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병종 혼합군과 내선 작전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군사혁신을 단행하였습니다.그 이론적 기반은 4명의 프랑스 장교들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부르세,기베르,그리보발,듀테일이었습니다. 부르세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횡대대형에서 벗어나 여러개의 종대대형에 의한 분진합격을 주장하였고, 기베르는 각 병종의 혼합에 의한 독자적 작전이 가능한 사단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기베르는 보급의 간소화에 따른 기동력 증대를 꾀했습니다. 그리보발과 듀테일은 대포의 경량화를 통한 기동성 증대와 포격의 집중운용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사혁신과 더불어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군이 등장하였습니다. 국민군은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시도된 바 있으나 이들 국가는 당시 총인구가 100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국이라 대다수 병력을 여전히 용병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는 인구가 2700만에 달했으며 이는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가는 인구였습니다. 1794년에 프랑스는 75만의 무장병력을 보유하였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어느 국가의 군대보다도 방대한 규모였습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실제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 인물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습니다.
1. 병종 혼합군과 진형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 군대는 횡대대형이 기본이었습니다. 이는 머스킷의 화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고 전투 의욕이 떨어지는 병사들의 전장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산개대형, 횡대대형, 종대대형을 혼합해서 편성합니다. 횡 240열, 종 3열을 기본으로 1개 대대를 만든 다음, 3개 대대를 기본으로 해서 1개 대대는 횡대, 2개 대대는 종대로 편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대에서 120명씩을 뽑아 산병 또는 전초병으로 운용합니다. 이들은 산개대형으로 포진하여 적군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보병이외에도 포병과 기병을 같이 편성하여 독자 작전이 가능한 병종 혼합군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대식 사단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종 혼합군을 가지고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2. 산병의 교란작전과 횡대의 전진압박
먼저 산병이 산개대형을 펼쳐 적군을 교란합니다. 다음으로 1개 대대의 횡대가 전진하여 일제사격을 통해 적군을 압박합니다. 이를 통해 적군이 어느 한 지점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고, 후방 예비대를 전면에 투입하도록 만듭니다. 이는 소련 종심전투교리에서 나타나는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측면 우회기동을 통한 적 전선 균열 야기
나폴레옹은 미리 기병을 중심으로 한 병력을 적 측면에서 우회 기동하여 적의 병참선과 후퇴로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되면 적군은 정면에 포진한 병력중 일부를 빼내어 병참선과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이동시키게 되고 횡대로 늘어선 적 전선의 균열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4. 포병의 집중운용을 통한 균열 확대
적 병력중 일부를 후방으로 빼내게 되면 정면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 틈을 향해 후방에 있는 포병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합니다. 나폴레옹은 포병을 보병과 분리시켜, 포병이 단순히 보병의 지원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선의 돌파를 위한 균열을 만드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포병에 대해 보병의 총검돌격처럼 집중적으로 밀집하여 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 밀집종대의 연속 투입을 통한 전선 돌파
포병의 집중 포격을 통해 적 전선의 균열이 확대되면 그 틈을 향해 2개의 밀집 종대 대대가 연속적으로 투입됩니다. 이때는 총검을 착검하고 돌격하는 방식으로 투입되었는데 당시 머스킷 소총의 연속 발사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서 근거리에서의 총검돌격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제대를 투입하고 이어서 2제대를 곧바로 투입함으로써 적군이 1제대를 막아내더라도 2제대에 의해 붕괴되도록 만들었습니다.
6. 기병의 전과확대
그 다음으로 기병이 투입되어 무너진 적전선으로 들어가 혼전에 빠진 적군을 공격함으로써 전과확대를 도모합니다. 이렇게 되면 적 전선은 구멍이 뚫린 둑처럼 대열이 붕괴되게 되고 미리 측면으로 우회기동한 병력과 함께 적군을 포위섬멸하게 됩니다.
7. 보급의 현지조달과 기동성 확대
18세기의 유럽군대는 병력의 1/3 가량은 보급과 수송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보병들도 많은 보급물자를 가지고 행군하였고 전장에서는 창고를 건설하여 물자를 저장했기 때문에 기동성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을 현지조달을 통해 해결하고 대신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보급의 간소화와 현지조달을 통해 다른 유럽 군대가 1분에 70보의 속도로 이동하는 데 비해 나폴레옹 군대는 1분에 120보의 속도로 이동했습니다. 차량과 철도가 없었던 당시에 이는 상당한 기동성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에서는 나폴레옹이 군인의 무기 뿐 아니라 군인의 다리를 가지고 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기동성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급의 현지조달은 서유럽에서는 가능했으나 러시아 원정에서는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는 대부분이 빈촌이라 현지조달이 어려웠고 알렉산드르 1세는 모스크바를 불태울 정도로 철저한 초토 작전을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 전장은 너무 넓어서 단기간의 기동성 확보로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60만의 원정군 중 75%에 달하는 45만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추위로 사망하는 대실패를 겪게 됩니다.
