은 근로자대표와 단체교섭을 하거나 노사관계문제에 대해 협상해야 하고, 당사자들이 상호관심사항에 대한 결정권한을 가진 경영진대표와 협의하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OECD 다국적 지침은 법적 구속력이 없고 ‘자발적’이라는 성격을 갖긴 하지만, 경영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해당지침은 정부의 실행 메커니즘인 국가연락사무소(NCP)가 뒷받침하는 정치적 공약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이 여타의 CSR 행동강령과 구별되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GRI 지속가능보고서 가이드라인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는 1997년 환경책임경제연합(CERES)과 유엔환경계획(UNEP)이 공동사업의 형태로 창설한 기구로서, 세계적이고 자발적이며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과정을 통해 표준화된, 기업 지속가능성보고서 가이드라인의 개발과 보급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2000년 6월 첫 번째 지속가능성보고서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였으며, 2002년 7월에 두 번째 지속가능성보고서 가이드라인(G2), 2006년 10월 세 번째 가이드라인(G3)이 발표되었다.
GRI의 지속가능성보고서는 기관의 경제적, 사회적 성과를 공적으로 알리는 과정이다. 재무보고만으로는 주주와 고객, 지역공동체, 투자자들에게 기업 전반의 성과를 알릴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여, 많은 기업들이 지속가능보고서를 통해 경제적 영향뿐 아니라 환경 보호와 사회적 후생에 대한 성과를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업이 발간하는 지속가능성보고서들은 비교가능성, 일관성, 신뢰성이 결여되어 객관적인 준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GRI 가이드라인은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고자 고안됐으며, 모든 유형(기업, 공조직, 비영리조직)과 규모(적은 인원에서 대규모 인원까지)에서, 어떠한 입지의 조직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GRI 사회적 책임의 세 가지 범주인 △경제적 성과, △환경적 성과, △사회적 성과는 [표3]과 같이 세부적인 지표로 구분된다(전경련, 2005).
2006년 9월 현재 세계 860개 기업이 GRI 가이드라인에 따라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으며, 한국은 삼성SDI, 현대자동차 등 12개 기업이 GRI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격년으로 발간되는 KMPG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계 1600여개 기업(Fortune 500의 250대 기업과 16개 국가별 100대 기업 포함) 가운데 40%가 GRI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지속가능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2006년 10월 세 번째 가이드라인(G3)이 발표되었는데, G3 가이드라인은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보고원칙과 가이드만을 본문에 제시하여 G2 가이드라인보다 간결해졌으며, 성과지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은 지표 규약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4. CSR과 노동의 과제
핵심 이해당사자로서 노동조합운동
CSR은 노동조합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그리고 CSR에 노동조합이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동자 및 노동자 대표조직인 노동조합이 기업조직에서 갖는 특수성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업조직에서 노동자가 갖는 특수성은, 노동자들은 기업내부의 핵심구성원임에도 법률과 계약만으로는 이익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2차적인 이해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잠재적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지배구조 내에서 노동자가 대표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의 공적 목적이 퇴색하며, 노동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은 “주주가 기업의 주인이므로 기업의 통제권을 배타적으로 보유해야한다”는 가정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Jones & habbard, 2005).
사실 법상으로도 주주는 회사자산의 소유자가 아니다. 주주는 단지 그들 주식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지며, 주주만이 회사의 리스크를 부담한다는 생각은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이다. 공장폐쇄, 기업의 파산 등 기업의 생존문제는 주주 못지않게 기업의 다른 이해당사자들에게도 중요하다. 사실 주주는 포트폴리오 투자를 통해 얼마든지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다. 오히려 종업원 등 다른 이해당사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노동자(노동조합)는 1차적 이해당사자의 위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핵심 이해당사자로서 역할과 권리는 노동조합을 통한 단체교섭권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기업지배구조에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CSR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업의 1차 이해당사자로서 부담하고 있는 위험 요인에 상응하여, 법률과 계약에서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핵심 구성원에 대한 기업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체교섭권을 보완할 수 있는 측면에서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들이 개입하고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 실례로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16개국이 이사회 차원의 종업원대표제에 관한 일반규정을 마련하거나 부문별 협약을 체결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세계화와 결합된 다양한 형태의 경영전략은 기업이 자신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보다 쉽게 회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국내뿐이 아니다. 단체교섭에 의한 규제력은 글로벌 소싱에 따라 분산된 공급업체와 하도급업체에서 발생하는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 활동에 따른 노동자의 위험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 기업의 핵심 이해당사자로서 자기 위상을 확립하는 것과 함께,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기업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핵심적인 의제가 바로 CSR인 것이다.
