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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聖林 역학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하심
조선족(朝鮮族,차오시엔족 Chao Xian Z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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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주석은 방한 기간중 김대중 대통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고, 12살 때 떠난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고향땅을 62년만에 다시 밟을 예정이다. 조 부주석은 6·25 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경력을 갖고 있어, 그의 방한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관심거리다.
조 부주석은 12살 때인 1938년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 지린성 용지현으로 이주, 중학을 졸업한 뒤 중국 팔로(팔로)군에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6·25 당시 후근부 사령관인 홍쉐즈의 통역장교로 근무하며 중국 인민지원군의 군수품 수송에 큰 역할을 한 공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 인민정부 주석과 지린성 성장 등을 지낸 그는 87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사령관에 임명됐고, 이듬해 중국군 최고 계급인 상장으로 진급했다. 예편 후인 지난 98년 3월 제9기 전인대에서 정협 부주석(부총리급)에 선출됐다.
그의 친인척중에는 육사 18기생으로 기무사령관과 교육사령관 등을 지낸 조남풍 예비역 장성이 있다.
남북한 정부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는 조 부주석이 이번 방한기간 동안 남북 화해와 교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가 주목된다. 그는 98년 6월 중국 지도자로는 최고위급 인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조 부주석은 방한 기간중 고향을 방문해 선영에 성묘한 뒤, 인근 청주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을 예정이다.
(북경=기자 : hbjee@chosun.com)
조선족의 삶과 변화
1999/09/27 14:12:20
개혁개방 이래 백여 년 동안 형성된 전통적인 조선족사회의 생활판도를 뒤헝클어놓은 두 가지 지각운동이 있었다면 그 하나는 한국방문을 비롯한 출국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해관을 넘어서는 민족의 대거이동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20만을 웃도는 조선족들이 대를 내려오며 지키던 고향을 떠나서 장강 남북의 발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청장고원, 해남도의 삼아에까지 삶의 자취를 찍어 가고 있다. 기재에 따르면 조선족 조상들이 1860년에 조선의 대기근을 피해 만주땅에 발자취를 남긴 후 1910년, 1931년부터 광복전까지 두 차례 대규모의 이민사가 있었다. 학술계와 매체에서 <제3차 대이민>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이 거창한 흐름은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장거이며 봉페된 농경문화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상품경제의 조류에 순응하는 가치관과 사유의식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조선족김치로 개척한 남하길은 비록 간난곡절이 많았지만 김치, 랭면, 개장은 이미 960만 평방키로메터의 중국땅에 명표음식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독특한 조선족음식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1986년 이전에는 북경시에 조선족랭면집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1000-1500여 개소 조선족기업이 있다고 한다. 북경시의 60% 이상의 시장은 조선족이 차지, 노래방과 가라오케의 70% 역시 조선족이 경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남도 삼아시에도 조선족식당이 있고 광동성 주해시에도 조선족 <장백식당>이 인기를 끌고 있다. 조선족김치는 상해사람들의 별미반찬으로 자리잡았다. 1982년에 북경시에 호적을 붙인 조선족은 근근히 3909명, 1990년에 9689명이였으나 지금은 5만명 이상이다. 1988년에 청도시에 150명 조선족이 있었으나 지금 교동도에 2만명으로 늘었으며 상해에도 1만명을 웃돌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집중됨에 따라 북경시 해정구 오도구와 산동성 위해시에 조선족과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조선족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문제점들도 많다. 농민들의 대거이동으로 일부 농촌은 황페해지고 있고 처녀들의 대거도시진출과 출국으로 말미암아 홀아비마을이 련이어 생기고 지식인들의 대거 <하해>로 말미암아 교육이 피페해지는 모순은 정부와 지성인 그리고 온 사회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연변일보, 99. 9. 17>
중국의 조선족
1. 중국 안의 조선족
1990년 자료에 의하면 중국 전체 인구는 11.3억명이며, 이중 다수민족인 한족(漢族)이 92%를 차지하고 나머지 8%가 기타 민족으로 약 9천만 명에 이른다. 중국에는 약 192만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이는 소수민족 인구의 2%에 해당하며, 전체 중국인구의 0.16%에 불과하는 매우 적은 수이다. 1982년 자료에 의하면 중국 조선족 중 98% 이상이 東北三省(遙寧,吉林,黑龍江 3省을 말함)에 살며, 43%에 가까운 82만 명이 延邊朝鮮族自治州에 사는데 이는 자치주 전체 인구 208만 명의 약 40%를 차지한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인구의 특성은 그 분포의 집중성에 있으며, 조선족 대부분이 동북지방에, 그리고 그 반에 가까운 수가 연변지구에 산다고 볼 수 있다. 연변 조선족의 반수 정도가 연길,룡정,화룡 3개 시에 살고 나머지가 5개 현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에서의 시역(市域)이란 것이 밀집된 도시지역 보다 훨씬 넓은 광역을 포함하고 현에도 현소재지 등 도시지역을 포함하므로 위의 통계에서 도시인구와 농촌인구를 인구를 구분할 재간은 없다.
