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생님
박말이 (2018.1.13.)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감동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리며 눈물이 난다. 초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이 "너는 건들지를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든 생각이 난다 어떤 책에서나 티비에서 누가 누구를 도와 주었다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흐른다 눈물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이산 가족 상봉할 때, 눈물 딱을 수건을 준비해 놓고 티비 앞에 앉곤 했었다.
옛날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감동적인 사연이 많다
나는 배운게 초등학교가 전부라 많은 선생님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졸업할 무렵 담임 선생님 앞에서 그렇게 울었든 기억이 난다.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부탁하시기를 나를 선생님 댁으로 보내 주시면 학교에 진학시켜 주겠노라고 하셨다 그 때 사모님이 세째를 갖어 배가 불러 있었든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라도 진학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학교가 있는 마을에 갔다 집으로 오는 고개만 넘으면 마음이 변한다고 하였다.
나를 남의 집에 보내는 것도 그렇고 농사일에 일손이 부족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 었다 그 때는 정말 아들이 필요했는데 나에게는 언니만 둘이 었다. 농사짓는데 열사람이라도 부족한 것이 그 때 우리집의 형편이었다. "니네 아버지는 그래가지고 자식 공부 못시킨다"시든 선생님의 그 말씀이 엊그제 일 처럼 귓가에 맴돌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 5살에 일본 취하에서 벗어나 8.15 해방이 되었고 열살에는 6,25가 일어났다.
36년 동안의 제국에서 벗어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전쟁은 모든 것을 다 부셔 버렸다. 득실거리는 거지를 따라 이와 벼룩 빈대가 득실 거렸다. 고아들 에게는 눈물 콧물 배 고픔뿐이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은 고아원에라도 가서 죽이라도 얻어 먹이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 때 그 사정을 어찌 말로 다 할까마는 열차안이나 여객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병원비 교육비를 소매치기 당하고 우는 사람도 허다 했다.
나는 종종 통영 외갓집에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여객선을 타고 두시간도 넘게 걸려 통영 부두에 내리면 승표를 받는 문지기도 무서울 뿐더러 선표없이 여객선을 타려는 사람들 때문에 문지기도 혈안이 되었다. 두 다리가 없는 상이 군인이 두 팔이 없는 상이 군인에게 업혀서 "아나? 아나 ?"를 (불구가 된 원인)외쳐댔다. 그리고 시중보다 배나 비싼 연필을 사라고 드리 댔다. 어디로 가나 다툼만 있고 질서는 없었다.
휴전이 되었지만 수시로 젊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돌아 오지 못했다.
그 때 고등학생 나이에 전쟁하고 전사하고 상이 군인이 되었으니 동네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없었다. 처녀들은 총각이 없어 늙어 간다고 입을 모았다. 양식을 구하려고 빚을 내면 고리채로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 논밭이 수 년 내로 넘어 갔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이 있으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든 것이 그 때의 정항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을 밀어 낸 것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4.19 혁명이 었다.
군사 정권이 들어 오면서 미국에서 빌려 왔다는 밀가루를 풀어 놓았다. 국민헌장의 일부분처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한 셈이다. 고리대금의 사체을 막았고 상이 용사의 분노를 막아 거리의 질서가 생겼다. 자유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체험하고도 남았다. 상이 용사와 같은 선열의 피로 이십세기의 끝자락을 잡고 이만큼이나 풍족한 세상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살기 좋은 세상이 왔다고 정서가 말라 버리고 이기주의가 도를 넘어 온정이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학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고 아이는 있어도 어른은 없다고 한다. 바랄것이 없어 이웃이 없어지고 나만 잘 살고 싶은 경쟁심리, 이런 현실을 볼 때 나는 타임머션을 타고 옛 날 어린 시절로 돌아 가 본다. 하얀 광목 바지 가랑에에 황토물 몇방울이 무뉘로 뭍혀 있든 아버지, 잠바 차림으로 글을 가르치시든 선생님의 충혈된 눈이 아련히 떠 오른다,
어떻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신통지 못한 삶 때문인지 선생님을 한 번도 뵈옵지 못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비누를 만들어 팔았다는 어머니를 따라 비누 솥에 불을 때우며 공부를 하였다는 정 연점 선생님 내가 소를 먹이면서 들에서 숙제를 하는 줄 아셨을까! 선생님의 마지막 한 마디 "니네 아버지는 그래 가지고 자식 공부 못시킨다"가 정답이 되었다. 나는 부끄럽고 안타까워 엉엉 울고 말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이 가르치신 선행의 힘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2023.11.16.
이글도 써 둔지 오래 되었습니다^^
많은 이해 바랍니다^^
첫댓글 오래전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비록 상급학교에 진학은 못하셨지만 열심히 공부하셔서 지금은 수필도 쓰시고 시도 지으시니 공부많이 하신 것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선생님 지금도 눈물 날라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결혼 생활까지
온갖 역경의 시련을 건너 오시며 수필과 시를 쓰고 계시는 박말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참으로 훌륭 하십니다
예~감사하고 고맙습니다~~너울 선생님~~^^
저도 눈물이 많은 편입니다. TV를 보다가도 눈물울 흘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끄럽기도 하답니다. ^^
담임 선생님의 제안을 아버님께서 수락하셨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모든 것이 지극히 어려웠던 시대라 그리 판단하셨나 봅니다. 참 어려운 세상을 살아 오셨습니다.
그래도 이리 훌륭한 시와 수필을 많이 쓰시니 재능이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라 믿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평안하세요.
너무 과찬이 십니다~~정암 선생님^^
이해하시는 답글 항상 고맙습니다~~^^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에 대한 오롯한 감정이 느껍습니다.
선행의 소중함과 함께 동행합니다.^^*~
고맙습니다~청송선생님~~^^
좋은 일만 생기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