8. 내선작전과 각개격파
향상된 기동성은 내선작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페인 등 다른 모든 유럽 강대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곳에 분산된 적들이 결집하기 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분산된 적군을 연결하는 지점인 내선에서 출발하여 우세한 기동성을 통해 한곳의 적을 신속하게 격파한 다음 다른 적을 격파하는 각개격파의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부관이 한번은 나폴레옹에게 '폐하는 항상 소수를 가지고 다수에게 승리하였습니다'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항상 다수를 가지고 소수에게 승리하였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동맹하는 적 세력 전체에 대해서는 소수의 병력이었지만 신속한 기동을 통한 내선작전에 의해 실제 전투를 벌이는 1곳의 적에 대해서는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개격파가 실패하였을 시는 워털루 전투와 같이 우세한 규모의 적에게 오히려 포위공격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9. 소련 종심전투교리와의 비교
나폴레옹의 전술을 살펴보면 1920년대 이후 등장한 소련 종심전투교리와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산병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소련의 전방분견대의 역할과 비교되고, 횡대의 전진압박은 소련군의 광정면 동시접촉과 비슷한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포병의 집중운용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게 포병은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집중운용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또한 종대의 연속적 투입과 기병(기갑부대)를 통한 전과확대, 보급의 간소화를 통한 기동성 증대도 그러합니다.
두개의 전술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이러한 유사점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어떻게 적전선을 돌파하여 단기간에 승리를 쟁취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들자면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위섬멸전을 목표로 하였으나 소련 종심전투는 적 신경망의 마비를 목표로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폴에옹의 전술은 당시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말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진형은 이전의 횡대 대형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숙련된 병사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프랑스 청년층의 20%가 전사하여 염전의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에 한 원인이 있습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청년층의 25%가 전사한 것과 근접하는 규모입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혁명 당시의 용기와 의욕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감한 종대돌격을 꺼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financier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근대사 게시판이 활성화 된걸 보고 기뻐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올려주시길 2005-09-17 22:46:03
financier
조은성 프랑스군 연대의 대대 편성은 4개가 아니었던가요? 영국, 프러이센은 3개 대대였지만요... 그리고 사실 각 병과의 혼합편성이라고 하지만 사단의 포병화력은 좀 부족한 규모였고... 그래서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지원포병의 비중이 더 컸죠. 2005-09-18 00:11:15
211.194.171.2
수원삼성f.c.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에 관심이 많아서 나폴레옹 관련 글이 많았으면..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 2005-09-18 10:54:29
219.89.234.123
수원삼성f.c. 그리고 나폴레옹의 전술에 관해선.. 역시 그도 포위섬멸을 제1원칙으로 삼았다고 봅니다. 고대에서처럼 포위라는게 뭐 꼭 양측면이나 후방을 잡아 둘러싼다는 의미라기보단, 주력을 무력화시키고 나머지를 잡는다는 의미죠. 거기에 대포가 절대적인 역활을 한것이고.. 2005-09-18 10:57:24
219.89.234.123
수원삼성f.c. 뭐 전쟁영웅하면 여러명이 나오지만 역시 나폴레옹이 일인자라는건 거의 확실한것같네요. 특히 그중에선 포병, 기병등을 정말 제대로 활용했다는점이나.. 위에 본문에서처럼 진형이라던가 군사개혁을 했다는 점에 점수를 많이 줄수 있을듯합니다. 2005-09-18 11:00:53
219.89.234.123
