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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25)
차가운 분노(4)
백산의 말에 구양중과 설련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낙이라
는 빈민가에서 건달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자가 무초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너희들은 무초의 경지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거야, 내공심법을 부단히 연마하다보면 어느 순간 공령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는 단전에 축기(縮氣)한 내공의 흐름
에서 자유로워지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힘을 방출하고 거둬들일 수 있
으니 그때를 가리켜 무초지경(無招之境)이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던 바를 구양중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백산의 입에
서 무론(武論)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초지경(無招之境).
흔히 초식을 버린 경지라는 단순한 말로 대변된다. 하지만 말처럼
단순한 경지는 결코 아니다.
본래 초식과 내공심법은 하나의 짝으로 이루어진다. 즉 초식은 단전
에 축기한 내공을 외적인 힘으로 배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도식
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각 무공마다 내공심법이 따로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고, 내공
심법과 맞지 않는 초식을 펼쳤을 때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심하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해서 대부분의 무인들은 내공심법을 먼저 완성한 다음 초식을 익혀
나간다.
"맞다! 구양중. 네가 말한 그 이론이 바로 대부분 무인들의 정통적
인 견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엉덩이에 땀띠 나도록 앉아서
명상을 해야하지. 온갖 잡념을 뿌리쳐야하고."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저 놈이 써먹었던 방법이다. 우선은 단전을 봉쇄하여 내기의
흐름을 차단한 다음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싸울 때도 초식은 절대 사
용하지 않는다. 상대의 허점을 발견하면 그곳을 향해 무작정 손이나
발을 뻗어내는 거지. 수백, 수천 번을 싸우다보면 막싸움에 익숙해지
면서 일정한 틀이 잡혀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는 광치 일행을 턱으
로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가 아닌 몸을 먼저 무초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군요."
백산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설련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몸이 먼저
익힌다는 말은 손발의 움직임만을 의미하게 아니다.
손이나 발을 뻗어낼 때, 근육의 움직임이나 힘의 이동경로는 몸이
기억하게 되고, 통로로써 굳어진다.
과거 초식에 의해 생겼던 힘의 배출 통로와는 다르게 새로운 힘의
지도가 몸 속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맞다, 말이나 글로 표현은 못하지만, 이미 몸 속엔 새로운 내공심
법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걸 가리켜 무초의 경지라 부른다.
그리고 그 통로를 글로서 표현해낸 말을 어렵게 표현해서 심득(心得)
이라 부르고."
"그럼 광치 저분은 왜 다시 단전을 개방하지 못했지요?"
의아한 얼굴로 설련이 물었다. 무초지경을 이루기 위해 본인이 단전
을 봉쇄했다면 풀어내는 것 또한 본인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광치는 막힌 단전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대장처럼 바보구나, 내가 하지 않았으니까 못 풀었지."
"왜, 그만 싸우냐. 하던 짓 계속하지."
"이 녀석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거든, 다른 놈은 다 있는데
내 동생들 중엔 섯다는 없다. 대장 너도 건달 출신이지?"
커다란 머리를 긁적이며 악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육상이나 건져와 임마. 만일 그 자식 죽었으
면 너도 물귀신으로 살아야 할 테니까 각오해."
"헉! 육상!"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른 광치의 신형이 순식간에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씨팔! 야 우리도 인삼 좀 구해보자. 저 미친 인간 몸놀림 봐라. 완
전히 번개다 번개."
걸레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나지막하니 투덜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대등하게 싸웠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육상을 잡을 때 이미 알아봤지만
두목인 광치의 무공은 더 이상 쫓아갈 수 없는 경지로 멀어져 버렸다.
잠시 후.
물 속에 있던 육상을 건져온 광치가 백산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직 안 죽었다, 대장."
"으으으! 살려……."
"살려 달라는 말이구나. 그럼 대답을 해야지. 하연일 데려 간 놈이
누구냐?"
"그는 백절신편(白節神鞭) 모주앙(毛周央)……."
지난 10일 동안 낙양 전체를 뒤져 찾아온 보람도 없이 육상은 곧바
로 실토해버렸다.
오히려 허탈해진 쪽은 백산이었다.
뭔가 반항이라도 해야 그동안 맺힌 것이라도 풀 터인데, 육상은 그
럴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모주앙이면 북황련 전밀사 사준데……."
육상의 말을 들은 광치가 혼잣말을 했다.
"형님, 이 자식이 모주앙을 발설한 건 어제였소, 어제."
"근데 나는 왜 처음 듣는 거지?"
"그거야 형님이 이 자식 두들겨 패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웬만
큼 패야지."
