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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새벽이 올 때까지, 바위산
그들은 지옥성을 갓 벗어난 협곡의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려는 야광충의 앞을 막아 섬으로써 우
연히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릴 알겠지?"
색명귀 하석이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가 바보로 만든 몇 사람 중의 둘이지!"
음명귀 가오륙이었다.
'그런 이유였나?'
야광충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들이 앞을 막아 선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갈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두 개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
사막의 메마른 바람에 풍화(風化)되어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
질 것처럼 부슬부슬 일어난 암벽의 통로였다.
벽호공(壁虎功)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절벽.
'죽이고 지나가야 하나?'
야광층은 그 절벽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잠시 갈
등했다.
이 밤 안에 백 리는 가야 했다.
길은 멀었고, 그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다가 해가 뜨기라도 하면 출발이
또 하루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왼손바닥에 쥐어진 인명권의 감촉을 음미하며 하석과 가
오륙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죽음과 삶이 쓰여 있는지 보기라도 하
는 둣이……!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하석이 시체처럼 푸른 얼굴을 작위적으로 찡그리며 야광충을
비웃었다.
"겁먹었나? 쥐새끼처럼 숨어 들기나 잘하는 놈이 하긴 싸울
생각이나 있겠어? 그저 도망갈 궁리나 하는 것이 고작이지!
그러나 여기서 도망갈 생각은 행여 말아라. 네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이 웃음선을 건드렸던 것인지 가오륙이 입술을 일그러뜨
려 비웃는 태를 보이며 말을 보태었다.
"애인지 늙은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지!
널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어. 총옥주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니
까 말이다. 그저 약간, 아주 약간 손을 봐줄 생각이다. 우릴 허
수아비로 만든 대가 치고는 아주 싼 것이지!"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푸른빛이 감돌았다. 심중의
분노가 용암처럼 비등(沸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왼손을 강하게 쥐었다. 인명권의 존재감이 아플 정도로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루에 둘을 죽이나 넷을 죽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총옥주의 직속수하인 금오도 죽였는데 하찮은 대수 나부랭이
라고 죽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문득 그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달라이 비스듬히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은 죽여야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야광충은 피식 웃었다.
"관두지!"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지랑이처럼, 혹은 허깨비처럼 순간적으로 희미해지더니 말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야유신 필생의 절기, 이매십보( 魅十步)였다.
십 보 이내의 공간을 순간적으로 가로지르는 보법!
가공할 정도의 속도에 보는 사람의 시선을 흔란시키는 약간의
사전동작, 그리고 사각으로 움직이는 요령이 결합되어 만들어
내는 마술(魔術)과도 같은 보법이었다.
하석과 가오륙은 일순 멍청해졌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면전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들 앞에서, 비록 절정고수는 아
니라 해도 적어도 이십여 년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강호를 굴
러온 그들 앞에서 말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야광충은 그들의 십여 보 뒤, 협곡의 입구에 아무 일 없었다
는 둣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석은 이를 갈며 몸을 날리려 했다. 가오륙이 그의 옷깃을
잡아 말렸다.
저 정도의 가공할 신법을 보인 자라면 그들이 사력을 다해 쫓
아간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 순간적으로 스쳤던 것
이다.
다행히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것이 있지 않은가?
가오륙은 소리쳤다.
"네 사형을 모른 척 할 수 있다면 그냥 가도 좋을 것이다!"
야광충은 멈주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와 가오륙의 중간쫌에 박혀 있는 바위 뒤에서 두 사람이 일
어섰다.
껑충하게 큰 키에 바짝 마른 몸매의 사내, 무상귀 파적과 그
의 손에 팔목을 꺾여 잡혀 있는 또 한 사내였다.
마흔쯤 되었을까?
하관(下觀)이 쭉 빠진 역삼각형 얼굴에 쭉 찢어진 새우눈, 코
밑에 드문드문 성기게 난 수염까지 영락없는 쥐상[鼠像]의 인물.
키 또한 작아, 섰는지 앉았는지 모를 오 척 단구(短軀)인데,
팔 척이 넘어 보이는 무상귀 파적의 옆에 서 있으니 더욱 작아
보였다.
이 인물이 바로 야유신 예충이 계승한 도둑의 문파, 귀영문
(鬼影門)의 장문제자(掌門弟子)요, 야광충의 사형인 옹중서(甕
中鼠) 주개(朱介)였다.