최영일 역시 전쟁의 천재하면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를 들수 있는데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내전때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청년 포병장교인(대위) 나폴레옹은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악천후하에서 포병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적의 후방에 병참지원 항구를 측면에서 2005-09-18 12:24:17
61.84.157.121
최영일 기습 포격을 개시하여 보급을 위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 지원함들을 타격함으로서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손쉽게 반란군 병참지원용 항구를 점령하므로서 조기에 반란군을 진압한 공로로 일약 포병대위에서 소장으로 특진하게 됩니다. 2005-09-18 12:27:15
61.84.157.121
최영일 예나 지금이나 병참지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넓은 부동의 해안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면 프랑스는 강력한 해군력을 동원해서 효과적인 병참지원을 해서 러시아의 초토화작전도 극복해 냈을 것입니다. 2005-09-18 12: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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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omte 나폴레옹이 후에 독자적인 기병사단과 군단을 조직해서 후에 독일군 기갑사단과 같은 역할을 수행(예나전투 당시 뮈라기병군단의 프로이센군 대추격섬멸작전)했다는데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이 혹 나폴레옹의 기병사단에서 힌트를 얻은게 아닐까요. 2005-09-23 14:31:36
203.248.67.13
deComte 나폴레옹의 전술이 19세기이후 독일군사상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걸로 아는데요. 2005-09-23 14:31:49
203.248.67.13
조은성 나폴레옹 시대로 인해 독일이 만든 것은 이른바 임무형 전술체계라는 거죠. 모든 예하부대의 진로와 공격패턴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별로 목표를 할당하고 각 개별 부대장에게 전술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방식이죠. 2005-09-24 15:46:41
219.249.57.102
조은성 장점이라면 사령관이 모든 부대의 사소한 행동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지휘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단점은 각 부대장이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할 경우 전투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거죠. 나폴레옹의 부대운영도 꼭 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방식입니다. 2005-09-24 15:52:27
219.249.57.102
최영일 이차대전시 독일군이 전투에서는 초반에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에서는 폐한 원인이 당시 독일군 지휘부는 지나치게 기능적인(전술적)면만 훈련되었기 때문에 정치,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결국 전세계를 정복 지배하기에는 사상적으로 역량이 부족해서 2005-09-25 22:37:19
choi1983
최영일 독일 고위 지휘관들의 전략적인 실수를 범했고 소련에 폐하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용감한 군대보다는 정치와 역사 사상철학을 가진 고급 지휘관들이 독일군에는 부족했다는말이죠. 소련군에 비해서,,, 2005-09-25 22:41:02
choi1983
조은성 소련도 전쟁전에 장교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있었으니 피장파장이고, 오히려 히틀러나 괴링같은 최상층 지도부의 무분별한 간섭이 지휘체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죠. 지도나 들여다 보며 만들어내는 그들의 탁상공론이 일선 지휘관들의 최대의 적이죠. 2005-09-26 00:33:02
211.194.171.2
최영일 히틀러 그도 역시 대학을 못나온 하사관 출신으로 목소리만 큰 선동정치가일뿐 전략가는 못됩니다. 그는 대학을 못나온 열등감 때문에 휘하 고급 군 지휘관들한테 대학에서 포크와 나이프 쓰는법(귀족예절)만 주로 쓸데없는 하찮은것들만 배웠다고 비아냥거리죠. 2005-09-26 11:09:39
choi1983
최영일 그의 최대의 전략적 실수는 미국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는것입니다. \"미국은 트랙터나 면도날이나 만들줄 알지 대포나 탱크 따위는 만들수 없다.\" 고 말했죠. 히틀러의 선동적이고 즉흥적인 그의 체계적인 지식의 결여에서 나온 실책입니다. 2005-09-26 11:13:22
choi1983
조은성 또 한가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했다는 거죠. 둘다 초기에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해 죽을때까지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한 것이나, 나폴레옹이 뜻하지 않던 스페인 문제에 개입한것처럼 히틀러도 이탈리아가 저지른 발칸, 북아프리카 문제에 휘말려버리죠. 2005-09-26 22:10:29
211.194.171.131
조은성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그토록 애타게 그루쉬를 찾았던 것처럼, 히틀러도 최후의 순간에 껍데기만 남아 서류상으로만 존재한 부대들이 베를린과 자신을 구할거라며 무전으로 불러댔다죠... 2005-09-26 22:14:54
