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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4일 금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3,1-8
복 음 :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마르 7,32)를 낫게 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마치 성사를 집전하시는 사제 같으십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에게 손을 언저어 주실 것을, 곧 안수를 청하였을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손가락, 혀, 숨 등을 통한
정교하고 신중한 동작으로 그의 귀와 혀를 열어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때로는 병자를 직접 만나시지 않고
원격으로 고쳐 주시기까지 하시던 분께서
여기서는 당신 지체로 병자의 몸을 접촉하시면서
일종의 전례 예식 같은 치유 행위를 보여주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구체적인 모습을 목격합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만질 수 있는 지체로 육화하시어
당신을 만지는 사람들이 당신 신성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던 사람은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분의 신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모든 수단으로 우리를 낫게 인도하십니다.
성령 기도나 초자연적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마련하신 자연적인 수단들이나 의사들을 통해서도 고쳐 주십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 조건에 맞추어 눈에 보이는 표시와 말씀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주는 도구가 바로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받을 때마다 눈에 보이는 표지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고 합당하게 모셔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은총으로 활짝 열릴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석 감정사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감정한 보속이었습니다.
이 보석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보석 감정사도 인정한 최고의 보석이라는 말을 전했지요.
그러나 청렴한 이 사람은 보석 받기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보석을 보배로 여기지만, 저는 탐내지 않는 마음을 보배로 여깁니다.
제가 이 보석을 받으면 우리 둘 다 보배를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보석을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보석의 귀중함을 알지만, 이 보석이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게 하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추어야 생각대로 되면 기뻐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통해서만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지금의 상태를 넘어 그 너머로 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물건을 바라봅니다. 이 물건의 중요함을 알되, 그 물건 자체 때문에
‘나’의 삶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됨을 자주 깨닫습니다.
그래야 나를 넘어 그 너머의 주님께로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이런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세상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가장 귀한 보배임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르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지 않고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지요.
이 예수님의 행위는 중요한 것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뒤,
그는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더 큰 가치인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 세상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귀먹은 이’란 단지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저희 귀에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저의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시고,
당신 영으로 도유 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먼저 나를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먼저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듯이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더듬는 이입니다.
그들의 귀와 입을 활짝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글쓰기를 지도하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십니다.
말씀도 얼마나 예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어 해맑은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듯이
주님과 한적한 곳에서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고,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눈이 되어주고, 듣지 못하는 이에게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직 소화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엄마가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었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인하여 위로와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열려라-에파타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 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 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일주일에 한 번씩 부주임 신부님과 ‘운동치료’를 받으러 다닙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몇 개월 다니면서 몸이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아직은 젊고, 운동신경이 좋아서입니다.
저는 같이 다니고 있지만 부주임 신부님은 할 수 있는 동작을 따라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운동신경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은 신용카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려는데 그리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6년 전에 신용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과 연륜이 있기에 제게는 가능한 것이
신부님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부님과 이야기하면서 문득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열정과 패기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야 봄이 온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선택의 가능성을 주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로봇처럼 명령에만 따르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는 하느님 사랑의 큰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선택의 결과로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하느님께 영향을 미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 깊숙한 욕망을 건드렸습니다.
금지된 것을 탐하려는 본성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 각자는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유혹을 마주합니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선택들입니다.
이를 ‘판도라의 상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너무 궁금했습니다.
결국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들이 나왔습니다.
질병, 슬픔, 죽음, 가난 등 인간의 삶에 불행과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이 상자에서 퍼져 나왔습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완벽했던 삶(에덴동산과 유사한 평화)을 잃고,
고통과 투쟁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상자에 남아있던 마지막 요소는
바로 희망(엘피스, Ἐλπίς)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모든 재앙과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극복할 가능성과 위안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유혹을 직면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단지 인간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벌하시지만,
동시에 가죽옷을 만들어 주시며 보호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과 실패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극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따를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도 돌아올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선택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고,
공동체를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에파타!’ 복음을 접할 때마다, 제 지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수도회 입회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통 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말주변이나 말재주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어떤 정소를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의 투명 인간처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창 시절 제 생활기록부에 단골로 적혀있던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격, 남 앞에 나서기를 지극히 꺼려 함,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몇십 년 만에 해후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가 주도한 한 강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뀌어버린, 제 모습에 강의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변화된 제 모습을 보며,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 신앙 여정 안에 ‘에파타!’라고 외치시며 저를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또 다른 깨달음, 또 다른 시야를 지니도록
계속해서 ‘에파타!’ 작업을 지속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 힘을 보태주십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한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면 기적이 가능합니다.