* * *
"도둑질하는 데에 뭐가 필요한지 아느냐?"
야광충의 스승 야유신 예충은 '투도(偸道)'니 어쩌니 도둑질
을 미화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은 사물을 가장 명확히 표현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
야 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며, 인정할 것은 액면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신념에 의거한 것이기도 했다.
도둑질에 '도(道)'자를 붙여 미화할 가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경공(輕功)입니다."
야광충과 나란히 앉아 있던 옹중서 주개가 대답했다.
"왜?"
예충이 다그쳐 물었다.
주개는 대답을 잘못했나 싶어 찔끔 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
리로 대꾸했다.
"들키면 신속하게 도주해야 하지 않젱습니까?"
예충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신속? 도주?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우셨을까? 우리 고명하신
장문제자(掌門弟子)님."
그의 말이 꼬여 나왔다.
"말쏨 낮주십시오, 사부님."
주개가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사부님이 웬일로 농담을 다 하신담. 기분이 좋으신가?'
'엎드려요, 사형.'
귓가에 울리는 야광충의 전음(傳音)을 들으며 주개는 자신의
말마따나 신속하게 엎드렸다.
탁--!
소리만 듣고도 알 수가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털을 스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물
건은 분명 붓통일 것이다.
굵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 정통으로 맞으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피를 보는 것은 면할 수 없다.
'역시 신속이 최고지……!'
주개는 내심과는 달리 엎드리며 빌었다.
"용서하십시요, 사부님."
사부가 노한 낌새를 알아채고 알아서 기는 것이다.
"주개야, 주개! 네놈 별호가 뭐냐?"
예충이 탄식하며 물었다.
"옹중서입니다."
"옹중서! 그래서 너는 독안에 든 쥐밖에 안 되는 것이다. 천
하제일 귀영문의 경공이 네놈에게 가면 신속하게 도주하는 수단
밖에 안 된다는 것이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관둬라, 관둬. 불쌍해서 제자로 삼은 내가 실수지……. 그때
맞아 죽게 뒀어야 되는 건데"
그러면서 그는 주개의 뒤통수를 노려보더니 짜증스러운 빛으
로 호통을 쳤다.
"냉큼 일어나지 못할까?"
주개가 슬그머니 스승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원래 야유신을 만나기 전부터 도둑질을 해 먹고 살던 하
오문(下五門)의 좀도둑이었다.
실력도 없고, 생김새와는 달리 약삭빠르지도 못한 그가 하루
는 야유신 예충의 장원(莊園) 담장을 넘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 격이고 강물이 용왕묘(龍王墓)
를 침범한 격이었다.
호원(護院) 무사(武士)들에게 쫓긴 그가 숨은 곳은 주방(廚
房), 옛 도척(盜 )의 고사를 생각하고 물항아리에 들어가 바가
지를 받쳐들고 있었다.
"남의 집 담장만 넘으면 다 도척인 줄 아느냐? 원칙을 적용하
는 데에도 법칙이 있고, 응용이 필요한 법이다. 도척이 성공했
다고 너도 성공할 줄 알았단 말이지?"
호원 무사들에게 끌려 나와 효에 던져진 주개에게 야유신이
한 말이었다.
명색이 도둑의 조종(祖宗)인 야유신이 무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주개를 불쌍히 여기고, 옆에 두고 심부름이나 시키며 제대로 된
도둑질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주개는 뭘 가르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기본적인 운기조식법(運氣調息法)도, 초보 권법도 제대로 배
우지 못해 야유신이 포기할 즈음이었다.
재주가 없으면 도망가는 법 하나라도 가르치고 내보내야겠다
고 가르쳐 준 경공에 주개는 놀라운 소질을 보였다.
상승경공술(上乘輕工術)은 내공의 기초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주개는 이미 스물이 넘어서 내공연마를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
에 비해 뛰어난 자질이 있어도 상승내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처
지였다.
그런 그가 일천(日賤)한 내공 수위만으로 상승경공을 구사하
는 것이었다.
다른 무공은 몰라도 귀영문의 경공은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매십보( 魅十步)와 귀영종(鬼影宗)이 그것인데, 일정 수위
에 오르면 귀신이 무색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행보를 보일 수 있
는 것이 이 이매십보와 귀영종이었다.
