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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9일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 이사 6,1-2ㄱ.3-8
제2독서 : 1코린 15,1-11
복 음 :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부르심과 파견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이가 사명을 받아 파견되기까지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은 죄 많은 제 모습을 깨치기 마련입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직접 뵙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더러움을 깨닫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에서 핵심 도구인 입이 더럽다는 것은 근본적인 장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타는 숯으로 정화된 다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하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노련한 어부 시몬은 밤샘 고기잡이에서 허탕을 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로 잡은 물고기 앞에서,
아니 예수님의 신적 권위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죄인인 자기에게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라는 말씀으로
그를 정화하시어 새로운 임무로 부르시고,
시몬과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릅니다.
교회를 박해하였기에 “칠삭둥이”(1코린 15,8)로 자처하는 바오로는
열두 사도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은총으로 정화되어
“지금의 내가”(15,10)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부르심부터 파견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렇게 우리의 합당함이 아니라
부당함을 정화하여 응답을 준비시켜 주는 은총에 자신을 내맡깁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 미사에도 또 청소년 미사에도 많은 아이가 나옵니다.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큰 희망이고 또 큰 기쁨이지만, 50대 중반을 넘어선 제가 아이들과 함께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세대 차이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 나면 힘이 쫙 빠집니다.
함께하는 젊은 신부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부의 부족으로 인해 우리 본당에 보좌 신부가 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친한 선배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 즉 본당에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혼자 아이들을 담당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우울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는데, 선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열심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둘 수 있었습니다.
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힘이 되는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힘이 빠지는 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로 더 안 되는 길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군중은 주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그물만 씻고 있을 뿐입니다.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어부 일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단한 일과를 마쳤는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도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는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신적 권위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말씀에도 그렇게 집중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에 커다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힘이 되는 이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의 말씀을 계속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일에만 집중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의 이웃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변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 공동체
혹은 가정의 변화, 타인들의 변화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변화’란 단지 자신의 악습이나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자기 교정이나 자기 개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질적인 변화,
곧 삶의 패러다임, 사고의 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등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변화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변화의 힘은 회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만남에서 오며, 회개는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곧 은총과 사랑의 체험의 수락이
변화와 회개를 불러오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러하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그러하고,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전해줍니다.
곧 하느님과의 만남 체험이 회개를 불러왔음을 보여 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1코린 15,9)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곧 체험이 회개와 변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회개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그 은총을 수락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앎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하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죽음의 수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자신의 앎, 그것도 이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앎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많은 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단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어떤 한 분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진정한 변화’는 찾아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는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회개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 선물, 이 은총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하느님과 우리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아니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과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순명으로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성장합니다.
이 시간 말씀에 순명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한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고 하셨을 때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가5,5)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부로서의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시몬은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뢰에 찬 순명은 경이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시몬이 만일 그 말씀을 무시하여 듣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고기를 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석, 으뜸 제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시몬의 순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게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순명이란 자신의 지식과 사고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권위에 대한 신뢰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기를 잡는 시몬은 자기 경험과 판단을 제쳐놓고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권고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기잡이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관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이 행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듣고, 새기고,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낙심하고 지친 시몬과 다른 어부들을 위해 이루신 기적은
단순히 고기를 많이 잡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패배 앞에서 실망과 낙담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기뻐하지 않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겸손하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몬의 눈에는 고기 대신 권능의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단순히 스승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죄스러움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주님 앞에 서니 자신의 허물이 보였습니다.
그분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자기 자신을 보았기에 스스로 엎드려 자백한 것입니다.
이미 그는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시몬은 그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생활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따름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는 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시몬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어부로서의 경험을 접었듯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 판단을 주님께 맡길 때
놀랍게도 신앙의 눈이 새롭게 뜨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애착을 버림으로써, 그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감히 예기치 못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만,
권능을 만난 다음에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의 삶은 믿기 전과 후가 분명 달라야 합니다.
오늘 성당에 오실 때의 마음과 가실 때의 마음은 달라야 합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하여 주님을 마음에 모셨으니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삶이 바뀝니다.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아주 오랫동안 쉬다가 오시는 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분의 고해성사는 내용이 아주 짧습니다.
