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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연중 6주일
제1독서 : 예레 17,5-8
제2독서 : 1코린 15,12.16-20
복 음 : 루카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목헌장’은 “사회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이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이나 많은 이가 현금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의 가치는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금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가 매우 더럽다면 어떨까요? 또 구겨져 있다면?
만 원의 가치가 아니라 9천 원의 가치가 될까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러워도 똑같이 만 원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럽다면서 만 원 지폐를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만 원이 만 원인 것처럼, 나의 가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 원이 구천 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만 원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가치를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가 쓸모없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다 보면 자기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남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세상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 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 선언은, 현실을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 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째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머물러 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 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 맞추며 눈치 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 좌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 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 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15,19).
한번 마음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상태가 나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지금 배부르고 잘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은총의 상태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정진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내와 가난, 다른 이들에 대한 섬김, 사랑으로
위로의 길을 걷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참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증”(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예.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아니,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 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 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경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 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 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것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 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 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
그리고 복음이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에 나열한 처지에 반대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불행선언은 앞의 행복선언을 뒤집어서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해
초기 신앙인들이 첨가하여 남긴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 유다인들의 話法이었습니다.
행복선언은 하느님이 축복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의 대상인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
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현재 불행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축복하신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불행선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입니다.
부유한 이, 배불리 먹고 지내는 이, 웃고 지내는 이,
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이,
이런 이들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흔히 보람 있는 삶이라고 일컬어지는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최대 보람을 그런 것 안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길가에 잠시 피었다 시들고 없어지는
꽃 한 송이의 환상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하게, 배고프게, 울면서
또 남의 비난을 받으면서 불행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유한 것, 웃고 행복한 것, 잘되는 것을
곱게 보아주지 못하여 하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복음은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누리는 것으로 말미암은
집착과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권합니다.
그런 집착과 환상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 안에 멈추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어 행복한 것도
자기 자신을 넘어설 줄 알 때 가능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 먹는 것, 사람들의 칭찬 등에 심취한 사람을
사랑하지도, 친구가 되어 살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이웃을 사랑하지도, 이웃과 함께 있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사람을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구약성서」에 모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함께 계시믈 실천하며 살라고, 十誡命이라는 指針을 주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障碍를 벗어나서
함께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살라는 지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삶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자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배려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배려와 사랑 안에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힘들여 공부도 하였고, 일도 하였습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 부당하게 견제를 당하기도 하였고, 外面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터득하였습니다.
현명하게 사는 길은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고,
재물을 소유하고 남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없는 말이지만, 남을 제압하는 입장에 있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내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념 없이 우리 자신을 계발하는 데에 열중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시선은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도록 조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좁은 視野를 벗어나
하느님의 넓은 시야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시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새것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신앙인은 새로운 시야에서 새로운 실천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시야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부요하고 배불러서, 자기 한 사람 즐거워서,
자기 한 사람 칭찬 들어서 행복하다는 수준을 벗어난 시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야 안에 요구되는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새로운 실천은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을 당하여도,
그것을 최대의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넓은 시야에서 자기가 할 바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가난하고 굶주렸다고, 재물을 얻기 위해
혹은 배부르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많이 갖고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남을 속이지도 않고,
강자 앞에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曲學阿世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운 바를 왜곡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 즐기기 위해,
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대제관이나 로마 총독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强者로 군림하며 사람들의 讚辭를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시야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살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자기 한 사람 부유하고, 배부르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부유하지 말고, 배부르지 말며,
사람들로부터 늘 비난만 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 부유하고, 배부르고, 즐거울 것만
찾아 헤매다가 끝나는 허망한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인생은 타버린 재와 같이 한 때의 환상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예레미야서」는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뿌리내리는 강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이고,
우리의 실천은 그분의 축복과 은혜로우심을 개울같이 흐르게 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