특히 귀영종은 서로 다른 용도의 다섯 가지 신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히 무림제일의 신법이었다.
사실 야유신은 이 두 경공과 소매치기를 하기 위해 연마한 제
맥금나술(制脈擒 術)인 조화십삼수(造化十三手) 외에는 달리
내세울 무공도 없었다.
주개는 조화십삼수는 흉내도 못 내었지만 경공에는 탁월한 조
예를 이루었던 것이다.
거기에 주개는 인성(人性) 이 좋았다.
중원에서 포쾌(捕快)들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혈로(血路)를
헤치며 이 머나먼 대막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지옥성에 합류
할 때까지 진심으로 야유신을 위해 희생하며 따른 사람은 주개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잡아먹을 둣 으르렁거려도 사실 더없이 주개를 아끼
는 야유신인데…….
"경공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혜요, 지혜보다 더 필요한 것은
뻔뻔스러움이다."
야유신은 야광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부는 밤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쳐 살그머니 나오는
치졸한 짓을 해본 적이 없다."
주개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다가 스승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려 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사부가 당년에 여양왕부(汝陽王府)에서 쿠빌라이(忽必烈)
때부터 전해 오던 묵궁(墨弓)을 들고 나을 때……."
여기까지 말하고 야유신은 탁자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한 모
금 마셨다.
제자들에게 감탄사를 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양왕부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주개가 경악하며 되물었다.
"물론이다. 사실 그 물건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
귀영문의 전통상 해본 일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생애에
서 한번은 구해서 조사동(祖師洞)에 보관하는 것이 전통이
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그런 물건에 탐을 낼 필요는
없었지."
야유신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탐스런 수염을 쓰다듬었다. 기
분이 흡족할 때 그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사실 주개와 야광층은 이 이야기를 수십 번 들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막의 오지에서 야유신이 그나마 과거의 추억을
씹는 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야유신이 가장 자부하는 여양왕부 묵궁 탈취사건이 나
올 때마다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박자를 맞춰 주는 것이다,
그런 것도 야광충보다는 주개의 역할이었다.
"나는 대낮에 여러 시종들을 거느리고 여양왕부로 갔었다. 한
족(漢族)의 부호(富豪) 행세를 하며 은자를 뿌렸더니 위사(衛
使) 놈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맞이하더구나. 교자(轎
子)에서 내려 여양왕 타반테무르(察罕特穆爾)의 이름을 부르면
서 내전(內殿)까지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
실은 그가 황궁으로 들어간 때를 노려 갔던 거지. 유유히 여양
왕의 서재에 들어가서 아흡 자[尺] 길이의 거궁[巨弓]을 감추지
도 않고 들고 나왔지. 하하하하하--!"
통쾌하다는 둣 웃는 것으로 야유신의 무용담(武勇談)은 끝이
났다.
야유신의 투도술(偸道術)은 그의 말대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도둑질도 당당하게 하면 오히려 들키지 않는다는 것.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행동과 약간의 기술을 쓰면 훔치지 못
할 물건은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방대한 지식과 두툼한 배짱이다.
이게 야유신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야유신은 천문지리(天文地理), 기관매복(機關埋伏)에
서 의술(醫術)까지 모르는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방대한 지식이 그를 혹도십웅의 하나로 만들었고, 또 이
곳 지옥성에서도 받아들여져 꽤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말한다면 주개가 귀영문의 장문제자라는 것,
즉 예충이 은퇴하면 그가 귀영문의 장문인이 된다는 것은 어울
리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귀영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터무니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충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도둑질 하는 문파이니 장문인은 도둑질로 일생을 보
낼 너 같은 녀석이면 족하다. 네 사제는 한낱 도둑으로 인생을
마칠 사람이 아니니 아쉬운 대로 너라도 장문인이 될 수밖
에……!"
귀영문의 당대 문인은 장문인인 예충을 포함하여 그들 세 사
람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
었다.
* * *
옹중서 주개!
예층, 엽장청과 함께 야광충의 단 세 명뿐인 친인 중 하나,
그리고 심정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상귀 파적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다.
주개는 야광충을 보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네, 사제! 여기서 사제를 기다리다가 그만……."
야광충은 묵묵히 주개를 바라보았다.
주개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통스럽다거나 생명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마음보다는 사제인
야광충의 행동에 제약(制約)이 되었다는 미안함을 먼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그랬다.