제대로 한번 변화되어 보려고, 제대로 한번 눈을 떠보려고,
제대로 한번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리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되풀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듣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놓치며 살아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동료 이웃들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목소리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징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
반드시 해야 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주님의 한 말씀,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욕망과 갈망의 차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독서와 복음에서 모두 열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눈이 열려 자기의 알몸 곧 죄의 부끄러움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복음에서는 눈이 열려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 입은 찬미를 드립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볼 때 누구는 자기를 보고, 누구는 하느님을 보고,
누구는 자기 죄를 보고, 누구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며,
누구는 장점을 더 보고, 누구는 단점을 더 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볼까요?
제 생각에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봅니다.
자기 안에 미움이 있으면 모든 것을 밉게 보고,
자기 안에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곱게 보곤 하지요.
어둠이 있으면 어둡게 보고,
빛이 있으면 밝게 봅니다.
자기 안에 욕구 또는 욕망과 욕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욕구만 있어도 자기가 욕구하는 그것만 보게 되고,
욕망과 욕심이 있으면 더더욱 그것만 보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합니다.
욕구하는 것을 보자 탐심이 발동되면서
그것이 좋게 보이며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순간 하느님을 놓칩니다.
그것에 시선을 뺏겨 하느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다음에는 숨기에 놓치기도 합니다.
욕심내던 것을 보던 눈이 이때부터는 죄지은 자기를 보며
자기 죄를 감추고 자기를 숨기려다 하느님을 놓치는 겁니다.
하느님은 놓치고
죄지은 자기와 욕망의 허망함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 대신 갈망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욕망이나 갈망이 모두 결핍감에서 비롯된 면에선 같지만
욕망이 아담과 하와처럼 많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음에도
더 소유하고 싶은 탐욕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갈망은 오늘 복음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너무 가난하기에
생존이 위협받는 사람들의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욕망이 풍족한데도 불만을 채우려는 것이라면 갈망을 살려는 것이며
욕망이 스스로 채우려는 것이라면 갈망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기를 바라기에 채워줄 구원자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비교하면
욕망이 이것저것 진탕 먹고 마시면서도 더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은 것이라면
갈망은 가뭄으로 바짝 타들어 가는 벼처럼 비 한 방울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타는 목마름이고 그래서 비를 내려주십사고 하느님께 빌게 하는 목마름입니다.
어쨌거나 욕망은 욕심에 눈이 멀어 죄짓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숨게 하는 데 비해
갈망은 타는 목마름으로 구원자를 찾게 하고 뵙게 하는 것임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에파타, 제발 열려라 열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반면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 구원의 현주소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가 이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애를 끊는 심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과 메시아는 그들을 넘고 비켜서
이방인과 온 세상을 향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서두에 띠로를 떠나신 예수님은
북쪽으로 약 36km 더 떨어진 항구도시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를 거쳐 다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어디 예수님의 이방인 지역 선교여행이 이렇게 단 한마디로 요약될 그런 사안이겠는가?
예수께서 띠로에서 시돈으로 가셨고, 시돈에서 데카폴리스 지방으로 가시자면
골란과 바타네아 지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셨을 것이고,
데카폴리스에서 다시 갈릴래아 호수까지 오셨다면
이 長程은 아무리 짧아도 150km정도의 먼 길이다.
예수께서 대장정의 이방인 선교여행 끝에 도달한 곳은 다시 갈릴래아 호수였다.
추측컨 대 이곳은 갈릴래아 호수 동편 골란 지방과
데카폴리스 지방의 접경지역이었을 것이고,
일찍이 ‘부대’라는 마귀를 쫓아내고 돼지들이 떼 죽음 당하게 했던
게라사(게르게사) 마을(5,1-20) 근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넓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효과 역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리 탐탁치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께서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은 믿음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보실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벙어리(bumbness)란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없는 사람인데,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전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원인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聾啞인데,
농아는 귀가 먹어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와 치유를 청하는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사람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외치신다.
“에파타!”‘열려라’는 뜻이다.
에파타! 열려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토록 간절히 윈하시는 것이다.
‘에파타’는 비단 오늘 복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온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서 ‘지금 여기에’만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통용될 말씀이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들음과 말함’을 찾았다고는 하나
‘들음과 말함’이 예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을 때는 언제고 緘口令이 내린다.
들어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엄한 함구령 다음에는 또 다른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37절)라는 사람들의 경탄은 지극히 당연하다.
수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는(이사 35,5-6) 현실은
메시아 시대의 표징들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