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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1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연합된 끈끈한 공동체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자기 백성들도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이기적 개인주의와 그릇되 구원 이해로 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서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공주야! 공동체 안에 현명하고 헌신적인 중보자의 존재는 큰 축복이다. 그는 공동체의 화해와 치유, 성숙으로 이끌 수 있다. 주님도 희생적 중보자로서 온전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What God wants is a strong community united by love. He wants his people to share the companionship of the third God. However, the church is getting sick due to selfish individualism and misguided understanding of salvation. What attitude should the church have to stand again in God's delight? Princess! The presence of a wise and dedicated middle man in the community is a great blessing. He can lead to community reconciliation, healing, and maturity. The Lord has also shown his full form as a sacrificial middle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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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를 통해 공동체가 연합과 유대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데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유다는 베냐민을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며 간청한다. 첫째, 베냐민은 노년에 얻은 아들로 그 어미라헬에게 낳은 다른 자식(요셉)이 죽고 없어서, 이 아들에게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둘째, 아버지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와 같아서, 베냐민이 안전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살 의욕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It shows how important dedication is for the community to move toward the love of union and bond through Judas. Judas pleads with two reasons why Benjamin must be taken home. First, Benjamin is the son he got in old age, and his father's love for him is special because the other child (Joseph) he gave to his mother Rachel has not died. Second, because the father's life and Benjamin's life are the same, and if Benjamin does not return safely, the father may lose the will to live and kill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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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에 눈멀어 아버지가 받을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유다는 아버지의 고통을 생각 하면서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호소할 뿐 아니라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지난번에는 요셉을 죽이려던 다른 형제들에게 몸값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자고 설득하여 소극적으로 동생의 목숨을 건졌던 유다가, 이제는 직접 자신이 그 몸값이 되어 종이 될 위기에 처한 동생 베냐민과 그 동생의 생명과 결탁된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려는 이런 유다의 태도는 유다의 육신적인 후손으로 오실 에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사역을 예표하고 있다.
I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ast, when he was blinded by envy and did not care about his father's suffering. Judas not only appeals for Benjamin to be sent, thinking about his father's pain, but also volunteers to become a servant instead of Benjamin. Judas, who passively saved his brother's life last time by persuading other brothers who tried to kill Joseph to sell him as a servant to Midian merchants for ransom, now tried to save his brother Benjamin and his father's life, who are in danger of becoming a ransom. This attitude of Judas to save the life of his brother and his brother's life, which is a physical descendant of Judah, foreshadows the restraint and salvation of Jesus Christ, who will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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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유다는 이제 자신만 남아 있겠다고 한다. 아이와 형제들만 아버지에게 보내고 자신만 남게 해달고 간청한다. 유다의 관심은 오로지 동생과 아버지의 안전뿐이다. 동생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넘겼던 그 옛날의 형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이 아닐까?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나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인가? 난 절망의 순간에 왜 기도하지 않은가? 기독교의 핵심이 왕권이고 통치인데 어쩔 것인가?
Furthermore, Judas says he will remain only himself. He begs to send only children and brothers to his father and to let him remain only. Judah's only interest is in the safety of his brother and father. He is not the old brother who sold his younger brother Joseph to a merchant. Isn't this true repentance? What should we show to build a church like a church? Am I a person who sympathizes with the pain of others? Why don't I pray in a moment of despair? The core of Christianity is royal authority and governance, so what are we going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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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요셉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엎드리다:14
b.잘못을 추궁하는 요셉의 질문에 유다가 대답하다:15-16
c.요셉이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되어 남도록 판결하다:17
유다가 베냐민이 자신들과 동행해야 함을 말하다(18-34)
a.간청: 자신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다:18
b.보도: 두 번의 이집트 방문 과정을 설명하다:19-32
b1.형제들의 요셉과 대화:19-24
b2.형제들의 아버지와의 대화:25-29
b3.결론: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있나이다: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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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그에게(18a)
가까이 가서(18b)
가로되 내 주여(18c)
청컨대 종으로(18d)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18e)
고하게 하소서(18f)
주의 종에게(18g)
노하지 마옵소서(18h)
주는 바로와(18i)
같으심이나이다(18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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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내 주께서(19a)
종들에게 물으시되(19b)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19c)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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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20a)
내 주께 고하되(20b)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20c)
노인이요(20d)
또 그 노년에 얻은(20e)
아들 소년이 있으니(20f)
그의 형은 죽고(20g)
그 어미의 끼친 것은(20h)
그 뿐이므로(20i)
그 아비가(20j)
그를 사랑하나이다(20k)
하였더니(2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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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또(21a)
종들에게 이르시되(21b)
그를 내게로(21c)