자기자신의 무능함을 과장되게 자각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일을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싱향이 그에게는 있
었다.
때로는 자기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조차 자
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천대를 받고 살아
온 인생이 그런 태도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야광충의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야광충의 눈에 주개의 한 손에 들려 있는 주머니가
들어왔다.
파적에게 제압닿하지 않은 한 손이 주둥이 부분을 잡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땅에 끌릴 정도로 커다란 가죽주머니.
행여 놓쳐 버릴세라 끈으로 손목을 칭칭 감아 단단히 쥐고 있
는 그 주머니!
파적은 그 손마저 제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주머니가 주개의 손을 충분히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야광충이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주개는 더욱 부끄러
운 라을 띠었다.
"무, 물과 양식…… 여행을 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먼 길을 떠나는 야광충의 행장(行裝)을 차
려 나오다가 협곡의 입구에서 야광충을 기다리고 있던 파적의
무리들에게 제압당한 것이리라!
야광충의 눈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개나 예충을 건드리고 모욕하는 행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도 강하게 그의 살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을 것이고, 살려 해도 살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야팡충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리없이 한걸음 내디뎠다. 지옥성을 나가는 입구와 반
대방향이었다.
제일 먼저 그것을 느낀 것은 가오륙이었다.
온몸을 거미줄처럼 휘어감는 압도적인 살기.
이것은 열심히 싸워서 상대를 죽이고 말겠다는 식의 살기가
아니었다.
이미 손아귀 안에 넣어 두고 손만 꽉 쥐면 터져 죽어 버릴 그
런 생명체를 보는 존재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살기였다.
구석에 몰린 새앙쥐를 보는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당장 죽
지도, 그렇다고 빠져 나갈 수도 없도록 지그시 누른 발밑의 벌레
에 대해서 발의 임자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유형(類型)의……!
아마도 그가 직업살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야광충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갖는 의미를 진정
으로 알 수 있는 자가 그 혼자만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겁이 났다.
무공의 고하(高下)는 문제가 아니었다.
싸움의 승패는 대개 싸우기도 전에 결정이 되어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엇다.
비무가 아니라 생사를 놓고 싸우는 결투--강호에서 벌어지는
싸움 대부분이 그런 것이지만--는 더욱 그렇다고 믿었다.
무공은 삼 할이요, 나머지는 경험과 기세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내공이나, 초식의 예리함과 정확성이 조금 떨어져도 어쩌다
이길 수는 잇지만 기세가 떨어지는 상대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
은 우연히라도 절대 있을 수가 없다.
지금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은발의 사내가 그런 경우였다.
그의 이십 년 청부살수 생활을 걸고 그것은 분명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이 사내에게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야광충이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오륙은 쿵--! 하는 큰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환청(幻聽)일 수도, 혹은 그의 귀가 만들어 낸 이명
(耳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겁먹은 심장이 울리
는 소리였다.
푸른 달빛에 푸르게 물든 사내의 창백한 얼굴과 그 가운데에
불타오르듯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내는 한 마리의 표범이었다.
그들은 지금 표범의 푸른 눈동자, 붉은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
밀고 있는 연약한 사슴에 불과했다.
가오륙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표범의 이빨에 씹혀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사내가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가오륙은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이질 것
이라는 압도적인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물론 자네나 자네 사형에게 별다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닐
세! 우린 그저……."
야팡충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여전했다.
"우린 그저 그렇게 철통 같은 경계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가
공할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지!"
가오륙은 지금 그의 말이 자신들의 체면도 살리면서 야광층의
분노도 잠재우는,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읍소(泣訴)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
었을 것이다.
생사(生死)의 여부에 관계없이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전율
할 만한 공포(恐怖)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총옥주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일세!
설사 같은 펀이라고 할지라도 침입한 것은 사실이고, 우린 경계
의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
니까, 어떤 벌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형편이지!"
묘한 것은 하석과 파적이었다.
총옥주에게 불려가서 일생 다시 받아 보지 못할 정로의 온갖
모욕을 듣고, 앞으로 한 달간의 특별 경계라는 징계가 결정되었
을 때, 가장 분노한 것이 그들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야광충이 자신들이 지키고 있었던 영역을
통과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륵으로부터 그 침입자가 예충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분노가 폭발할 출구를 찾은 것처럼 날뛰었던 것이 또한 그들이
었다.