211.194.171.131
최영일 그게 아마 슈타이너의 제9군과 벤크의 12군이었죠 10배나 되는 소련군이 북동쪽에서 밀고 내려오자 제9군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제 12군이 제9군을 지원해서 강력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어서 소련군을 베를린으로부터 격퇴시킨다고 했죠. 2005-09-27 02:16:16
choi1983
최영일 하지만 제9군은 이미 와해 됬고. 벤크의 12군은 소련군의 포위공격을 뚫기 위해서 엘베강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지하벙커에서 지도만보고 부대를 이리,저리 옮기라고 하죠. 2005-09-27 02:19:49
choi1983
island78 나폴레옹이 군단장급 장군들을 잘 활용한 것은 맞는데.. 후반기에 가면 갈 수록 군단장과 군대의 자질이 떨여져서 점점 나폴레옹의 천재성에 의지하게 되죠.. 그리고 나폴레옹이 승리한 많은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기동에 힘입은 바가 크지 나폴레옹이 휘하 2005-09-29 19:49:44
210.114.173.60
island78 군단장들에게 많은 재량을 부여해주고 그 재능을 잘살려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이것도 가면 갈수록 나폴레옹의 천재성에 의존하게 된다죠..--;) 독일이 최초로 참모제도를 도입하고 임무형 전술을 도입한 것은 나폴레옹에게 핏값을 치루면서 최적화 된 것이지 2005-09-29 19:50:39
210.114.173.60
island78 나폴레옹의 임무형 전술체계를 도입한 것은 아니죠..(현실적으로 군단장을 통제할 방법이 없으니 재량을 준거지 나폴레옹이 그들을 신뢰하고 능력을 활용한 차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이전에 임무형 전수체계와 가장 유사한 것은 몽골군이죠.. 2005-09-29 19:52:21
210.114.173.60
island78 그리고 독일 지도자들은(히틀러 포함) 미국의 공업능력을 알고 있었고 두려워했었습니다.(막상 미제 전차는 뷁스런 물건들 뿐이었지만..) 그리고 독일의 패배는 영-미-소의 공업능력에 밀린 거지 전술에 치중해서 전략적 관점과 식견이 부족해 패한 것은 아니죠 2005-09-29 19:58:24
island78
island78 물론 BOB나 독소전의 동기는 적에 대한 방심입니다만.. 당시로는 위성이 없었죠.. 2005-09-29 19:58:55
island78
manssutt 비교적 나폴레옹 전략전술을 잘 소개하셨는데...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기동성도 중시했지만 전장에서의 승리를 위해 가장 중요시했던 요소는 바로 장병들의 사기 였습니다.그래서 그는 장병들과 같이자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부상을 당해 목발을 짚고가는 사병에게 자기가 타고가던 백마를 내준일화는 유명하지요. 물론 러시아에서의 패주로에서는 다른모습을 보여서 실망감을 안겨줬지만.. 그리고 러시아 원정군은 60만이 아니라 정확히는 46만 7천명이죠. 그리고 살아남아 프랑스 땅에 무사히 돌아온 병력은 불과 9000명에 불과했죠 2006-04-07 12:56:45
211.226.72.65
manssutt 그리고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추위와 기동성과 보급의 문제라기보단 용인술과 전략상의 결정적인 오류때문입니다. 말년의 나폴레옹은 지병(위암,신경성 노이로제 등)때문에 기력과 총기가 예전만 못했죠. 그래서 러시아 원정군 각군 사령관에 전장에서의 지휘경험이 거의 없었던 의붓아들 유젠과 제롬등에게 맡김으로써 (풍부한 경험으로 무장한 다브 맛세나와 같은 역전의 명장들을 배제하는 치명적 우를 범함)전략적 후퇴를하던 쿠투조프의 러시아군 주력을 따라잡아 격멸할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를 안 나폴레옹이 땅을치며 후회하며 유젠과 제롬을 질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만약에 유젠과 제롬이 보급을 확보하고 군사들을 쉬게한다는 명분으로 3일동안을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전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겁니다. 2006-04-07 13:08:54
211.226.72.65
18C 프랑스군제개혁(2)- 전술과 군시스템의 개선
야전군의 편성이 4~5만명을 넘을 경우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18세기
중엽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군대에 관해 앓고있는 문제임이 분명해졌다.
대포나 머스킷총의 경우 끊임없는 개량과 개선책이 나왔지만 지휘관 한사람이 지휘
하기에 적절한 병력의 규모는 무기의 그것과는 달리 늘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소축척지도의 사용
지평선 너머 먼지를 일으키면 질주하는 군마를 지휘관의 의도대로 상황에 맟춰 배치
정렬하는 일은 군사령관의 고충을 여실히 나타냈다. 프랑스의 참모부는 1750년경에
실질적이고 정확한 소축적지도를 사용하고 여기에 따라 행군과 병참원을 확보할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전유럽을 대상으로한 지도의 제작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특히 경사를 이요한 등고선의 사용은 지도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발명이었다. 등고선
의 발견후 늪지대나 들판을 가로질러 행군할때의 장애물을 표시하는 기호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777년 프랑스의 공병중위 뮈네의 제안에 의해 사용된 등고선은 소축적지
도가 범용성을 띄게한 결정적 인자였다.
