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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5일 연중 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창세 3,9-24
복 음 : 마르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 않는 분의 이 물음은
그가 당신 앞에 스스로 나서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를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죄입니다.
원조들의 이야기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연결해 있는 죄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불순종이라는 태초의 죄에 연루된 세 공범은 서로에게 탓을 돌리기 바쁩니다.
사람은 여자를, 여자는 뱀을 탓하면서요.
더구나 사람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3,12)라는 말로
하느님까지 탓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남이 자신에게 한 잘못만 말하지,
자신이 한 잘못된 행동은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사람과 여자의 근원적인 ‘탓’은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대신 아내의 말을 듣고
여자는 남편의 말 대신 뱀의 말을 듣습니다.
무엇보다 그 열매가 먹음직스럽다고 보는 자신의 감각을 따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아버린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고
에덴동산 밖에서 살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원조들의 이야기는 원죄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자비로 끝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죄는 인간의 삼중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인간과의 관계,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죄와 악의 고리를 신의 고리로 끊어 버리고
더 튼튼한 사랑의 고리로 인류를 연결하면서
이 삼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사가 끝나면 성당 뒤편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유아방에 있던 아이들이 다가올 때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들고 있는 사탕만 바라보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탕을 받은 뒤의 모습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큰 만족감을 보이는 것이지요.
만족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막대 사탕이라면,
이 막대 사탕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서는 만족에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만족감을 계속 유지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인 성녀는 만족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자기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유명한 행복의 도식이 있습니다.
소유를 계속 늘리면 행복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욕망이 커지면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 성녀의 공통점은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계속 줄여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하는 것이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삼덕인 ‘청빈, 정결, 순명’을 철저하게 지켰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세 가지 덕행이라는 향주삼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암에 걸려 이를 극복한 사람과 암을 전혀 앓지 않은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 지수가 높을까요? 암에 걸렸지만 이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암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기 욕망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소유를 무한대로 늘리는 행복보다 훨씬 쉬운 길입니다.
쉽게 만족하고, 쉽게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많은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에게 금은보화가 생겨서 따랐던 것일까요?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줄여나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흘 동안 굶으면서도 말이지요. 이들을 가엾이 여겨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가량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산해진미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냥 빵과 물고기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욕망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먹던 빵과 물고기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감사했습니다.
자기 행복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절대로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욕망을 줄여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 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니, 나누기를 원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약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현재 인구가 약 85억이라면 그 양은 차고 넘치지만,
버리는 음씩 쓰레기가 쌓여가도 굶주린 이들에게는 주지를 않는 세상입니다.
<유엔세계식량기구>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2017년),
현재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앗아가는 것이 ‘기아’이고,
매일 1만 6천 명의 어린아이가 기아로 죽고 있으며,
이는 모든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 합친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 인구의 일곱 명 중이 한 명은 오늘 저녁 식사를 굶은 채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나아가, 나누기를 원하지 않은 것은 무관심과 무감각, 무책임과 이기심,
자기 안주와 사랑이 부족한 까닭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이요,
사랑의 소명에 대한 무감각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고, 또한 곧 먹을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차별 없이 배불리 먹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머리로 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육체적 허기를 채우는 빵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채우는 생명의 빵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 감사기도 드리고,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구분과 차별이 없이
풍요롭게 하시고 넉넉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유다인,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충만하게 해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저 군중이 가엾구나.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2-3절).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신다.
군중들은 사흘째 주님을 따라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절)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왕곡성당에서 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 “전능자 주님, 판토크라토르”라는 이콘을 제작하고,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주위 본당들로부터 또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빵 일곱 개를
봉헌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다.
라자로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라자로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으매” 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라자로 마을의 가족들까지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본당 새 신자 분과 모임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분과장과 5시 40분에 성당에서 만나서 모임 장소로 가기로 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 시간 되는지 물어보니 시간 된다고 해서
직접 모임 장소로 6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당일 아침 미사에서 분과장은 부주임 신부님에게 ‘신부님도 오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예 저도 갑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분과장님은 그때 부주임 신부님이 저랑 같이 온다고 말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전날 제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간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기다리다가 분과장에게 전화했더니
3분 후에 도착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성당으로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분과장님은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행히 약속 장소가 성당에서 멀지 않아서 부주임 신부님이 와서 함께 갔습니다.
말은 정말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같습니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대로 들으면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1992년이니 33년 전의 일입니다.
동창 신부님들과 진부령에 있는 스키장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 한 명은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진부령으로 와야 하는데 오대산이 있는 ‘진부’로 갔습니다.
