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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2일 연중 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창세 2,4ㄴ-9.15-17
복 음 : 마르 7,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
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웰빙(well-being)’을 숭배하는 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이 낱말을 문자 그대로 푼다면 ‘잘 살기’, ‘잘 존재하기’ 정도로 이해되는데,
이는 곧 인간 존재가 모든 차원에서
건강하고 평안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육체적 건강과 미용의 차원에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오염되지 않은 물과 공기와
식품을 얻는데 수고와 지출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육신의 건강을 돌보는 만큼 영적 건강도 돌보는지요?
음식을 비롯한 외적 물질은 건강을 해칠 수 있을지라도
내적 인간을 더럽히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지나 몸 밖으로 빠져나감으로써 마음에 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배”와 “마음”(마르 7,19)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배가 아니라 마음에 머무르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나쁜 행동을 일으키는 “나쁜 생각”(7,20),
곧 다른 사람을 해체는 행동의 동기들입니다.
사실 안에 있는 것은 언제든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음식과 보이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더 신경을 쓰는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마음의 순결을 돌보는 지혜를 청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폴 마이어(Paul Meyer) 박사는 물고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어항 한가운데 유리 칸막이를 치고, 한쪽 칸에는 붕어를,
다른 칸에는 붕어를 잡아먹는 메기를 두었습니다.
메기는 붕어를 보고 달려오다가 유리에 부딪히고 또 부딪쳤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제 어항의 유리 칸막이를 뺍니다.
메기는 붕어를 보고 달려오다가 유리 칸막이가 있는 위치에 오면 싹 돌아서고 맙니다.
유리 칸막이가 없어서 마음껏 붕어를 잡아먹을 기회를 얻었지만 돌아서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실패 경험 때문에, ‘나는 안 돼. 붕어를 잡을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사고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경험으로 인해 뛰어넘지 못하는 것, 자기 한계라면서 단정 지어 버리는 것,
얕은 지식에 갇혀서 새롭게 도전하지 못하는 것 등등,
임의로 선을 긋고 선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고정관념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 경험의 틀, 즉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과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외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체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늘 외적인 것이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이고, 지금의 환경이 문제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모든 여건을 만드는 주님께도 큰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를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나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이기에 예수님 말씀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과 더욱 함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힘차고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 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 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 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선으로 제 안을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사람을 더럽히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 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 넣어 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 밝히셨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인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영화 ‘하얼빈’을 보았습니다.
영화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1주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안중근을 독립군으로 이야기하면서 안중근을 고뇌에 찬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독립운동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안중근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의 이야기는 일본군 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전투 중에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만국의 공통 법에 따라서 풀어주자고 하였습니다.
동료들은 그렇게 하면 포로들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보복할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일본군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립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직을 배반했던 동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던 동료는 모진 고문을 받고 조직을 배반한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배반으로 독립군의 작전은 노출되었고,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도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조직은 배반자를 처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변절자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였습니다.
변절자는 일본군을 죽이고 조직에 합류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똑같이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품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비를 청했던 십자가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였고, 죄인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낙원은 무엇일까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동산이 낙원일 수 있습니다.
4계절이 뚜렷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정이 넘치는 마을이 낙원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 주셨던 인간의 ‘마음’이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면
망국의 한을 품고 먼 타국에서 풍찬노숙할지라도 낙원에 있는 겁니다.
으리으리한 넓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걸 먹고, 비단옷을 입었을지라도
분노와 욕망으로 더러워진 마음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실락원(失樂園)’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영성가께서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한 마디를 건네주셨는데,
한 문장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제 마음에 꽂혀 오래도록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이웃, 특히 가까운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때로 얼마나 꼬였는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인 시선인지 깊이 반성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거나 엄격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힘든 부분이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선인 것 같습니다.
때로 나 자신이란 존재 제가 봐도 신기하고 흥미롭습니다.
제 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 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오늘도 제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볼 일입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왕이면 선한 것들, 가치있는 것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들로 가득 채워나가야겠습니다.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부패할 것들, 역한 냄새 풀풀 풍겨,
나 자신을 더럽히는 것들, 주변 사람들 괴롭힐 것들은 자꾸 비워내야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정녕 인간을 오염시키고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추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옷 좀 떨어졌다고 그 사람이 더러운 사람이겠습니까?
몸에 흙탕물이 좀 튀었다고 그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이겠습니까?
샤워한 며칠 안 한 사람을 두고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은
인간의 내면,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것, 다시 말해서 죄입니다.
그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잘 나열하신 것입니다.
당시 오류와 편협된 사고에 빠진 바리사이들은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을 사물의 외적인 상태에 두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떠하든, 그 사람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의 몸 상태가 청결한가 아닌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율법의 세칙에 따라 그가 손을 씻어야 할 때 손을 씻었는지,
발을 씻어야 할 때 발을 씻었는지,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정녕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만들어버리고 버려버리는 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스라엘뿐 아니라 중동에서는 부정한 음식 규정이 오늘날도 엄격하여
이슬람에서는 할랄 식품이 있고 이스라엘에서는 코셔 식품이 있습니다.
이 규정은 예수님 당시도 엄격했는데 오늘 복음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예수님의 입장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왜냐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음식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를 이유가 없습니다.
