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부와의 대결
사이훙은 열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상당한 경지의 무술을 지니게되었다. 도장을 떠나 속세에 내려와서는 지방 무술 대회에 나가 당당히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각 지방을 유람하는 사이훙의 모습은 멋지고 낭만적이었다. 영민하고준수한 외모와 늘씬한 체격, 잘 발달된 근육으로 인해 사이훙은 나이보다 성숙한 장부로 보였다. 또한 매끈한 피부와 화산에 들어가면서부터기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사이훙을 한층 돋보여 주었다.
사이훙은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였으며,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자신의 무술을 시험하고 싶어했다. 한 번은 당랑권의 두 제자에게 도전해 그들을 꺾기도 했다. 두터운 옷 아래 숨겨 깐 철판 덕분이었지만 사이훙은 그들을 꺾었다고 큰소리쳤다. 다른 지방에 가서 더 대담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사이훙은 한 마을을 지나다가 광장 한 가운데 걸린<백학촌()>이라는 팻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그 팻말에는 큰 글씨로 <백학촌 - 하늘 아래 우리가 최고다. 우리가 여기 있으므로 둘째란 없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사이훙은 바로 붓을 꺼내 그 글귀 아래 첨언을 했다.
<이제 내가 왔으므로 너희들은 둘째다.>다음날 팻말에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만일 용기가 있다면 내일 이곳에 나타나거라.><물론.>사이훙은 다시 글을 보탰다.
다음날 광장에 얇은 비단 장삼을 입은 청년 다섯이 나타났다. 사이훙은 성긴 베로 지은 회색 도교 법복을 입고 있었다.
[뭐야, 저건. 어린애잖아.]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스물 여덟쯤 돼 보이는 청년이 사이훙을 손가락질하며 비아냥 거렸다.
[저놈이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 더구나 도사 복장까지 하고말이야. 나는 스님들과 싸우지 않아.][나는 중이 아냐. 산천을 유랑하는 은자이자 무인이지.][버릇없는 놈. 난 눈감고도 네놈을 처치할 수 있어.][그래. 꿈속에서는 가능하겠지.][입닥치지 못해!]제일 키가 큰 청년이 으르렁 거리듯 소리를 질렀다.
[몇이나 덤빌 거지?]사이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긴 몇이 덤벼도 상관없기는 하지만.][건방진 녀석. 몇은 몇이야, 나 하나면 충분하지. 어이, 꼬마 중놈,너 어디서 왔어? 그걸 알아야 냄새나는 시체라도 돌려보내지.][그럴 필요 없어.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사내라면 어디 덤벼봐.]사이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가 큰 청년이 돌진해 왔다. 사이훙은 가만히 기를 끌어올린 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쯤 몸을 빙글 돌며엉덩이를 걷어차고, 휘청거리는 청년의 발목을 다시 한번 걷어차 무릎을꺾었다. 청년은 마치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고통을 참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다고 말했지?]사이훙은 조롱 투로 한마디 내뱉고는 유유히 일어섰다. 그는 승리를만끽했으며 자신의 무공에 대해 진실로 자부심을 느꼈다.
화산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사이훙은 망설였다. 속세에서 만끽할 수있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사이훙은 관씨 가문의부와 영예를 향유했다. 훌륭한 저택과 멋진 옷, 생산과 거위 요리, 웅담으로 만든 산해진미를 두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사이훙은 결투 때마다 승리를 거두러 소년 영웅으로서의 명예도 막 쌓아 가고 있었다. 화산파의 검소함과 철저한 극기가 요구되는 수련 생활을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이훙은 다시 산으로 가야 했다. 산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한숨으로 시작되었다.
산에 도착하자마자 사부님은 훈계를 시작했다.
[얘야, 넌 이제 너의 무공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사이훙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단다.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야. 정말 훌륭한 무공을 터득하려면 명상을 더 해야 한다. 너는 기본이 잘되어 있어. 기본은 힘을 내기 위한 원천이기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란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깊이 연마하고 네 신체 전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저는 무술 대회에서 우승도 했고 여러 번 도전자들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실제로 기를 쓰는 것보다는 키우는 게 더 바람직하단다. 그래야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이 생기는 거지.][저는 벌써 내공을 익혔습니다, 사부님. 싸울 수 있어요.][하지만 너는 무념의 명상을 통해 영성을 지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어. 사이훙, 영성을 지니는 것이 싸워 이기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일이란다.][저는 그런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 아래 세상을 보세요. 재미있는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경극도 보고 서커스도 보고 또 여러 무인들과 결투도 벌여 많은 걸 배웠습니다.