그런데 막상 가오륙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
려가며 옹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을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무
참견을 않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파란 불똥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그들 세 사람의 얼
굴을 훑어보았다.
떨고 있는 것은 가오륙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석과 파적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도
역시 공포였다.
심지어는 사형인 주개까지도 그를 보면서 이빨을 소리내어 마
주치고 있는 것이다.
야광층은 인명권을 헌 왼손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그것까지
사용하면 너무 쉽게 죽여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미 늦었다!"
말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늦었다'는 말이 들릴 때 이미 야광충의 주먹은 파적의 턱뼈
를 으스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는 신속한 이동이고,
신속한 공격이었다.
쾅--!
파적은 천만 개의 바늘이 턱을 찔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려갔다.
고통으로 쩍 벌어진 입으로 핏덩이와 이빨들이 튀어나오고 있
었다.
강호인의 본능으로 주개의 완맥을 움켜쥔 손은 풀지 않았지
만, 그것이 그에게는 더욱 큰 불행이 되었다.
야광충은 한 손으로 주개를 안아 낚아채며 발끝으로 파적의
팔목을 걷어찼다. 처음 파적의 턱을 부숴 버린 일격에 뒤이은
연속동작이었다.
기습에 뒤이어진 연속공격.
파적으로서는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의 공격 자체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팟--!
섬뜩한 음향이 들려 왔다.
파적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일련의 공격들을 바라보고 있던 가
오륙과 하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발끝으로 걷어차였을 뿐인데 손목이 잘린단 말인가!
파적의 얼빠진 표정으로 보아 본인이 느낄 겨를도 없이 일어
난 일임에 분명했다.
만약의 경우,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의 경우 걷어
차는 발끝의 무지막지한 힘에 팔목이 으스러지며 끊어진 것이라
면 저렇게 순간적으로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저렇게 뒤늦게 자신의 끊겨진 팔목을 보고, 또 거기서 분수처
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보고서야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
는 일이란……!
그러나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를 풍
기며 다가오는 은발의 사내, 야광충을 막는 일이 더욱 급했다.
"어……, 어……!"
하석은 그를 향해 다가서는 야광충을 보며 주줌 물러섰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단호하게 행동을 하는 사람도 아직 본 적이 없
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반박자 늦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한 탓에, 그리고 본능보다 경
험에 의거한 동작으로 야캉충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어리
석은 행동 탓에……!
야광충은 그가 한걸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사이에 바짝 턱밑
으로 붙으며 오른쪽 주먹을 뻗어 왔던 것이다.
하석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급한 김에 무기를 잡
으려던 팔을 들어 그 주먹을 막았다.
그 다음은 야광충의 극히 단순한 동작과 하석의 본눙적인 동
작이 이어졌다.
왼쪽 주먹으로 거리를 재고, 오른쪽 주먹으로 강하게 두들기
는 단순한 동작을 야광충은 연거푸 반복했던 것이다.
쾅--!
팔목이 부러져 나갔다.
쾅--!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바로 심장으로 밀고 들어왔다.
쾅--1
턱뼈가 일그러졌다.
다행히도 미리 긴장하고 있다가 얼굴을 돌렸기 때문에 파적처
럼 이빨이 모조리 부러져 나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쾅--!
배가 뒤틀렸다.
내장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이건 권법(拳法)이 아니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그저 사람을 때린다는 가장 단순한 목
적에 충실하게 두들겨 패는 권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초식(招式)이라고 부를 만한 아무것도 그 안에는 없었다,
쾅--!
이건 그냥 맹목적인 구타였다.
야광충은 그를 구타하고 있고, 그는 지금 구타당하고 있는 것
이었다.
하석은 우선 아프고, 그 다음에는 억울해서 울었다.
강서(江西)지방을 떨어 울리던 색명귀라는 별호가 부끄러워
서, 삼십 년을 연마한 무공이 너무도 아까워서 그는 울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가오륙은 칼을 빼들고 서 있었다.
그는 야광충이 두 사람을 회생불능(回生不能)의 상태로 만드
는 것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회생불능……!
그들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팔목이 잘려도 살 수는 있고, 턱뼈가 으스러져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정신이 꺾이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몸상태가 정상으로 회복되어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
상, 폐인(廢人)에 가까운 꼴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가오륙의
판단이었다.
