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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0일 월요일[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1,1-19
복 음 : 마르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회칙 「찬미 받으소서」가 말하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생태 위기에 놓인 시대에 읽는
창조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읽는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제계 전승의 특징대로
하느님의 창조 활동 전반부가 규칙적인 반복에 따라 질서 있는 작업으로 드러납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는]”(창세 1,2)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혼란(카오스)을 질서(코스모스)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 돌보십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또한 섭리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을 잘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돌봄의 임무를 위임받은 인류는
그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1,11) 조화롭게 땅에 돋게 하신 “푸른 싹”(1,12)을 뒤섞어
유전자 변형이나 종자 조작 등으로 창조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고,
기후 위기는 종자 위기로, 식량 위기로, 인류 생존의 위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충실한 청지기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의 보편 성사로 교회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첫째 딸을 얻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나 딸 자랑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냐면서
웃으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정말, 딸 바보다.”
30년이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30년 전에
우리에게 보여줬던 딸 바보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그 예쁘고, 똘망똘망한 따님은 잘 계신가?”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웬수 때문에 내가 환장하겠다.”
관점이 바뀌면 인간을 보는 눈도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다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투고 나면 어떨까요?
그렇게 아름답지도 또 멋지지도 않습니다.
나의 원수로만 보입니다.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로 사랑이라는 감각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왔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옷자락 술은 예부터 유다인들이 몸에 착용한 ‘성구갑’과
건물 문설주에 붙이는 ‘메주자’와 더불어 일상에 녹아 있는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이제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자~ 이제 내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려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낮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독서는 '태초의 창조’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 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
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께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 과거에 묶여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너도나도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동네는 셈이 빠른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고,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하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아진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 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는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은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 오면 풍요롭고,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한과 북한은 3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모든 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런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연탄가스, 만원 버스, 암표 장사, 승차 거부, 재래식 화장실, 달동네’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합니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은 경제, 문화, 의료,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하면서 저도 ‘상전벽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이니 25년 전입니다.
본당에 주일학교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5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가정 방문하면서 태권도 사범 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자는 제안을 했고, 자매님은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권도는 본당 사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임진강에 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세례받았고, 부모님도 세례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국기원에 가서 승단 시험도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도 보여 주었습니다.
10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제가 떠날 무렵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2010년이니 15년 전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지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도 곤파스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당에 있던 야산의 흙이 흘러 근처 아파트의 축대 벽이 무너졌습니다.
뉴스에도 나왔고, 서울시장도 다녀갔습니다.
저는 시장님에게 야산을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태풍이 불어도 안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시장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야산을 낮추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구청장님도 기꺼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옮겼습니다.
흙은 주민들의 텃밭을 가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산은 10미터 정도 낮아졌고, 성당에는 1,000평이 넘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철쭉도 사고, 벚나무도 사고, 장미도 샀습니다.
아카시아와 잡목으로 지저분했던 야산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윷놀이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투자와 시간을 할애하신 부분은
아무래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일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여기저기 몸이 아프면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집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다 보니 만사 귀찮아집니다.
육체가 시들시들해지다 보니,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병들어갑니다.
점점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점점 소멸되어 가니,
그것을 견디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분의 하루 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창조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지난 몇 주 그러니까 연중 1주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내내 들었고,
오늘부터 또 몇 주 그러니까 연중 7주까지 우리는 창세기를 듣는데
오늘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얘기를 우주의 기원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형제들을 창조하신 얘기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나의 창조와 시작 얘기로만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구원도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창조 얘기가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서 별로 성의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무 쉽게 무성의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무 쉽게 그러니까 생기라 하면 바로 생기는
그런 구조로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2장처럼 손도 안 쓰고, 머리도 안 쓰고,
애도 안 쓰고 그저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이나 약하게 태어난 분들은
사랑도 없이 애쓰지도 않고 불량품으로 나를 만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그러셨을 리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지르신 분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의 표현은 사랑이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음을 얘기하려고 함이고,
앞에서 인용한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라고
얘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이들은 치유만 청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구원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연중 감사송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사랑 없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창조만 하고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자로이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들처럼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조건 없는 선물의 연속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마르코복음 1장에서 6장까지에 따라,
예수님 공생활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활동장소와 활동내역을 요약하여 보도록 하자.
이 요약은 어디까지나 복음적 서술 순서에 따른 장소와 활동 내용이므로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여
이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실 때(10장)까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머무르신 장소와 활동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 → 사해 북쪽 요르단 강(예수님의 세례와 광야피정 40일: 1,9-13)
→ 갈릴래아 지방(공생활 시작; 1,14-15) → 갈릴래아 북쪽 호숫가(제자소명사화; 2,16-20)
→ 가파르나움회당(설교, 구마기적; 2,21-28) → 시몬의 집(장모 및 병자 치유; 2,29-34)
→ 갈릴래아 여러 지역(전도여행 및 나병환자치유; 2,35-45)
→ 가파르나움 시몬의 집(중풍병자치유; 2,1-12)
→ 북쪽 호숫가 주변(레위소명, 단식논쟁, 안식일 법 논쟁; 2,13-28) → 주변 회당)환자치유; 3,1-6)
→ 북쪽 호숫가(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군집, 설교, 치유, 구마; 3,7-12)
→ 북쪽 호수 주변 산(12제자 선방; 3,13-19)
→ 가파르나움 시몬의 집(예수에 대한 오해, 새로운 가족; 3,20-35)
→ 북쪽 호숫가(비유설교; 4,1-34) → 북쪽 호수 가운데 선상(풍랑을 잠재운 기적; 4,35-41)
→ 호수 동편 게라사(게르게사) 지방(구마기적, 돼지 떼죽음; 5,1-20)
→ 북쪽 호숫가(하혈병 부인 치유, 화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기적; 5,21-43)
→ 나자렛(고향사람들의 푸대접; 6,1-6)
→ 호수 북쪽 마을(12제자 파견과 복귀, 세례자 요한 수난사 보도; 6,7-31)
→ 북쪽 호숫가(활동상 집약, 5,000명을 먹이신 기적; 6,32-44)
→ 호수 북쪽 베싸이다(물 위를 걸으신 기적; 6,45-52)
→ 호수 북서쪽 겐네사렛 도착(병자치유; 6,53-56)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이 많은 활동을 통하여 무엇을 얻으셨을까?
위에 열거한 여정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2제자와 다른 몇몇 제자들 외에는 크게 얻으신 것이 없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사건 다음에는 사람들의 찬사와 認定이
더러 따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예수님의 활약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현실적인 욕구와 욕망은 더 커져 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기적들을 통하여 바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표면에만 머물고,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욕심뿐이다.
한번 받으면 돌려줄 줄 모르고 계속 받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인간 본성의 욕망은 계속된다.
배를 타고 베싸이다에서 호수 북서쪽 겐네사렛(구약에서는 긴네렛으로 불림) 마을에 도착,
닻을 내리신 예수님의 일행은 또다시 본성의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예수를 ‘기적장이’로만 보는 것인가?
한눈에 예수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 근처 온 사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기적장이’가 마을에 다시 왔다고 알렸고, 온갖 병자들을 데려왔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묻거나 믿음으로 보답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니신 기적의 힘만으로 오직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 전 빵의 기적을 통하여 육신의 배고픔은 채웠고(6,35-44),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았으나(6,45-51)
그 기적의 참뜻은 군중도 제자들도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무슨 조건을 걸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