몇 마디로 죄를 고백하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은 내용이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주 보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 ‘들보’ 같은 죄도 안 보이다가 ‘티’ 만한 죄도 보이게 됩니다.
영혼의 거울이 맑고 깨끗해진 까닭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 앞에 서면 어느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보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자비를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21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권능의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넘쳐 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중학생 때입니다.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생은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질문하는 경우와 아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입니다.
모르는 친구들은 수업에 큰 관심이 없어서 질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저도 질문하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도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 문제를 내시고, 제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맡기셨습니다.
고등학생 때입니다. 친구들과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출발시간이 되었는데 3명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남아서 기차표를 주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좋아하던 여학생과 같이 가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 친구가 함께했고, 저는 남아서 늦게 온 친구들에게 표를 주고 같이 왔습니다.
그래서 인지, 저는 그 여학생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고,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를 위해서 남아 있었던 것이 어쩌면 저의 사제 성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음에도 하느님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치는 목동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직업, 나이, 성격, 재능이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된 사람들,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릇의 겉은 닦지만 안은 닦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무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짐을 맡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 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 사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카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 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수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11).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면을 주님으로 가득 채울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물때가 좋을 때면 근처 수로로 밤낚시를 나갑니다.
낮에는 잔챙이들이 활개를 치지만, 희한하게도 밤이 되면
씨알 좋은 녀석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하지요.
밤바다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풍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일 때도 수두룩합니다.
미끼를 싱싱한 것으로 갈아도 끼워보고, 수심도 바꿔보고,
자리도 옮겨보고, 움직임도 줘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거듭 반복된 헛그물질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괜히 말 걸었다가는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 말씀을 들은 시몬은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 주신 것이 참으로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포크레인 앞에 삽질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의 표현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결과는? 인생 한 방이라고, 초대박이 터졌습니다.
그야말로 긴 연장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그물질에 오랜 실패가 만회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 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전문직 어부였던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씀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부도 아닌 예수님, 고기잡이에는 전혀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분야만큼은 프로인 시몬에게
전혀 설득력 없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라고 권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고수해 왔던 기존의 사고방식, 개인적인 야욕,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과도한 욕심, 사사로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라는 권고이겠지요.
예수님이란 너무나 큰 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모든 것을 다 바꾸란 말씀이겠지요.
그릇은 무엇이 담기냐에 따라 그 그릇의 품위까지 달라집니다.
아무리 멋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애완견 사료를 담아놓으면 개밥그릇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투박한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보물이 담기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 내면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값진 존재가 됩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은 짐승을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굽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 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만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맥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문서들이 아닙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행적도 事實 그대로만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도 그분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군중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반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과 엎드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인이 하느님 앞에 갖는 자세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 신앙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하는 겐네사렛 호수에서 있었던 ‘기적적 고기잡이’ 이야기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담아서 전합니다.
겐네사렛 호수가 있는 갈릴래아를 무대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이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들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 중에 오늘 거명된 시몬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原始 신앙공동체가 전하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이 이야기로 그들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으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구원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립니다.
오늘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쳤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배 한 척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른 배를 불러야 할 정도로 고기잡이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일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사실 보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여기서 ‘낚는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말에 ‘낚는다.’는 뜻은 낚시를 미끼 안에 감춰서
그것을 먹이인 줄 알고 삼키는 물고기를 잡는 행위입니다.
물고기는 속아서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은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 ‘고기잡이’ 이야기를 먼저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말씀 따라 실천하면,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많이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 신앙이라는 대책을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안에 두려움을 불어넣고,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敎勢 확장을 꾀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한으로 행세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기 위해 특수 복장을 하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來世를 위해 全大赦, 限大赦를 챙기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고,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 예수님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기득권층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을 가진 이들과 사귀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치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풍요롭게 살기 위해 그동안 마련하였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轉向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마련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죽어서
내세에서도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그런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도 베풀며 살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삽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따라 실천하는 제자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