부르세의 노력
프랑스의 장군 부르세는 1775년 <산악전의 원리>란 책을 프랑스군 내부회랑용으로
발간하여 북이탈리아나 영국침공에 있어서 지휘관이 지도를 사용해 군사행동의 세
부사항을 작성해야함을 설명했다.
지도의 사용은 대규모 병력의 통제를 의미했고.. 이에 위해 지도읽기와 병참술에
숙달된 참모부의 발전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부르세는 이를 알아차려서 1765년에
부관에게 필요한것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고 중도에 폐교와 개교를 거듭한 이
학교는 7년전쟁후에서 프랑스혁명전까지의 프랑스군의 체질개선을 위한 전술원칙
을 논의하게 된다.
지도와 참모부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대규모병력의 통솔을 의미하게 되었지만 기존
의 도로와 보급선은 수만단위의 병력을 위해 원활한 병참지원을 하기에 기능적으로
한계가 여실히 드러낸다. 이 문제를 해결키위해 군대는 사단제도를 도입해 효율적인
병력구성과 통제를 꾀하기에 이른다. 사단은 보병 기병 포병의 세병과와 공병 위생
통신전문가능의 지원요원들로 구성되며 적절한 참모부에 의해 통합적으로 조직되고
단일한 지휘관에 복종하는 전투단위로 이뤄졌다. 최대 단위는 12000명으로 설정하고
각 사단은 자체완결적이며 독립적인 전투단위를 이룰수 있고 상위의 사령부에 따라
다른 독립적인 사단과 연계해 효율적인 전투를 치룰수 있게된다.
프랑스의 사단제도는 최초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첫 선을 보였고
육군당국은 1788년경에 정규군의 항구적인 편제로 승인했고 전장에서 사단조직이 표
준화된것은 1796년 혁명전쟁기간중이었다.
새로운 전술대형의 도입
일찍이 루이14세시절 유럽의 군사적 리더를 자처한 프랑스군은 한세기뒤에 이르러
로스바흐와 민덴에서 좌절을 맛본뒤 그 우위를 영구히 상실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휩싸였다. 이런 불안감은 잃어버린 우위를 되찾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의
식을 광범위하게 퍼트렸다. 따라서 군내부의 각파벌은 현재의 시스템이 아닌 미래
를 위한 기술개혁을 슬로건으로 해서 서로의 대립을 통한 군의 발전에 진력하게
된다.
신병모집은 지휘관의 손에서 벗어나 국왕의 징병관이 정해진 복무기간에 따른 봉급
과 보급품을 주기로하고 병사들을 모집했다. 장교의 매관직은 서서히 사라지고
승진에 관한 규정이 공개되고 통일되었다.. 모든 연대는 동일한 편성표에 따라 개
조되고앞에서 보았듯이 군전체가 사단체제로 재조직되었다. 다만 이러한 관료제가
완전히 도입된것은 아니고 이에대한 반발도 구체제가 붕괴하기전까지 미비하게 남
아 있었다.
각파벌의 주도권싸움에 이용된 전술체제는 1778년 기동연습테스트로 각파의 정당성
을 입증하게 된다. 최초 테스트결과에 대한 각 파벌의 반응은 사뭇 서로 달랐지만
점차 통일되게 되었고 이로써 1791년 프랑스육군은 기존의 것을 보완한 새로운 전
술지침서를 발행할수 있게 되었다. 이 지침서는 프랑스혁명중 줄곧 표준으로 이용
되었고 지침서의 새로운 규칙은 현장의 상황에 따라 지휘관이 임의로 횡대 종대 산
병의 전술대형을 선택할수 있게 되었다. 반면 적대적인 구 유럽군은 프리드리히의
횡대를 고집하게 된다(횡대는 개활지에서 지휘관에게 최대한의 화력을 보장해준다
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대형은 적국의 군대보다 신속한 이동과 상황에 따
른 임기응변을 발휘할수 있게 하였고 기복이 심하거나 험한 지형에서도 효과적인
작전을 펼칠수 있게 도와줬다.
횡대전술은 장애물이 없는 개활지가 필수적이었지만.. 1778년의 기동테스트는 개활
지와 산울타리가 접목된 노르망디에서 실시되었기에 실제적인 면을 중요시한 프랑
스육군은 지형에 따른 전술대형의 변화가 필요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반면 동유럽
의 개활지에 있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이런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구체제의
횡대를 유지하게 된다.