만일 제가 도관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런 일들을 겪어 보지 못했을 겁니다. 평생 예전만을 떠받치고 사느라고 생생한 무림의 기술을 배우지도 못할 거고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를 배우고싶습니다. 이제 이 산 위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같아요.][네 무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하느냐?]사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그럼 나와 한번 싸워 보련? 만일 네가 이긴다면 내 속세에 있는 여러고수들을 소개해 주마. 그때는 네 마음껏 가서 배우고 또 싸워도 좋다.
그렇지만 네가 지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거다. 알겠지?]사이훙은 사부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이훙은, 이 고독한 장소에서 편안하게 은둔하시는 분과 무슨 얘기를 하겠다고 헐떡이며산을 올랐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사부님은 이제 여느 노인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머리속으로 사부님의 몸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자신보다도 훨씬 가벼울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사이훙은 자신감에 차서 엷은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그래, 한 번 덤벼봐라.]사이훙은 사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무섭게 강하게 한 초를 출수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다른 사람 같으면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부는 태연히 슬쩍 몸을 비켜 피해 버렸다. 사이훙은 그때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사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수십 차례 출수를 했지만 사부님의 몸은 커녕 옷자락에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이훙은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했다.
사이훙은 내공을 끌어 모아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사부는 학처럼 우아한 자태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사이훙의 어깨를 뛰어 넘었다. 사이훙이 놀라 몸을 돌리는 순간 얼굴 쪽으로 세찬 기운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뭐가 철썩하고 뺨을 때렸다. 사부님의 옷소매가 슬쩍 얼굴에 스친것이다.
사이훙은 연신 팔을 내두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사부님의 번쩍이는 눈빛과 함께 옷소매가 끝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휘두르던 팔이 사부님의 소맷자락에 맞자 팔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이훙은팔을 들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손바닥이 다시 보인다고 느낀 순간 사이훙은 자갈이 깔린 좁은 길로 날아가 길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사이훙이 맥을 놓고 쓰러져 있자 사부가 걸어왔다. 번쩍이던 눈빛은이미 사라지고 다시 미소 띤 인자한 얼굴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사이훙은 안아 일으키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졌다. 네가 진 이유는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나는 완벽하게 집중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고. 명상 없이는 집중력을 얻을 수 없단다.]사이훙은 일어나 숨결을 가다듬었다.
[저는 그래도 떠날 겁니다. 행자로 떠돌며 살겠어요. 사부님 모습을한 번 보세요. 그래요, 사부님은 훌륭하신 분이죠. 하지만 그래서 얻으신 게 뭐죠? 사부님은 늘 배고픈 상태로 이 외로운 산꼭대기의 습기찬방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게 성공하신 겁니까? 신들이 사부님의 말을 듣고 있나요? 천상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대체 천상 따위가 있는지 어떻게아신다는 겁니까?]절규에 가까운 사이훙의 물음에 사부는 차분하게 답을 해주었다.
[사이훙, 이 세상을 다 알아야 신과 하늘도 알 수 있는 거란다. 이곳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면 그때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지.][천상이 보여야 믿지요. 설사 믿는다고 해도 어떻게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몸이 떨어질 텐데.]사부는 싱긋이 웃었다.
[몸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다. 네 영이 올라갔다 오는 것이지.][영이라고요? 그게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겁니까?][그럼. 하지만 먼저 오감을 다스려야만 한다. 이 세상이 환영에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오감을 다스리고 세상 이치를 터득하기 시작하지.][세상이 환영이라고요?][그래. 세상이란 실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란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뇨? 여기 이렇게산도 있고, 저도 존재하지 않습니까?][그렇지 않단다. 그게 바로 환영이야. 네가 일단 오감을 다스리고 다섯 가지 원소의 이치를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단지 환영이라는 것을알게 될 것이다.][저는 사부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감을 다스린다느니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느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사부는 사이훙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자, 이런 것이 네가 궁금해하는 사물을 다스리는 것이다.]사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단에 놓인 향다발을 가리켰다. 순간 마른향에 불이 붙더니 흰 연기와 함께 백단향의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사부의 손길은 다시 2미터쯤 떨어져 있는 탁자 위의 청동 주전자로 옮겨 갔다. 그러자 주전자가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더니 옆의 탁자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이훙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섯 원소를 지배하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단다. 하지만 그 단계에이르기 위해서는 수련을 더 해야만 한다.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거라. 말년에 성취를 맛보려면 젊을 때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단다. 마치큰 나무가 작은 씨앗에서 자라듯이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을 믿기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얘야, 너는 아직 어려서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과실을 본 적이 없을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네게 그 열매를 보여 준 것이란다. 하지만 사이훙,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언제나 완벽한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일들도 있는 법이지.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고, 네가 모든 것을 스스로 알 수 있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