"단전이 살아나서 시험하느라 그랬지, 임마. 어쨌든 편하게 처리했
으니까 됐지 뭐."
"광치 너, 북황련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구나."
슬쩍 지나치는 말로 백산은 물었다. 처음 육상을 잡아 오라 하였을
때 북황련 인물이라고만 말했을 뿐, 생김새 등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상을 잡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모주앙
까지 알고 있다.
"당연히 잘 알지. 왕년엔 그곳에서 날리던 몸이었는데. 그나저나 무
슨 일이냐, 대장."
"그 놈이 사람을 납치해갔다. 천음신맥을 타고난 소녀를. 그 자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나?"
"그럼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대장. 소녀는 무사할 테니까요."
광치와 백산을 번갈아 쳐다보던 걸레가 슬쩍 끼어들었다.
"혈마총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전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주앙 그놈은 용서가 안돼서 말이다."
"지금 대장 네 실력으로는 모주앙 그놈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10
정(十正)의 일인으로 불리고 있지만 내가 알기론 그들 중에서도 상위
권에 드는 자다. 대가리 또한 모사꾼에 가깝고."
"건달노릇 하기 전엔 뭐했냐? 왕년에 화려했던 과거 좀 들어보자."
"나? 쑥스럽게 그런걸……. 망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였다."
"북천지옥대(北天地獄隊)!"
설련이 나직한 고함을 내질렀다. 북천지옥대라 불리는 북황련 단체
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가리켜 역천의 이단아라 불렀다.
"대장 마누라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네? 망옥이란 말을 하자마자 북
천지옥대랄 바로 알아차리는 걸 보면."
"그- 그게 머리하고 무슨 상관 있어요, 북황련 소속 무인들이면 모
두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일순 얼굴이 붉어진 설련이 곁눈질로 백산을 살피며 더듬거렸다.
"그런가? 그럼 뭐 그렇다고 하지 뭐. 그곳에서 내 실력은 중간 정도
였어. 나 같은 놈은 진짜 죄인이었지만 1위부터 10까지 녀석들은 죄인
이 아냐, 일부로 그곳에 들어온 자들이지."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맞아. 대장이라 그런지 말이 통하는구먼.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들
어왔어. 한마디로 괴물들이지."
"세상에……."
설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백산과 광치는 무공을 익힌다
는 말 대신에 완성이란 말을 썼다. 일정 경지를 넘어선 무인들이 아니
라면 결코 완성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일정경지를 넘어섰고, 앞을 가로막은 심마(心魔)의 벽
을 넘기 위해 망옥을 택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백산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흥미로운 듯 반짝 눈을 빛
내기까지 한다.
"지금 네 실력과 비교하면?"
"글쎄,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은 있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광치가 싱긋 웃었다. 자신 있다는 말인지 아니
면 해볼만하다는 말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모호한 미소였다.
"무모하게 덤빌까 걱정했는데 마음놓아도 되겠구나. 간단하게 생각
하면 된다. 북천지옥대라는 자들과 싸울 땐 살아남는 방법은……."
"방법은?"
실내에 있던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백산을 향했다.
"숨을 열심히 쉬어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숨을 쉬고, 배에 검이 박
혀도 숨을 내쉬어라. 숨을 열심히 쉬는 놈은 절대 죽지 않는다. 난 잠
시 수영 좀 해야겠다."
일행의 얼굴이 똥 밟은 듯 기괴하게 변하자 백산은 몸을 날렸다.
조금 전 광치가 보여주었던 그 모습으로.
"백 공자 그곳은 물이 아닙……."
화들짝 놀란 설련이 백산을 붙잡기 위해 일어섰으나 그는 이미 창문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안타까운 얼굴로 눈을 가린 설련의 행동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커다
란 소음이 일행의 귀를 때렸다.
콰앙!
"니미럴, 이곳은 물이 아니었구먼."
"형님! 대장도 괴물이네요?
커다란 바위하나를 박살내며 투덜거리는 백산을 쳐다보던 걸레가 속
삭이듯 말했다.
"임마! 내가 괜히 대장으로 삼았겠냐? 다 저런 능력을 꿰뚫어 보았
으니까 그런 거지. 안 그렇습니까, 대장 사모."
"또!"
이젠 목까지 붉게 변한 설련이 흘기듯 광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댁들이 놀랄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요. 북천지옥대가 아
니라 그보다 더한 자들이 와도 백 공자 상대는 아니랍니다. 저분이 드
디어 살 결심을 했으니까요."
머리까지 완전하게 사라진 백산의 모습을 좇으며 꿈꾸듯 중얼거렸
다.
아직 강시상태에 있는 몸은 어쩔지 몰라도, 상단전이 열린 머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에 불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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