그는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고향에서 만 리나 떨어진 이 몽고족의 땅에서 정신마저 꺾인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할 수도 있었기 때
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말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지금 파적과 하석, 두 사람이 무참하게 꺾여 버렸지만 실상
무공으로 진 것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저 괴이(怪異)한 은발사내의 장기(長技)는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정도의 경공과 무지막지한 주먹, 그리고
발에, 아마도 가죽장화 끝에 숨겨진 모종의 무기밖에는 없었다.
빠르다고 해서 최강의 무공은 아니다.
강하다고 해서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무공에 두 사람이 변변히 저항도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평소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이기지 못
할 이유도 없고, 지더라도 저렇게 비참한 지경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무사답게 죽을 수는 있을 것이었다.
"무사는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모욕을 달게 받지는 않는다고
했소! 지금 대협(大俠)의 행위는 시원스럽게 죽이는 것이 차라
리 나아 보일 정도로 악랄하구려!"
야광충은 혼절한 하석을 잡아 일으키려다가 그 말에 멈칫 동
작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가오륙을 향해 섰다.
가오륙은 그 순간 자신을 저주했다.
은발사내의 가장 큰 장점을 순간적으로 망각했다는 것을 깨달
았던 것이다.
기세, 그리고 살기였다.
앞에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가
공할 기세와 야수의 그것처럼 적나라한 살기가 두 사람을 아이
다루듯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을 이제야 명백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반항하고, 맞서 싸우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가오륙은 얼어붙어 있었다.
야꽝충은 서두르지 않았다.
뱀의 눈빛을 마주 대한 개구리는 더 쳐다보지 않아도 움직이
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개구리는 가오륙이고 야광충은 뱀인 것이다.
얼어붙은 가오륙의 눈앞에서 야광충은 손을 들어 얼굴을 닦고
있었다.
파리해 보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귀기가 흐르는 얼굴에 꽃잎처럼 붙은 붉은 핏방울!
야광충은 장갑낀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냄새를 맡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묘하게 마음을 들끓게 했다.
장갑은 핏방울을 흡수하지 않고 연잎에 튄 빗방울이 그렇듯이
둥글게 모아 두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핏방울의 유혹!
그는 무의식적으로 붉은 혀를 내밀어 그 유혹을 맛보고자 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예양(芮陽)!"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주개는 조금 전까지의 자신없고, 그저 사제에게 미안해 하기
만 하던 그 주개가 아니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부릅떠져 있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한마디에 야광충이 일순 모든 동작을 멈추고, 푸르게 빛
나던 눈빛마저 원래의 투명함을 찾았다고 해서도 아니었다.
지금 주개는 사제를 꾸짖는 사형의 모습, 그 위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큰 키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리 작은 것처럼 보이
지도 않았다.
적어도 야광충보다는 크고 당당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야광충은 꾸중을 들은 사제(師弟)에 불과했다.
야팡충은 고개를 돌려 주개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장갑, 묵린수에 묻은 피를 읏깃에 문질러
닦았다.
"그 이름은 부르지 마세요!"
그의 나직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기에서는 주개밖
에 없었다.
예양!
야유신 예충이 자기 성(姓)을 따고, 이름으로라도 양기를 보
충하라는 의도에서 '양(陽)'자를 이름으로 붙여 주었었다.
이런 식의 이름은 흔히 지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사부의 말로는 그랬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의 이름은 주희(朱憙).
'희(憙)'는 밝다는 뚱이다.
밝다는 의미를 지닌 한자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희는 매우
밝은 느낌을 주는 글자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강론하던 서재의 이름을 회암(晦庵)이라고
지었다. 밝다는 의미의 '희(憙)'자에 반대되는 '어두울 회(晦)'
자를 써서 너무 밝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름과 자(字), 또는 이름과 호(號)의 상보적인 관계를 통해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예는 그렇게 부지기수로 많았다.
예충은 그런 의미에서 야광충의 이름을 태양을 뜻하는 '양
(陽)'으로 지은 것이다.
해를 볼 수 없는 자의 이름이 '양'이라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사부의 애정 어린 배려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양'은 이미 버린 이름, 다시는 듣기를 원하지 않았
던 이름이었다. 이미 오 년 전의 그날에…….