다만 연변자치주의 농업인구가 전체인구의 46%에 해당하는 92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므로 전체 조선족 인구의 반 정도가 농업에 종사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인구의 구성비에 관계없이 조선족끼리 모여 사는 경향은 자치주 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 안에서는 사정이 다르긴 하나, 도시 안에서도 조선족 상가가 집중되어 있다든지, 시장 안에서도 조선족이 주로 이용하는 구역이 따로 있는 등 조선족의 '모이는 습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조선족은 요컨대 인구와 지역 분포상 분산적이면서도 집중적이고 한족과 뒤섞여 살면서도 자기 단독적인 마을에 모여 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분산적이라는 것은
첫째, 조선족은 기본적으로 주거·산거민족에 속하고 주거·산거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반수 이상을 점한다.
둘째, 조선족은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과 서로 뒤섞여 잡거하고 있다.
셋째, 조선족은 전국 29개 성·시·자치구의 1002개 현과 시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513개 현과 시에는 오직 1~5명의 조선족 밖에 없다.
이른바 집중적이라는 것은
첫째, 동북 3성에 집중되어 있고 특히 연변의 조선족 민족자치구역 내에 집중되어 있으며 동북 3성 조선족의 분포는 연변을 핵심으로 하는 분포연접층차를 이루었고 닭볏상태의 분포적 태세를 이루었다.
둘째,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50~100호씩의 부락을 단위로 하여 주거하고 있으며 순조선족이나 조선족 인구가 95% 이상을 점하는 조선족 마을이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부락 중 다수를 점한다.
셋째, 북경- 할빈철도, 할빈- 가목사철도의 이남, 이동의 지역에 비교적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고 강·하천 유역, 철도연선에서 수원이 충족하고 토질이 비옥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비교적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2. 연변 조선족의 언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공식 언어는 韓·中 이개국어이며, 관청의 간판도 이개국어로 병기된다. 연변지구조선족의 상용언어는 대부분 조선어이지만, 도시와 농촌 사이에 차이를 보이는데, 농촌에서는 거의가 조선어를 상용하며, 도시에서는 14%가 한어를 사용하고, 12%가 두 나라 말을 병용한다고 한다. 도시에 사는 조선족 어린이 중에는 우리말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연변대학에서도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주로 한어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과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에서 한어 상용 경향이 높은 것은 앞으로의 조선족 언어생활의 변화를 예고하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3. 중국 조선족 인구유동
민족 인구의 유동은 민족 역사과정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민족 인구 유동사는 곧 민족 이주사로서 민족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1945년 8월 조선광복 전까지 약 백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들어와 주로 중국의 동북 3성 범위 내에서 유동하였다.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조선인이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 되었다. 조선민족이 중국에 이민하기 시작해서부터 1945년 8월까지를 살펴보면 1910년 이전 중국으로 이민한 조선민족은 약 26만 명 안팎, 그들 대부분은 자연재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국내 지배계급의 압박 등의 원인으로 하여 청조 말기부터 압록강·도문강 대안의 중국 경내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845년에 조선 평안북도 초산군의 80여 세대 농민들의 중국 요녕성 통화(通化), 관전(寬田)의 훈강유역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그 뒤를 이어 환인(桓人),흥경(興京 즉 新民), 안동(安東 즉 凡事)등지에서도 조선 농민들이 땅을 일구어 벼농사를 지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먼저 러시아의 연해 변강지구에 이민 갔다가 다시 흑룡강, 우루리강을 건너 위북만지구로 이주했다.
