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Pilgrim’s Song)
이슬은 밤이 가장 고요할 때 풀잎위에 내린다는 어느 현자의 말처럼, 12월 첫 주일 아침, 겨울을 알리는 늦은 비가 촉촉이 땅위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적시었다. 그런데 마치 이러한 이슬방울과 빗방울이 우리의 눈시울에 맺히듯 찬양대가 부른 ‘순례자의 노래’화음은 잔잔한 은혜의 강물이 되어,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가 강남예배당을 흘러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자 집사님의 표정관리도 그러했다. 왜일까? ‘1.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Zion) 성(城)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2.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 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라는 가사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광야로 걸어 나온 우리 공동체의 앞날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 천성을 향해 길을 떠난 순례자이며, 잠시 머물 이 땅의 나그네이다. 또한 험하고 거친 항해를 마치고 아침 안개가 걷힌 아늑하고 포근한 포구에 정박하기를 고대하는 항해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항해자였던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1620년 9월 102명의 순례자들이 신대륙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떠나 65일의 항해 끝에 지금의 매사추세츠의 케이프 코드(Cape Cod)에 정박하였다. 이들 중 35명은 ‘영국분리주의자 교회’(English Separatist Church)로 불리는 급진 청교도(Puritans)였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1607년 영국성공회의 가톨릭 전통에 반대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처음은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으나 얼마 후 라이던(Leiden)이란 도시로 옮겨 10여 년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영어와 영국전통을 상실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껴 신대륙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1620년 런던주식회사(London Stock Company)가 항해자금을 지원한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려고 했던 곳은 버지니아 식민 영지였던 허드슨 강 부근이었으나, 케이프 코드에 가까운 플리머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정착 자들이 처음부터 ‘Pilgrims’로 불리지 않고 ‘Old Comers’로 불렸다. 그 후 이들의 지도자인 Bradford의 문서가 발견되자, 그가 네덜란드를 떠난 사람들을 ‘성도(saints)와 순례자(pilgrims)로 칭한 것을 알게 되었다. 1820년 식민지개척 200주년이 되던 해에 웅변가인 다니엘 웹스터가 그들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로 부르자 이것이 정식명칭이 되었다. 이들이 정착한 첫 해 겨울에 반 이상이나 넘는 정착 자들이 영양실조와 추위로 인해 사망했다. 플리머스 부근에는 수많은 원주민부족들이 유럽인들이 오기 전부터 수 만년 동안 살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이 정착 자들에게 강냉이 재배방법과 물고기와 비버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다음해인 1621년 가을 수확을 끝내고 포카노켓츠(Pokanokets)부족과 함께 축제음식을 나눈 것이 오늘의 추수감사절의 기본음식이 되었다.
그 후 영국에서 제임스1세와 찰스1세 집권 때에 행해진 성공회의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많은 신자들이 신대륙으로 순례자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 이들 다수의 청교도들(Puritans) 혹은 비분리성공회신자들은 성공회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으나, 성공회의 가톨릭잔재를 청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 청교도들은 1620년대에 영국에 남아서 의회를 통해 스튜아트왕조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일부는 Fortune호와 (1621년)Anna과 Little James(1623년)호에 승선, 신대륙으로 출항하였고, 1630년에는 존 윈스럽(John Winthrop)이 매사추세츠만 회사(Massachusetts Bay Company)와의 이민계약을 찰스1세로부터 인가를 받아 천 여 명의 청교도(Puritans)피난민들을 매사추세츠에 정착시켰다. 그 후 1640년에 이르기까지 뉴잉글랜드식민지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청교도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인 존 윈스럽(John Winthrop)은 보스턴을 식민지 수도로 하여 가장 많은 인구와 함께 번영하는 식민지지역을 창설하였다.
다행히 교리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그림파더스와 청교도들은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는 분리주의자의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이들보다 수적으로 많고 지식층이었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치가 되었다. 이 두 집단은 동질화 된 문화적 유전자를 형성화였으나, 세상을 보는 눈은 전적으로 상이하였다. 필그림 성도들(Pilgrims Saints)은 타인에 대해 관대하나, 청교도들(Puritans)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우월성을 믿고 뉴잉글랜드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누려왔다. 그들에게는 원주민들에게 감사의 축제를 나누지 않을 뿐 아니라, 우정이란 아예 없고 공격적이며 오만하고 음식이나 땅을 공유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매년 11월에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고 있지만 이는 소수의 분리주의자들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이란 그들이 처음 정착 시에 기본적인 선물인, 원주민들로부터의 환영과 정착지에서의 적응과 원주민들과의 공동사회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첫 번째 추수감사절은 기적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하면 1621년의 추수감사절은 두 문화가 융합한 것이며, 평화적인 관계를 간절히 바라는 상징이었다. 이러한 필그림의 유산인 나눔의 정신이 미래의 희망으로 지속되기를 대다수 미국인들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본토 아비 집을 떠나듯 네덜란드와 신대륙에까지 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순례자들을 생각하며 우리 공동체를 떠 올려보았다. 그들이 첫 추수감사절을 기념했을 때는 반 이상의 순례자들이 천성으로 떠난 뒤였고, 지금 우리의 숫자도 그러하다. 그러나 소수의 분리주의자들이 기념한 추수감사절의식이 문화가 되었듯이 우리의 순결한 믿음이 개혁의 모퉁이 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청교도들이 가졌던 선민적인 우월성과 오만이 우리에게 있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 타인에 대한 관용과 겸손으로 성결회복의 길에 동행하는 순례자가 되기를 바란다. 청교도들이 실패한 것처럼 센터에 남아서 개혁을 꿈꾸는 선량한 성도들이 있다면,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라는 찬송가의 결기를 속히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꼭 읽고 깨달아야 할것 같습니다
좋은 내용의 글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청교도와 필그림을 아무 생각없이 혼용하던 일을 잘 정리해 주셨고
우리의 처지와 비교하여 의미있는 해석을 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난주 찬양대의 필그림의 노래가 어찌나 눈물을 쏟게하는지 옆사람에 숨기느라 혼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