다시는 빛을 보리라는 마음을 갖지 않3다고 결심하던 그날
에…….
그런데 지금 주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다시 나온 것이다.
그 이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
가 있었다.
상처입은 야수처럼,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처럼 폭주하던 '살
의(殺意)를 일순간에 식혀 버린 것이다.
주개는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제가 야광충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야광충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눈빛 위로 가책(呵責)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스쳐갔다.
그는 주개가 무엇을 지적해 꾸짖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자신의 잘못임도 알고 있었다.
사형은 지금 그가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에
대한 굶주림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는 것이다.
단 한 방울이라도 피를 맛보면 다시는 그 유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경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어제 사부가 했던 말이 야광충의 뇌리에 떠올랐다.
--인간……, 나는 네가 이 인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생
각해 보기를 원한다. 목숨을 지키려면 인간을 믿으면 안 된다.
그러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모
순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는 것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사부는 굳은 얼굴로 '인간'을 강조했었다.
--모든 것이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라!
그런데 단 하루 사이에 그 말을 잊었던 것인가?
야광충은 고개를 들어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 지옥성을 벗어나고, 아침이 오기 전에
는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잘못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바위 틈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파적과 하석을 집어 들어 길 한가운데로 옮겼다.
엉망이었다.
터지고 뭉개진 그들의 몰골은 사람의 것이라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문득 주개를 보았다.
"물을 가져오셨죠?"
사막을 여행하는 행장에는 당연히 물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은 짐의 대부분이 물통이었다.
야광충은 양가죽 물통에 든 물의 대부분을 사용해 하석과 파
적의 상처 부위를 씻어 주었다.
그들의 터진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홀러 나오고 있었다.
특히 파적은 잘린 손목으로 다량의 피를 홀렸기 때문에 심각
한 상태였다.
원래 창백하던 피부색이 이제는 시체에 가까울 정도로 하얗게
변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야광충이 그들을 죽을 정도로 패지
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재빠르게 손을 놀려 그들의 요혈(要穴)들을 점혈(點
穴)해 피를 멈주게 했다. 그리고 부러진 팔다리를 맞주었다.
숙달된 의원(議員)들도 하기 힘들 정도로 신속하고 정교한 손
놀림이었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나무와 묶을 것!"
가오륙은 이런 사태의 변화를 멍하니 서서 보고만 있었기 때
문에 일순, 그 말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야광충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도 강호를 돌아다니며 이런 식의 응급처치를 적지
않게 해보았기 때문에 바위투성이 산에서도 나무와 묶을 것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상귀 파직이 휘둘러 보지도 못했던 독문병기인 무상번
(無相幡)의 깃대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색명귀 하석의 허리춤에서 색명도(索命刀)를 뽑아 깃
대를 동강내었다.
순식간에 부목(副木)으로 쓸만한 나무가 몇 개 만들어졌다.
가오륙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하석의 칼집을 허리줌에서
풀어 몇 개로 쪼개었다.
흑시 부목이 모자랄지도 몰랐던 것이다.
묶을 것은 많이 있었다.
가오륙은 옷을 훌훌 벗더니 길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합치면 수십 자[尺]는 족히 될 끈들을 순식간에 만
들어 내었다.
야광충은 그것들을 잠깐 훌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하석과 파
적을 묶기 시작했다.
"돌아가거든 무간지옥주를 찾아가라!"
하석과 파적이 온몸을 태우는 둣한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차
렸을 때, 그들은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 다음 귀에 들려온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부어오른 눈을 간신히 뜨고 말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내가 길바닥
에 누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뒤에서 비치는 달빛만으로도 밝게 빛나는 은발을 보면 그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부어오른 눈꺼풀 사이로 두려움이 흘렀다.
야광충은 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무간지옥주가 너희를 치료해 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돌아올
때쯤에는 정상에 가까운 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파적과 하석도 침묵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이 황당한 일을 이해하는 것이 더 급했
던 것이다.
야광충은 한마디를 더 던지고는 주개에게 다가갔다.
"도전을 기다리겠다!"
그들의 눈에서 야광충이 벗어나고 있었다.
도전이라……!
보복이라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도전이든 보복이든 가능한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이다.
과연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에게 그들이 보복할 수 있을 것
인가?
