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관리가 권력의 주인이다. 기업가는 권력자의 시종일 뿐이다. 관리는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지만, 기업가들이 돈을 들고 찾아온다. 중국 기업가들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관리들을 멀리하자니 돈을 벌기 어렵고, 그렇다고 가까이하자니 언제 사고가 터질지 두렵다. 최근 후룬胡润이 발표한 중국의 부자순위 리스트에 인민폐 천억원 대의 부자가 올라왔다. 따롄완따大连万达 그룹의 왕쩬린王健林 회장董事长이다. 그의 재산은 인민폐 1350억元으로 발표됐다. 나는 그를 잘 안다. 부자라서가 아니라 축구 때문이다. 왕쩬린은 원래 축구를 했던 사람이다. 과거 완따万达 축구팀은 10여년간 중국 축구의 정상을 차지했다. 후에 심판들의 매수 문제가 심각해지자, 왕회장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완따 축구팀을 팔고 축구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동산 사업에 몰두했다. 그가 떠난 뒤 10여년이 지나도 중국 축구는 여전히 혼란하고 저속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와중에서 침몰해갔다. 그러나 왕쩬린은 부동산 사업으로 중국 전역에 완따꽝창万达广场 빌딩을 세우며 중국의 신흥부자로 떠올랐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또 다른 소식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따롄에서 다보스 포럼이 열릴 때였다. 그는 뽀시라이와의 관계를 팽개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뽀시라이가 따롄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따롄의 모든 기업들이 그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따는 인맥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니다. 뽀시라이의 장래에 어떻게 되던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가 뽀시라이와의 소문을 처음으로 부정하고 반박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따롄완따와 뽀시라이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소문은 너무 많았다. 심지어 왕쩬린이 자기 입으로 “홍알따이红二代, 공산당 권력층 2세” 라고 떠들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왕쩬린은 이 소문에 심한 공포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뽀시라이 재판을 앞두고, 소문 하나가 기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쩬린은 다음의 두마디를 공개적으로 외쳤다. “亲近政府, 远离政治, 정부는 가까이, 정치는 멀리” “완따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 보면 미리 예방주사를 놓은 것 같다. 중국에서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왕쩬린은 이렇게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항상 뽀시라이와 연루될까 매우 걱정했다. 그의 걱정은 중국 정치의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려 준다. 왕쩬린은 자기가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많은 정치 단체들의 수장을 맡으면서도, 정치와는 꼭 거리를 두었다. 그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정치 인물들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했다. 왕쩬린이 끝까지 이렇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또 그처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는 알 수가 없다. 유언비어는 대단히 위험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중국 기업들은 이런 유언비어에 의존해서 생존을 유지한다. 사실 이는 중국기업인들의 독특한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예로 쉬밍徐明을 들 수 있다. 그는 왕쩬린과 마찬가지로 따롄 출신이며 부호 명단에도 올랐었다. 그러나 뽀시라이와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아주 빠르게 권력자들과 함께 침몰한 기업인으로 기록 되었다. 뽀시라이 재판에서 쉬밍徐明은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가 법정에 출석했을 때, 나는 하마터면 그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너무 마르고 비굴하고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뽀시라이를 공경하고 그에게 예의를 다하던 쉬밍이 맞는가?
쉬밍은 중국 축구계를 호령하던 시더实德 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아주 우람하고, 덩치가 크며, 태도가 당당한 고자세의 인물이었다. 중국 축구가 어두웠던 몇 년의 시절동안, 그는 중국 축구를 어둡게 만들었다. 중국 축구협회가 민간 시합을 하지 못하게 했고, 축구 클럽들을 매수했고, 흑막 뒤에서 승부의 결과를 조작했다. 그는 축구 영역에서 천사와 악마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의 신분은 신비로움에 휩싸였고, 그의 부와 재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느 축구 기자가 쉬밍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어떤 사적 자리에서 누가 쉬밍에게 질문했다. “총리님의 건강이 좋으신가요?” 쉬밍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은채 조용히 고개만 끄떡였다. 물론 어떨 때는 “아주 좋다” 라고 대답할 때도 있었다. 이게 도데체 어찌된 연유인가? 원래 쉬밍에 대해서는 그가 당시 총리의 사위라는 소문이 돌었다. 이 소문은 현재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에 그 소문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뽀시라이 사건과 함께 쉬밍의 가문도 철저하게 조사를 당했다. 내가 알기로 그의 부인은 보통의 농촌여성이었다. 그러나 총리의 사위라는 소문은 그에게 엄청난 파워를 부여했다. 한 젊은이가 어쩌면 그렇게 빠르게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하는 일마다 그렇게 뒷심이 좋을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소문의 힘이었다. 진상이 밝혀지자 우리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엄청난 재부, 그의 운명적인 출세, 이 모든 것들은 그가 보모保姆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뽀시라이 일상생활의 심부름꾼이었으며, 돈줄이었다. 특히 뽀시라이의 아들 뽀꽈꽈의 후원자였다. 법정심판 기록을 보면 뽀꽈꽈가 필요한 용돈을 쉬밍이 대준 것으로 나타났다. 뽀꽈꽈가 아프리카로 놀러가고 싶어하면 쉬밍이 비행기표를 사 주었다. 뽀꽈꽈가 학교 급우를 중국으로 데려오면 쉬밍이 그를 안내하고 대접했다. 뽀꽈꽈가 장난감을 사면 쉬밍이 돈을 지불했다. 쉬밍은 막강한 부자였지만 동시에 비열한 종복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뽀시라이에 의해 공개적으로 치욕을 당했다. 뽀시라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쉬밍은 나와 공통의 언어가 없고, 신분이 나와 다른 계층이었다” 이 말에 대해 쉬밍은 감히 부정하기는 커녕,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급변하는 흥망성쇠가 중국 기업인들의 운명이며 현재 비쳐지는 모습이다. 정부관리는 권력의 주인이며 기업가는 권력의 노예이다. 관리는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지만, 기업가들이 돈을 대준다. 기업가가 관리를 멀리하면 돈을 벌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하면 사고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기업가들의 딜레마이다. 중국의 예측 불가능한 시장환경 때문에, 명확하지 않은 법률법규 때문에, 모든 영역에 손길을 뻗치는 공산당 권력의 손길 때문에, 이렇게 깨끗하지 못한 기업인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중국의 시장환경 아래서, 왕쩬린은 용기를 가지고 “나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투명하게 부를 벌어들인 사람으로는 李彦宏、马云、张朝阳、马化腾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지 않다. 오히려 쉬밍같이 권력에 아부하는 기업가들이 대부분이다. 정경유착, 사실 이는 중국 부자들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좋은 법치환경과 제도보장이 없기 때문에, 중국 기업가들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 오로지 권력에 기댈 수밖에 없고, 그 권력을 따라 함께 부침할 수 밖에 없다. 기업과 권력의 관계는 공자의 말과 같다. “远之则怒, 近之则不逊 , 멀어지면 분노하고, 가까우면 불손하다”
이 말을 요즘 말로 쉽게 설명하면 “기업가는 일만 해야지 말을 해선 안 된다. 말을 꼭 해야만 한다면 최소한으로 적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부패와 같은 위기에 직면할 때는 용감하게 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인들은 발로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즉, 불만스럽다고 외국으로 이민, 즉 도망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岳晓东 搜狐评论 2013.9.16 - 손자병법연구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