1968년 그들은 다시 흑룡강을 건너 애혼현의 파베라하 입구인 나찐쿠자, 손하 등지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1896년 짜르 러시아는 '청로밀약'에 의해 동북의 만주리(滿州里)부터 할빈을 거쳐 대련, 수분하의 중동까지 철도를 놓을 때 러시아 경내의 조선인들은 철도연성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단계를 보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민한 조선인들 가운데 일부분은 청조(淸朝)정부의 정책과 조선정부의 요구로 강제적으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유동하게 된 것이다.
▶ 중국 조선족 인구 유동으로 인한 사회 문제
① 자녀 교육 문제
조선족들에게는 자녀교육을 각별히 중시하는 전통적인 미덕이 있다. 그러나 조선족 유동인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호적이나 언어 등 문제로 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중국은 아직까지 교육경비가 딸리고 학교 교사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동인원들이 자녀들을 현지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키기가 매우 어렵고 학교측에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한다. 또 농촌의 조선족 집거 마을에서 나온 사람들의 자녀들은 보편적으로 이중언어능력이 낮아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② 노인봉양 문제
노인을 존경하고 부모를 봉양하며 효도를 다하는 것은 조선족들의 또 하나의 전통적인 미덕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주조건·경비지출·사업분망 등 여러 조건으로 인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연세 많은 부모를 원거주지에 남겨두고 떠나기에 부모에 대한 효도와 봉양을 다 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노인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③ 혼인생육 문제
조선족 유동인구 가운데서 청년들은 여러 면에서 조건들이 제한되어 흔히 혼인생육기회를 뒤로 미루고 있다. 유동인원들은 현지에 호적이 없고 고정된 국영직장이 없기 때문에 집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결혼한 젊은이들은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야 하고 또 현지에 호적이 없는 형편에서 아이를 낳아도 현지에 호적을 올릴 수 없는 등의 원인으로 생육기회를 뒤로 미룬다.
④ 가정생활 문제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가정이 화목한 것은 조선족이 특별히 강조하는 생활 준칙의 하나이다. 조선족 유동인구의 가정생활을 보면 객지 생활조건이 험한데다가 경영과정의 모순·대부금 문제·경영실패로 인한 파산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일부 가정은 화목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⑤ 민족 분쟁 문제
조선족 유동인원들은 풍속관습 문제로 인하여 이웃과 모순이 생기고 사업문제로 동업자들 사이에 모순과 분쟁이 자주 일어난다. 이웃과 동업자들이 같은 민족이 아니기에 때로 민족감정을 상하게 할 때도 있고 민족문제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4. 연령대별 경험적 배경의 차이
조선족의 중국으로의 이주는 실질적으로 19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1945년 제 2차세계대전 종료 이후까지 근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 중 대량으로 이주한 것은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이며, 특히 이민 제 3시로 분류한 1931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제에 의한 강제적이고 집단적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중 많은 수는 1945년 이전에 중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들이므로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대부분은 이민 2세대 또는 3세대일 것이다.