파적과 하석은 자신들이 당한 상태를 조금씩 이해해 갈수록
암담한 기분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주개는 야광층과 함께 협곡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는 정말 이 나이 어린 사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인 예충이 사제를 주워들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이중삼중으로 빛을 가린 상
자 속에서 끄집어내어지는 것을 보았다.
죽을 때까지 그 상자를 품에 안고 죽은 중년의 무사도, 그 얼
굴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사제와 너무도 똑같이 생긴 그 얼굴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는 그가 키웠다.
장장 십팔 년의 세월 동안 주개는 아버지처럼, 형처럼 야광층
을 키워 온 것이다.
야광충, 그때는 예양이라 불렸던 사제는 자라면서 점점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 이상한 체질이 그랬고, 학문과 무공에 있어서의 놀라운 성
취가 그랬다. 원래 둔한 옹중서는 둘째치고, 사부인 예충조차
그가 배우고 익히는 속도에 놀랄 정도였다.
이제 그는 따라가지도 못할 성취를 보이고 있는 사제, 어쩌면
사부의 능력을 뛰어넘는 조예를 익히고 있올지도 모를 그 사제
가 어쩐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게 되면, 사부는 아마 그를 보면 늘 그러
시듯이 소태 씹은 표정으로 내뱉으실 것이다.
--너나 잘해!
주개는 정말 그런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목을 움츠렸다.
'괜한 걱정이겠지!'
문득 앞서가던 야광충이 그룰 돌아보았다.
"사형!"
"음?"
"사부님을 부탁합니다."
"무슨……?"
주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야광충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일을 사형에게 설명할 방법
이 없었다.
그는 말을 돌렸다.
"제오 통로(通路)에 시체 두 구가 있을 것입니다. 흑시
문제가 생기면 제가 돌아와 처리하겠습니다."
주개는 이 의외의 소리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들이 누군데……?"
그러나 야광충은 이미 그의 눈앞에 없었다
주개는 협곡을 나가 바위산을 돌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귓가의 바람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경이 둥글게 휘어지며 그의 뒤로 달려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예상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
이 밤 안으로 바위산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생길
지도 몰랐다.
슈우욱--!
야광층은 눈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밟고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그의 검은 그림자가 달 속에 박히는 것처럼 보였다.
야광충은 두 팔을 펴서 피풍의 귀퉁이를 잡았다.
그는 바람을 타고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아래로 험준한 바위산과 헙곡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
었다.
길은 아직도 멀었다.
저주스러운 태양이 고개를 내밀기 전에 사막을, 아니면 적어
도 부드러운 땅을 찾아야 했다.
바위산에는 햇빛을 피할 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동굴을 찾느니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파고들어갈 땅
을 찾는 편이 나았다.
장장 이십여 장을 날아간 야광충의 몸이 서서히 땅으로 떨어
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칼끝처럼 날카로운 바위정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는 그렇게 쉬지 않고 두 시진을 달렸다.
창백한 얼굴에 회미하게 땀이 비치기 시작했다.
귀영종 오대신법(五大身法) 중에서 잔백유영(殘魄遊泳)은 공
기의 흐름을 최대한 이용하기 때문에 내공소모를 극도로 줄이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공소모를 줄인다고 해도 지금처럼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력으로 두 시진이나 달리고서야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막에서는 최대한 체력을 보전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지금처럼 달려서야 천하에 다시없는 내공의 소유자라도 탈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시간과 경주하고 있었다.
하늘의 달도 이미 사라지고, 밤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이 가장 어두워질 때는 새벽이 오기 전이다.
그리고 새벽이 오면 야광충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동녘이 밝아졌을 때 움직인다는 것은 야광충에게는 죽음을 의
미하는 것이다.
'동굴을 찾아야 할까?'
아직도 눈앞에는 험준한 바위산만이 보이고 있었다.
야광충은 오늘 바위산을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쉴 곳을 찾
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작은 바위 끝을 걷어차며 허공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을라갔다.
그리고 공중에 뜬 그대로 바람을 타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벼랑이 있고, 그
너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팔을 젖으며 벼랑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거기 쉴 곳이 있을 것이다.
동쪽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저 저주스런 태양을 피할 곳이 거
기에는 있을 것이다.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ㅈㄷㄳ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즐감요~^^
ㅈㄷㄱ~~~~~~~~~``````````````````
잘읽었습니다
즐감
야광시계 이불덮어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