산병전술은 최초 오스트리아군에서 명성을 얻게된다. 남동부에서 호전적인 이슬람
광신도(오스만제국)에 맞서 산병전술을 구사한 크로아티아 민병대의 가능성을 알
아보고 자신의 정규군에 편입한 사람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이들은 정규군
에 앞서 적의 후방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적의 보급부대를 습격했으며 곳곳에서 저
격해 적진의 배치를 방해했다. 곧 다른나라도 이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경보병
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추신: 다음엔 기술적 개발.. 음 그리보발과 대포주조의 개선(르크뢰조-앵드레계획)
등을 연재해야는데.. 개인적으로 대포에 관해서는 이해력이 떨어져서.. 문제중년님
의 총이야기에서 대포를 다뤘는지 모르겠네요.. 아시는 분은 리플좀 달아주시기를.
조은성 프랑스가 사단편제를 도입은 했지만, 평시에도 존재한 것은 아니고 전시에만 운용했었죠. 즉, 보,전,포 각병과가 연대체제로 존재하다가 전시에 이들을 합쳐서 사단편제를 이루는 것인데, 1870년의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그런 형편이었죠. 사실 영국이나 미국같은 다른 나라들도 전시에만 사단이나 여단 편성을 했는데, 프로이센이 평시에도 사단제도를 존속시킨 것이 더 의미가 있었죠. 즉, 사단편제의 운용에 관한 것은 프로이센 쪽이 더 후한 점수를 받아야 할 듯 합니다. 2005-11-26 05:20:11
211.194.171.2
조은성 쓰다보니 잘못 썼는데 당시라면 보,전,포가 아니라 기,보,포 라고 해야겠죠. 2005-11-26 05:55:17
211.194.171.2
kkj1942 우와 좋은글 잘 보고있습니다^^ 2005-11-26 08:10:58
58.142.121.91
수원삼성f.c. 잘 읽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나폴레옹의 군제개혁에 대해서도 좀 자세히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05-11-26 08:37:46
222.153.152.204
이두선 나폴레옹의 군제개혁이라면 이미 밑에 김근진님이 올리시지 않으셨나요-_-? 2005-11-26 14:08:18
211.30.186.93
삭스원수 7년전쟁이후 나타난 프랑스의 군제개혁이라면 크게 사단체제, 전술종대, 분진합격에 따른 병력의 분산및 집중, 현지급양및휴대전투식량에의한 병참제도의 개선, 대포의 규격화및 표준화 이에따른 포병전술교리의 확립, 사관학교의 창설등등 많지요. 국민군이나 총력전도 빠질 수 없지만 이것은 유럽각국의 군대와 대치된 상태에서의 정치적인 상황변화때문에 일어난것이지 순수 프랑스군의 개혁에의한 결과물은 아니므로 패스.. 2005-11-26 23:42:49
203.170.98.3
프랑스의 군제개혁(3)- 기술적 진보의 성과와 한계
프랑스의 군사적 혁신의 또다른 수혜자는 포병이었다. 일찍이 잠재적 포병의 가치를
깨닫고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케 한것은 7년전쟁당시의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
육군당국은 프로이센에 대항하기위해 기존의 야포보다 기동성이 좋고 조준이 정확한
포병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합스부르크가의 개선된 포병은 7년전쟁에서 프로
이센군에게 호된맛을 주었다. 물론 이런 합스부르크가의 군사적 선전은 전쟁에 필요
한 경비와 인적자원을 갖고있는 헝가리의회를 설득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헝가
리의회에 출석할 당시 마리아테레지아는 임신중이었다고 함.)과 대제 프리드리히에
게 오스트리아장성의 저력을 보여준 명장 라우돈의 역할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럼
에도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통해 염원하던 슐렌지엔의 재탈환이란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으나 이전쟁을 통해 포병의 기술적 구조적인 난관에 맞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
할려고 했던 혁신적인 장교들은 7년전쟁의 교훈을 적절히 받아들일수 있었다.
1763~1789년의 프랑스포병의 개선과 괄목상대한 발전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 모든 개
혁을 주도했고 당대 기술가들의 영감을 받아들여 적극 사용한 장 바타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의 경력을 훝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752년 프로이센 포병의 전술을 배
우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1756년에는 오스트리군으로 옮겨 7년전쟁동안 혁혁한 전공
을 세웠다. 공성포를 이용해 슐레지엔의 요새도시를 함락하거나 또다른 요새도시를
장시간동안 프로이센군에 맞서 성공적으로 방어함을써 자신의 군경력을 화려하게 장
식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군 포병의 기술적 진보를 깨달았고 이를 통해
<길드적 잔재>가 남아있던 자국의 포병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전장의 주역으로 만
들수 있음을 확신했다.