지금의 노년층 중에는 과거 공직에 몸담았던 '퇴슈'와 '리슈'간부들이 있다. 전자는 오래 전 공화국 창설기, 혁명세대로서 일했던 간부들이고 후자는 그 후에 일했던 간부들이다. 연변 조선족의 75%가 국민학교 졸업, 27%가 중학교 졸업, 17%가 고등학교 졸업, 1% 정도가 대학 졸업의 학력을 갖고 있다. 연변에는 조선족 학교와 한족 학교가 병존한다. 아직은 조선족의 대다수가 자녀들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있지만, 도시에 사는 조선족 중 1/4 이상이 한족 학교를 보내고 싶어하는 것으로 미루어 한족 학교 취학률이 높아갈 것이다.
5. 조선족의 주거
농촌에 사는 연변 조선족들은 장지간을 가운데 둔 '함경도식'주거를 짓고 산다. 이러한 현상은 연변의 조선족이 대부분 함경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후예라는 사실로 부분적 설명이 되기는 한다. 전라도 이주민들이 많다는 안도현 삼도향 남도촌이나, 경상도 이주민들이 많다는 안도현 복홍향 복만촌이나 왕청현 동신향 태양촌에서도 조선족들이 역시 '함경도식'주거에서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연변에서 북쪽으로 멀어져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촌에 이르면 주거유형이 좀 바뀐다. 그것은 정지간의 전면에 걸쳐 '바당'을 길게 두는 것이다. 보통의 '함경도식'주거라면 바당은 정지간의 부엌 쪽 일부를 차지한다. 상경촌에는 조선족 집들 중에는 아예 한족 주거처럼 중앙에 벽으로 구획된 복도를 두고 정지간을 둔 절충식 주거도 상당수 있다. 또 정지간과 부엌을 벽으로 막은 집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연변지구 농촌의 조선족들은 출신지역에 관계없이 '함경도식'주거를 고집하고, 연변에서 북쪽으로 멀어지면 한족화한 '절충식'주거로 변형하는 것이다.
6. 조선족 문화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사회주의 새로운 역사단계에서의 조선족신문화의 탄생을 선고하였다. 이 시기 문화영역에서 이룩한 성과를 보면, 첫째, 기구가 구전하고 비교적 방대한 작가, 예술가 단체들이 조선족집거구역에서 신속히 성장되었다.
1950년 1월, 연길시에서 연변문예연구회를 창립하고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족문예일군들을 조직하여 창작과 연구 활동을 진행하였다.
둘째, 문예창작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공산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문예방침의 지도하에 조선족문예영역에서는 이름난 무용가, 음악가, 작가, 화가, 작곡가들이 용솟음쳐 나왔으며, 연변가무단이 출연한《부채춤》,대합창《장백의 노래》,독창《처녀의 노래》는 제5차,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에서 각기 일등상과 은질상을 따냈다.
셋째, 건국이래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중국조선족은 민족교육사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따냈다. 조선족은 본 세기초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신문화운동과 결합하여 강렬한 반일애국성격을 띤 조선족사립학교설립운동을 활기있게 전개하였다.
이 밖에 조선족은 자체의 전통문화의 발굴, 보존 작업을 위한 조직기구의 정비작업과 구체적인 발굴, 보존을 위해 주력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민요, 설화, 판소리, 전통무용을 발굴하거나 채집하는데 모를 박아 일정한 성과를 따내었고 우리 민족의 흘러간 역사와 밀착된 유형문화발굴이 제 궤도에 오르게 하였다.
▶「중국 동북지방 조선족 취락 및 주거에 관한 조사연구」장재촌 저,울산대학교출판부
▶ 「중국의 민족문제와 조선족」金炳鎬 저, 도서출판 서울 學古房
▶ 「당대중국조선족연구」 김동화 김승철 주필, 집문당
첫댓글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하루 지난뒤에 기타한국겨레방으로 옮기겠습니다.
등업좀 시켜 주세요?
등업은 카테고리 상위의 "등급해주세요"에 신청하시면 됩니다^^
잘 봤습니다~말하자면 주은래도 조선족이지요~~화족 지나족은 주인민족인 한민족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을 이중으로 느끼며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