오대산의 진부는 설악산의 진부령과는 거리가 제법 있었습니다.
늦은 밤 신부님은 택시 타고 진부령의 숙소로 왔습니다.
2004년이니 21년 전의 일입니다.
사목국 신부님들이 양평의 한화 콘도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신부님 한 명이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양평 한화 콘도에서 회의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방 호수가 몇 번인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705호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705호는 없다며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용인 한화 콘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양평 한화 콘도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용인에서 양평까지 다시 와야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의 물리적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태,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해 묻는 말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은 상황에서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순히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셨습니다.
이 질문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길을 잃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다고 느낄 때,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상징합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구약의 아담이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면,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단절된 모든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을 대신 짊어진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질문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죄와 무관심 속에서 하느님과 멀어져 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단지 창세기의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와 기쁨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각종 자재를 잔뜩 실은 대형 트럭이 저희 피정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심한 정체로
기사님과 도우미께서 엄청 고생한 분위기였습니다.
힘을 합쳐 짐을 내리고 나서 두 분 얼굴을 보니
빨리 내려오느라 끼니도 못 챙긴 분위기였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즉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3)
그래서 제가 정중히 두분에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제가 초스피드로 라면을 끓여드릴 수 있는데,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두 분은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거기다 김치와 밥과 과일과 차까지 내어드렸더니,
두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도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리 좋은 설교 말씀도 안 먹힌다는 것,
뭘 하든 일단 잘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우선 먹이고 봐야 합니다.
먹이고 나서 법을 따지든 원칙을 따지든, 야단을 치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크게 아프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는 단체라 할지라도 사람이 아프면
열 일 제쳐놓고 일단 치료를 받게 하고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 각자 모두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셨습니다.
만물 위에 인간이란 존재를 두고, 그의 성장과 구원,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었습니다.
굶주리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일, 아파하는 한 인간을 치료하는 일,
마귀 들려 죽을 고생을 다 하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벌, 하느님께서 주신 고통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오늘 창세기는 고통의 기원과 이유에 관해서 얘기해주는데
죄의 벌로서 고통이 주어짐을,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고통이란 자기 업보(業報)라는 말입니다.
선업을 쌓았으면 고통이 없을 텐데 악업을 쌓았기에 고통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틀린 말이 아니고 창세기를 믿는 그리스도교 또한 죄지었기에 고통을 받는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다고도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고통이 업보라면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벌인데
여러분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습니까?
제 생각에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상관없이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죄의 벌을 받았는지
그 모범을 본받아 벌을 받더라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생애 말년에 다윗은 인구조사와 병력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생 군마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자기 백성과 군마의 조사를 통해 자기가 이룬 태평성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벌을 받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님께서 세 가지 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그래서 흑사병이 창궐하는 벌이 내려졌을 때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하느님께서 벌하시게 해야지
자기가 자기 죄를 벌하거나,
인간이 자기 죄를 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인 우리의 죄는 하느님 뜻과 계명을 어긴 죄이고,
고통도 하느님께서 벌로서 주신 고통이라고 믿기에
우리는 죄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고통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며
그렇기에 죄도 벌도 고통도 성사적인 죄와 벌과 고통이 됩니다.
이것이 죄를 짓고 벌을 피하여 숨음으로써
하느님과 단절된 아담과 하와와 다른 점이고,
다윗처럼 죄를 지어도 하느님을 만나고,
벌을 받아도 하느님 사랑을 만나며,
고통 중에서 더더욱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다운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마르 8,1-10)
1) 군중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사흘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모두 계속 굶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저들을 돌려보내면,
저들은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이고,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저들을 먹인 다음에 보내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따로 언급되어 있는 ‘먼 데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이야기 속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뜻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 데서 온 사람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군중은 모두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상황.>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바로 그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당신은 왜 걱정하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의 끝부분에 바로 그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걱정하지 마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은 ‘주님의 힘’으로 하면 된다.
‘주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맡겨 드려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
너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수님께서 먼저 아시고,
사람들이 걱정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시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것을 준비해서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가엾다는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걱정’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걱정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6,6).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3)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말은, 표현으로는
“이 광야에서 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인데,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을 기억하고서 한 말이라면,
이 말은 “주님의 기적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4)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기적의 빵’은,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집’을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 나라에 잘 도착하기 위한 ‘힘’ 말고는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세속의 권력이나 부유함이나 명예 같은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것들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권력이나 부나 명예 등을 얻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