즉, 단체교섭이라는 전통적인 노동조합 활동은 종업원의 기업지배구조 참여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이 기업지배구조에 주안점을 두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강화될 수 있다. 노동조합을 통한 구속력 있는 규제를 강조함으로써 명확한 기준을 수립할 수 있다. 그리고 CSR은 기업의 자발적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며, 노조의 참여를 통해 그 성과를 더욱 확대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CSR 참여 및 개입
현재 한국 노조운동은 CSR과 관련한 구체적인 활동을 추진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는 CSR이 기업 주도의 정책이라는 점,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이 30여 곳에 불과하다는 점, CSR이 법적 구속력이 없는 기업의 자발적인 활동이라는 점 등으로 인하여 노동조합의 전통적인 기능인 단체교섭에 비해 그 의미와 위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이 기업 주도의 CSR 활동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경영 참여의 폭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감시자 및 규제자로서의 자기기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따라서 CSR은 노동조합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위기이자 새로운 도전이며 기회이라 할 것이다(W. Justice, 2003).
CSR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2004년 12월8일 국제자유노련(ICFTU) 제18차 총회에서 채택된 “글로벌 경제시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도 동일하게 지적되고 있다. ICFTU는 이 결의문에서 “양질의 고용 창출, 기술과 지식의 보급 등 기업 활동이 가져오는 중요한 결실들은 대부분, 규제가 행해지거나 정부가 시민의 사회·경제적 복지와 권리를 옹호하고 추진하지 않는 한, 충분하게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세계화는 정부 간 협력이나 기업의 국제적 규제를 더욱 필요로 하고 긴급을 요한다.”(제1항), “기업은 CSR을 자신들만이 정의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 기업이 그 책임을 재정의 또는 재해석하기 위해서 CSR을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경고함과 동시에, 민간에 의한 기준설정이 ILO 또는 정부의 본래적 역할을 대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제10항)고 주장하고 있다. 즉, 노동조합운동은 CSR를 만든 주체는 아니지만 CSR를 형성·촉진할 수 있는 유력한 주체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도전을 제기하고 기회 이익을 적극화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국가별로 노동운동의 CSR 대응 전략은 통일적이지 않으며 각 국가의 경제발전, 노동운동의 역량, 기업지배구조, 시민사회의 요구, 법제화 수준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CSR에 대한 압박 내지 요구는 유럽보다는 영미국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Duval, 2003). 이는 노동조합의 경영참여를 통한 기업 규제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영미국가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영미국가의 기업 유형이나 반노조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에 있어 CSR은 노조운동의 새로운 참여 영역으로서 위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CSR 의제에 관심을 갖고 정책적 참여활동을 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조합운동의 의제 확대이다. 우리 노동운동은 1987년 이후 임금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을 추진해왔으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고용안정 및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철폐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활동 변화에도 노동조합운동이 제기하는 의제는 여전히 작업장 영역에 국한되어 있으며, 기업감시자 역할에 소홀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CSR은 노동운동의 의제를 사회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 노동조합은 기업의 법적,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역할을 감시하는 주도자로 나설 수 있는 계기를 CSR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CSR 참여는 단체교섭 활동을 보완하는 역할과 기능을 갖는다. 한국 노조운동은 기업별노조체계와 10%대의 낮은 조직률로 인해 계급 대표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결과 노조운동의 성과가 기업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여, 노동자계급 연대성 상실이 현실화되고 있다. 물론 이를 정면 돌파하는 길은 조직률 향상, 산업별노조 건설을 통한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 등이다. 그러나 CSR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양한 영역에서 강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 방법이다. 노동운동 및 시민사회의 요구로 CSR 범주는 △핵심노동기준의 준수, △간접고용의 차별금지, △생산사슬 및 하도급 관계, △지역사회, △다양성과 동등 영역 등으로 확대되어 있다. 노동운동의 CSR 참여는 기존의 단체교섭 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다양한 영역의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될 수 있다.