어제와 그제 창세기를 읽을 때 봤듯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창조하셨으며 보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하셨듯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가운데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오히려 더럽지요.
그러고 보면 ‘나, Ego’가 항상 문제이고 Egoism이 문제입니다.
이 ‘나’가 하느님이 만드시고 보시니 좋다고 하신 선들을 다 악으로 만듭니다.
이 ‘나’를 통과하고 나면 깨끗했던 것들이 더러운 것이 되어 나옵니다.
저는 뱀을 싫어하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선으로 만드신 뱀이 제게는 악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싫어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제게는 악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악이 아니고 악이 된 것이며
내가 악으로 만들어 내게 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싫고 좋음이 있는 ‘나’가 문제이고,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자기중심, Egoism이 문제입니다.
이 ‘나’가 하느님의 선들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소유한 다음에는 싫증 내어 악으로 만들고,
악으로 만든 다음에는 쓰레기 버리듯 버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버려야 할 것은 쓰레기들이 아니라
선을 악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말의
‘만들어 버린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만들어 버린다’는 만든 다음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선을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돼지가 진주를 밟아버리듯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우리는 쓰레기로 만든 다음 미워하다가 마침내 버리는 겁니다.
만들어 버리고,
버려버리는 나를
오늘 버려버립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멋지게 창조하시고 나서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 모상대로 만드신 사람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것을 '에덴동산'이라 부르는데,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곧 에덴동산일 겁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그런데,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시어 먹고 마시고 즐기라 하시지 않고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 누이인 지구"(프란치스코 교황)는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선물이고,
이 선물을 잘 일구고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입니다.
지구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유린하라는 뜻이 아니지요.
물론 그것을 일구고 돌보면서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100가지 중 99가지를 다 우리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그냥 몽땅 다 주시지 않고 한 가지를 남겨두신 까닭은,
그렇게 되면 피조물인 우리가 마치 창조자인 것처럼
행세할 오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배려라고 봐야겠지요.
따 먹는 것은 착취하는 것, 내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의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이렇게 황폐화 된 원인이 사실 바로 그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결국 지구는 멸망하고 우리 모두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이미 세상 창조의 순간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모든 사람은 이렇게 하느님의 숨이 영과 육 안으로 들어와 살게 된 존재입니다.
가장 처음에, 가장 참되고 가장 선하며 가장 아름다운 숨결이
우리 몸 밖에서 우리 코와 입을 거쳐 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 "나"가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단죄와 심판의 잣대를 사람 밖에서 찾으려 했다면,
예수님은 그 원인이 사람 안에 있음을 통찰하셨습니다.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3)
그렇다면 예수님이 거론하신 악의 정체들
-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 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수많은 성현과 신학자들이 악의 원인에 대해 고심해 왔지만,
악의 존재는 그리 간단하고 만만한 주제가 아니어서
오죽하면 '악은 신비'라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창세기 첫 장에서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고 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 태초인 한 처음에 이미 어둠이 하느님의 영과 함께 존재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이 활성화되어 사람 밖으로 표출되면
그것이 이웃과 세상을 오염시키고 상처 입히고 파괴하는 죄악이 됩니다.
"악은 선의 부재, 결핍"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도 함께 기억해 봅니다.
그러나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마르 7,15)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이나 동물, 사물, 특정 현상이나
날들의 불결하고 속됨이 인간을 불결하고 속되게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도"라는 부사를 써서 강하게 부정하시기까지 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모든 피조물은 창조 질서와 조화 안에서 모두 소중하며
저마다 고귀한 존재 이유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과 민족에게 닥치는 영육의 질병과 고통, 사고, 죽음의 탓을
더 이상 외부로 돌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서로를 구분하고 단죄하는 분열을 낳을 뿐이니까요.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마르 7,19)
마음속과 뱃속!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실재입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하나는 보이지 않고...
하나는 육의 바탕이 되고 하나는 영의 바탕이 되는 장소입니다.
요나 이야기가 언뜻 떠오릅니다.
요나 이야기에서 물고기의 '뱃속'이 요나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나의 '마음속' 생각이 그를 죽음의 위기로 내 몰았습니다.
마음속이 밝아지면 생명을 얻습니다.
이때 비로소 "영은 생명"(요한 6,63)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마음 밭을 잘 일구고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것이 사실 우리의 에덴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곧 에덴이 될 수도 있고,
잘못 가꾸고 아무렇게 굴리면 죽음의 늪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궁전'이 되기도 하고 '악령의 소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린 에덴동산이 될 수도 있고,
뱀의 유혹 앞에 탐욕과 교만 덩어리들이 판을 치며 악취를 풍기는 연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 5,22-23)
그러나 이 마음 안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도 흘러나옵니다.
우리 인간 육신은 자정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섭취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
좋은 것만 가려 에너지로 삼고, 나머지는 배설합니다.
먹은 것이 완전연소가 되지 않고 노폐물이 쌓일 때
건강의 적신호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밭에도 좋고 나쁜 것 모두가 일단 들어옵니다.
좋은 것은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에너지가 되고 나쁜 것은 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노폐물로 마음 한 켠에 남겨두게 되면 그것이 결국 우리 영혼을 병들게 만듭니다.
이건 육체에 암이 걸린 것보다 더 심각한 병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서로의 영육 간의 건강을 빌어줍시다.
영육 간에 건강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