데리고 내려와서(21d)
나로 그를(21e)
목도하게 하라(21f)
하시기로(2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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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922a)
내 주께 말씀하기를(22b)
그 아이는 아비를(22c)
떠나지 못할 찌니(22d)
떠나면(22e)
아비가 죽겠나이다(2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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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또(23a)
주의 종들에게(23b)
말씀하시되(23c)
너희 말째 아우가(23d)
너희와 함께(23e)
내려오지 아니하면(23f)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23g)
보지 못하리라 (23h)
하시기로(2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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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24a)
주의 종(24b)
우리 아비에게로(24c)
도로 올라가서(24d)
내 주의 말씀을(24e)
그에게 고하였나이다(2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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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25a)
우리 아비가(25b)
다시 가서 곡물을(25c)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2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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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르되(26a)
우리가 내려갈 수(26b)
없나이다(26c)
우리 말째 아우가(26d)
함께하면(26e)
내려가려니와(26f)
말째 아우가(26g)
우리와 함께함이 아니면(26h)
그 사람의 얼굴을(26i)
볼 수 없음이나이다(26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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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 우리 아비가(27a)
우리에게 이르되(27b)
너희도 알거니와(27c)
내 아내가(27d)
내게 두 아들을(27e)
낳았으나(2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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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내게서(28a)
나간고로(28b)
내가 말하기를(28c)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28d)
내가 지금까지 그를(28e)
보지 못하거늘(2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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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29a)
이도 내게서(29b)
취하여 가려한즉(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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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재해가(29d)
그 몸에 미치면(29e)
나의 흰머리로(29f)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29g)
하리라 하니(29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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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의 생명과(30a)
아이의 생명이(30b)
서로 결탁되었거늘(30c)
이제 내가(30d)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30e)
돌아갈 때에(30f)
아이가 우리와(30g)
함께하지 아니하면(30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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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31a)
아이의 없음을 보고(31b)
죽으리니(31c)
이같이 되면(31d)
종들이(31e)
주의 종 우리 아비의(31f)
흰머리로(31g)
슬피 음부로(31h)
내려가게 함이나이다(3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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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이(32a)
내 아비에게(32b)
아이를 담보하기를(32c)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32d)
데리고 돌아오지(32e)
아니하면(32f)
영영히 아버지께(32g)
죄를 지리이다(32h)
하였사오니(3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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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컨대 주의 종으로(33a)
아이를 대신하여(33b)
있어서(33c)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33d)
아이는(33e)
형제와 함께(33f)
도로 올려 보내소서(3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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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아이와(34a)
함께 하지 아니하고(34b)
내 아비에게로(34c)
올라 갈 수 있으리까(34d)
두렵건대 재해가(34e)
내 아비에게(34f)
미침을 보리이다(3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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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사랑_Love of Judah
유다의 간청_Judas' plea
유다의 자청_Judea's own re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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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자기희생적인 중재로 “형제사랑에 대한 시험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제가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지는 수고와 헌신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Judah's self-sacrificing mediation "watched the end of the test of brotherly love. Lord, let me live a life of hard work and dedication that takes over other people's burdens.
2026..5.20.wed. Clay
신학 비평//
교회는 왜 왕권을 말하면서도 서로의 짐은 지지 못하는가? 창세기 44장의 유다는 더 이상 과거의 유다가 아닙니다. 예전의 그는 동생을 팔아넘기고도 살아남는 길을 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남고, 동생을 살려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회심의 본질입니다. 회심은 단순히 눈물 흘리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던 존재”에서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되는 존재”로 방향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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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베냐민을 위해 말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붙들고 있습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30절)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성경은 인간을 결코 고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상처가 모두의 상처가 되고, 한 사람의 회복이 공동체 전체의 회복이 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처럼, 하나님 나라는 연결과 연합의 존재 방식 위에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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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병드는 이유는 구원을 지나치게 개인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내 은혜, 내 축복, 내 구원”만 남고, 타인의 짐을 대신 지려는 십자가적 감각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왕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는 군림이 아니라 자기비움의 통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고, 유다는 그 그림자를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다시 교회답게 세우는 힘은 화려한 프로그램보다 “유다 같은 사람”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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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아픔 앞에 계산하지 않고, 공동체의 균열 앞에 침묵하지 않으며, 대신 남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희생은 공동체를 억압하는 폭력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묶어주는 사랑의 매듭입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더 높으냐”가 아니라, “누가 대신 남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