셋째, CSR 운동은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소통·연대할 수 있는 매개 지점이다. CSR이란 주제는 노동운동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확장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질 때, 그리고 시민운동이 생산영역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운동적 도전을 생각할 때 만나는 지점이다(하승창, 2004). 즉,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만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동안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사안별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시민운동으로서는 그 요구를 진지하게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공통의 정치적 목표가 없는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노동운동과 일상적 연대를 진행할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CSR 운동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공통의 가치에 기반한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뚜렷한 공통의 구체적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이를 매개로 이전과는 다른 연대의 가능성이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에게 열릴 수 있다.
넷째, CSR은 국제노동운동의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매개고리다. 세계화에 대한 노동자의 대안은 보편적 노동권 실현을 위한 국경을 뛰어넘는 노동계급 연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연대는 구호가 아닌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노조운동은 국제노동운동의 엄호 속에서 발전해 왔고, 이제는 그 ‘빚’을 제3세계 노조운동에 대한 지원과 연대로 갚아야 할 시점이다. 외국 다국적기업의 한국 진출만큼이나 한국 다국적기업의 세계시장 진출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창한 구호만을 외치는 것을 넘어서 해외진출 한국기업에서 노동인권 탄압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는 새로운 국제연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미 이 분야는 CSR의 핵심영역이다.
CSR 참여를 위한 실천 방안
노동조합운동에게 CSR은 낯선 운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특수한 사회경제적 조건 및 노사관계, 그리고 기업지배구조는 노동조합의 CSR 활동을 역설적으로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실제 기업 및 산업단위 노사관계에서는 CSR 요구는 아니더라도 노동조합운동의 사회화라는 관점(사회개혁투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책무)을 요구하는 단체교섭 활동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추진되어 왔다. CSR 요구가 정식화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조합들은 각 사업장(산업별)의 조건에 따라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제도 개선,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의 규제, △교육개혁, △언론민주화, △주택 및 물가문제, △금융개혁 등 조직별 주요 현안과 관련하여 사측에게 사회적 의무를 촉구하며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기업의 사회적 책무 요구는 세부 내용을 구체화하지 않은 추상적 합의안에 그쳤다는 한계를 가졌지만, 노동운동이 직접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단체협약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제기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CSR 참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 우리 노동운동의 자산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다.
CSR은 기업의 책임을 계량화 및 지표화하여 그 책임 영역을 보다 분명히 하는 장점을 갖고 있으나, 기업의 자발적 활동에 의존해 구속력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의 기업책임운동은 CSR의 경제, 사회, 환경 분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단체협약’으로 쟁취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하며, 각급 노조 조직의 위상에 상응하는 CSR ‘정책 요구’를 마련하여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CSR 참여 및 활동을 위한 세부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CSR 측정지표 개발 문제다. CSR은 노사관계부터 지배구조를 비롯하여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 결과 산업이나 기업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성을 반영한 지표가 개발되어야 한다. 현재 노동운동의 적극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기준이 마련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BSR 가이드라인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중앙조직인 내셔널센터는 국제적으로는 ISO 26000, 국내적으로는 BSR 지표 구성에 참여를 제도화하는 한편, 산별노조(연맹)는 산별의 특성을 반영하는 가이드라인이 마련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여야 한다.
둘째, CSR은 기업 주도의 활동이지만 그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사공동의 작업(노사 공동 T/F팀 구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CSR 관련 기업 내부위원회에 노동조합의 공식적 참여가 필요하다. 기업 단위의 지속가능보고서 위원회에 노조의 참여가 보장될 때 이 보고서의 구성 및 모니터링 작업이 실효성 있게 추진될 수 있다.
셋째, 노동조합은 CSR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조 산하에 별도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회에는 노조의 정책담당자를 포함하며, 전문영역별로 지역사회의 시민단체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위원회는 지역사회의 요구를 수렴하고 노조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는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일회적 협력이 상시적 연대로 발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이 CSR 활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단체협약으로 CSR 활동 및 지속가능보고서 발간에 대한 노사 공동의 역할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 세부내용으로는 △CSR의 목표, △이해당사자와의 관계, △보고서 작성 및 검증방법, △반론 청구권 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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