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13일 연중 5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창세 2,18-25
복 음 : 마르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창조 이야기는 며칠 전 들은 사제계 전승의 창조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전개 방식을 보입니다.
야훼계 전승에 따른 이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 창조,
특히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먼저 여자가 창조된 동기와 그 과정을 눈여겨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알맞은 협력자는 종속된 자도 아니고 지배하는 자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
히브리 말로는 ‘말 없는 대화로도 가능한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온갖 짐승과 새들은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와 동등한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데려다주십니다.
결국 동등한 남자 사람의 뼈로 지어진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5년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대회)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온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다른 인간과 맺는 협력 관계 안에서,
곧 친교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人間의 한자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상호 관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이 되는 친교의 신비가
성삼위의 친교를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했을 때,
시속 20km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서울에서 천안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답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6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틀렸지. 100을 20으로 나누니 5시간이 정답이지.
이렇게 쉬운 것도 틀리면 어떻게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비둘기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5시간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6시간이 정답일까요?
아이의 상상력이 더한 대답이 더 정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대답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만 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과 귀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을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외면합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이 부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개로 비유하며 멸시하던 민족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대로 예수님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부인 역시 이런 무시와 냉대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부인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주님께 굳이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체면만을 생각했다면 모욕적인 수치심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해 줍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 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아이에게서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에 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차적인 사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에 두셨지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지 않으십니다(손희송).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힘과 용기를 주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은 마귀 편에 서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1) 이 이야기는, 어떤 우상 숭배자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들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일 것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들에게 줄 수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너는 지금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니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자격이 없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개들,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은총,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개들’은 떠돌아다니는 ‘들개’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강아지’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입니다.
여자를 배려하기 위해서 표현을 조금 바꾸신 것 같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는 말씀은,
여기서는 “먼저 자녀가 되어라.”로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강아지인 채로는 그 빵을 먹을 수 없다.”입니다.
즉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여자 입장에서는 예수님 말씀이 ‘거절’로 들릴 수도 있었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은,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아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여자를 변화시키기 위한 충격 요법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와서 변화되었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간청한 은총도 주셨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주셨습니다.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된 일은, 여자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인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낸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3) ‘우상 숭배’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19ㄴ-21)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우상숭배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마귀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마귀들을 따라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소원을 빌고, 앞일을 물어보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미신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일들에 대해서,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인 통계다. 학문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 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변화는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좋은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려 합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자라도록 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지속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다’가 ‘할 수 있다’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성장하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희망이 지속될 때, 그것이 점점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며,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는 믿음과 희망이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거절당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간청했고,
결국 믿음이 드러나면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희망이 결국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행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처음에는 단순히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준비하며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작은 도서관을 확장시킵니다.
도서관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도소장은 이를 허락하게 되고, 죄수들에게 지식을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앤디는 또한 한 죄수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도와줌으로써,
희망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의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여
전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주며,
감옥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순간을 선물합니다.
앤디는 말합니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밝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또한 처음에는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작은 희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을 보며 돕고 싶었고,
이 작은 희망이 그녀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라는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사람에게 밖에 사랑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녀의 봉사는 전 세계로 확산하였습니다.
그녀의 희망이 믿음으로 변화되었고, 그 믿음은
결국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명에 동참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작은 희망이 어떻게 믿음이 되고,
믿음이 결국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릴 적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하였고,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극복을 넘어서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인권운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토 13,13)
베드로 사도는 희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본 다른 사도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바라시며,
그 이유는 믿음을 성장시켜 결국 세상을 더 밝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사랑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여러분은 체면을 중하게 여기는 분이신가요? 자존심이 센 편인가요?
여러분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을 청해 본 적이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얄팍한 자존심이 있어 그걸 상하는 것을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하지요.
내가 무시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저는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언제 가장 힘드신지요?
그런데 오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개같은 년(?)"이란 소리를 듣는 수모를,
그것도 만인이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듣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보다는 딸에 대한 사랑을 택한 한 어머니의 믿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아, 아직 난 멀었구나!
얄팍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용을 쓰기보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비천하고 낮은 자가 되지 않고선
그분의 자비와 충만한 은총을 기대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대접받지 못해 아파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은 자 됨으로써 더 사랑하는 오늘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벗님은 오늘 누구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낮은 자 되는 희생을 바치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이해가 백성들에게 올바로 형성되기까지
섣부르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게 된 것을 보면
이미 예수님은 숨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셨던 겁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마르 7,24)
그렇습니다.
빛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덕행도 아무리 감추어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의 성덕은 감출수록 더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이방 여인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종종 후대의 우리에게 감정적인 논란거리를 주지만,
중요한 건 여인이 간절한 청원과 용기, 겸손으로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는 사실이지요.
예수님의 여러 기적 사화들에서 보듯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이가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격려해 주시지요.
이 자리에서는 이방 여인에게 그의 말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해 주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마르 7,29)
우리가 창조 설화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발설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또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이루고야 만다."(이사 55,11)고 하셨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을 때
이 힘도 얼마간 나누어 받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창세 2,19)고 하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온갖 짐승을 사람에게 데려가 이름을 지어주게 하시는데,
그가 각 생명체에게 말 한 내용, 곧 이름이 그의 정체성이 됩니다.
이 명명 작업의 위임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받은 말의 능력을 믿어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하시며,
여인의 진정 어린 고백에 어떤 토도 달지 않고
함께 원하고 동의하신다는 존중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태초에 인간이 나누어 받은 말씀의 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지요.
비록 완전할 수는 없어도,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고백하고 청할 때,
그 말은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이를 허락하신 분께서 함께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청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이렇게 되새겼습니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야고 1,21) 아멘. 알렐루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