참조1> 외교혁명: 발루와왕조시절부터 계속되온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전쟁과 대립
은 마리아테레지아와 루이15세의 치세하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된다. 일찍이 합스
부르크가의 능멸을 소원으로 기독교국가에서 범죄행위와 같았던 오스만과의 불신동
맹을 체결한바 있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성립은 외교혁명이란 수사로 불리게
되며 그만큼 파장이 컸다. 프랑스의 퐁파두르후작부인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카우니
츠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동맹은 루이15세의 후계자에게 오스트리아 왕녀가 출가하
는것(마리 앙투와네트)으로 확인됐으나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영국동맹에게 패배하
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보발의 경력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넘나든것은 위에 언급한 외교혁명의 부산물이라 보는것이 옳다.
18C 중엽의 포병의 위치
발사무기의 포환의 중량에 따른 규격화는 이미 카를5세 시대에 모든 국가에서 시행
되었다. 그러나 거푸집에 의한 대포의 주조방식은 완전한 표준화를 이루기엔 기술적
장애를 극복할수 없었다. 대포하나 하나에 별도의 거푸집으로 주조되는 공법이 계속
되는한 거푸집에 의해 형상이 결정되는 약실 포강과 포신의 외형이 정확하게 평형
을 이루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포신 내경의 치수가 조금씩 다른것은 전형적
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이런 방식의 제조공법으로 만들어진 대포는 너무
무거웠기에 전장에서의 활용성이 지극히 제한될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포는 야포
의 개념보다는 요새포와 공성포 그리고 함상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1734년 리옹에서 일한 스위스인 엔지니어
겸 대포제작자인 장 마리츠(1680~1743)였다. 마리츠는 대포를 금속상태에서 주조함
으로써 포강을 뚫으면 정확하고 균일한 제품을 만들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천공기를 개발했고.. 이는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 장마리츠(1711~1790)가 더욱
발전시켰다. 1755년에 프랑스의 대포제작 총감찰관에 임명되어 프랑스의 모든 왕립
조병창에 자신의 천공기를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새로운 제작기술은 곧 유
럽 다른국가의 주목을 받았고 1760년경에는 러시아에까지 도입되기에 이른다.
이런 균일한 포강의 도입으로 기존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기술적 진보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즉 대포하나하나의 성질을 포수가 일부러 익힐 필요가 사라졌고 금속의 강
도와 두께가 일정해서 화약이 터질우려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의
것보다 훨씬 가볍고 운반하기 쉬운 대포를 만들수 있게 되었다. 여하튼 천공기를 사
용해 제작된 대포의 성능은 이전보다 한층 우월하고 뛰어났기에 새로운 대포의 효과
적 사용을 위한 포술훈련과 테스트의 필요성이 군상층부에서도 널리 퍼지게 된다.
그리보발의 포병의 기술적 혁신
신형 대포의 테스트를 책임지고 맡은 사람이 그리보발중장이었다. 그는 일찍이 유학
시절 보고 체험한 포병의 야전에서의 가능성을 새로운 대포에 곁들여 전장에서 일찍
이 찾아보지 못한 획기전 변화를 추구한다. 1763~1767년의 기간동안 그리보발과 그
의 지지자들이 벌인 테스트기간동안 그리보발은 견인차, 탄약운반차, 마구, 조준장
치등 야포의 필수적인 모든 부품을 새로 설계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 포신의 앙각을 정확하게 조정할수 있는 나사식장치와 조준선의 위치를 조
절할수 있는 장치를 도입해서 대포발사전에 포탄의 궤적을 예측할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다양한 표적에 대응할수 있는 솔리드포탄, 셸포탄, 산탄을 흩어뿌릴수 있는
캐니스터 포탄등 각종 포탄의 개발과 구경의 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보발의 조직개혁.
이제껏 대포를 운반하던 민간인 청부업자를 과감히 배제하고 대포의 사수가 운반하
도록 규정을 바꿨다.대포의 길드적 특이성은 민간인 청부업자의 군계약에서 알수 있
듯이 이런 특이성때문에 포병이란 병과에 대한 승진기준은 일반 보병이나 기병과는
전혀 다른 자체적인 규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보발은 포병을 위한 포술학교를 만들어 포술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게 했고 기존
의 보병, 기병과의 병종조합에 맟춰 새로운 야포의 사용법을 가르쳤다. 이런 노력으
로 인해 육군의 각병과중 가장 중세의 길드적 잔재가 남아있던 포병은 새로운 사단
조직안에서 기병 보병과 더불어 작전을 펼칠수 있는 역량을 갖출수 있게 되었다.
포병 병과는 1781년의 프랑스 <장교임용제한>이란 반동적인 개혁아래서도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병과는 신분과 출생과정에 관계없이 순수한 재능만으로 평민이 장
교로 임용될수 있는 좁은 문으로의 역할을 해 길드의 잔재에서 능력에 따른 진급이
란 가능한 유일한 병과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성과와 한계
그리보발과 그의 동조자들이 이룬 결과물인 새로운 야포는 육군내부의 소모적인 논
쟁에 맞물려 생산에 따른 결정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설계는 1776년에야
비로소 승인을 받았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이 수그런 든것도 사단편제가 결정된 1788
년경이었다. 그럼에도 이 신형대포는 발미전투의 포격전(1792년)에서 그 능력의 유
효성을 입증했고 특유의 기동성(행군하는 보병과 거의 엇비슷한 이동력을 자랑함)을
인정받아 프랑스군의 승리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라이프
치히 전투에서 충분한 포탄만 있었어도 유럽의 지배자는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후에
술회함으로써 이 신형대포의 성능을 깊이 신뢰했다.
이 신형대포는 1829년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후장식포가 대체할때까지 신뢰할
만한 무기였음을 전쟁기간중 입증했으나 1850년경까지는 대체적으로 극적인 진보가
일어날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제철기술 자체의 비약적인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
다. 아무리 신형대포의 제조를 위한 천공기의 도입과 포술의 혁신적 변화가 존재하
여도 제련술자체가 제자리걸음을 걷는 이상 다음세기 군산업체의 출현(1880년대후)
시대같은 대구경의.. 그리고 대량의 대포를 국가가 얻을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1780년대의 철을 제련하는 새로운 기술 일명 <교련법>이 발명되었고 여기에 관심을
보인 프랑스당국의 기대도 컸지만 결국에는 르크뢰조-앵드레계획 처럼 참담한 실패
로 결말지어졌다...
대량의 야포를 얻고자 노력한 프랑스의 실패는 육군보다는 해군에게 좀 더 치명적
이었고 이는 프랑스의 영국에 대항하는 해상에서의 노력이 참패한것과도 깊은 연관
승을 띈다.
참조2> 대포의 개량과 맞물려 후장식 머스킷총의 제작도 이루어져 수천정가량 생산
되었으나 메커니즘상의 문제가 발생되어 전량 폐기되었고 개발자는 자살했다.
추신: 이로써 대략적인 육군의 개선과 발전방향은 대략적으로 다룬셈이고 프랑스
해군의 제반상황을 다음편에서 간략히 논의하는것으로 마무리짓도록 하죠.
서봉덕 동양과 서양의 화포 기술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게 바로 포신 내강을 깍아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기술이 아마 동양 - 중동, 인도, 동아시아 모두 포함해서도 - 에는 끝내 없지 않았나요? 2005-11-27 12:03:32
61.79.124.179
수원삼성f.c. 사실 포병이란게 그만큼 전문지식이 필요한 병과이기때문에 조금 특수성을 지녔죠. 젊은 나이에 고속진급을 한 나폴레옹의 경우도 그의 병과가 포병이였고 그가 포병에게는 필수적인 수학이라던가 포병학에 강했기때문이라고 볼수있죠. 나폴레옹의 경우는 원래 해군을 지원하려했다가 자격요건이 안되서 포병으로 간걸로 알고있습니다. 근데 나폴레옹이 해군이 ㅤㄷㅚㅆ다면 또 역사가 달라졌겠지요.. 2005-11-28 07:23:54
222.153.118.141
문제중년 포병이 특수적인 성격을 가진데는 경제적인 면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은 많은 제정을 소모하는 병과이며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포병대를 운영하려 마음먹었다면 거기 들어갈 돈에 대해서도 각오를 해야만 했죠. 덕분에 애초부터 포병은 몸값이 상당한 특별한 병과였고 그들이 가져야할 직업적 덕목(?)인 기술이란 면에서도 특별한 자들이었죠. 아울러 그 효과에 대해 충분히 인식했다면 그에 따른 대접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란 것도 익히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고액 연봉을 받는 기술자 집단 내지는 이런 이들이 모인 성 바르바라를 믿는 길드 조직과 유사해지는게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란 이야기죠. 2005-12-13 14:57:18
mar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