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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7일 연중 6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창세 4,1-15.25
복 음 : 마르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인류의 첫 가정이 제2세대로 넘어오면서 죄의 모습은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집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카인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음]”(창세 4,7)을 암시할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첫 질문“너 어디 있느냐?”(3,9)는
이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물음이 보여 주는 발전 과정은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건너가는 자아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우를 죽임 것을 부인하고 오히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하고 되묻습니다.
아우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폭력으로 억울하게 고통받고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사라진 수많은 아벨들의 피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교회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 되었고,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2항)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는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면서도 죄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폭력으로 아우를 죽인 그를 또 다른 폭력에서 지키시고자 표를 찍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끝납니다.
우리는 각자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차장에서 일하는 소년이 열심히 차를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진짜 좋은 차를 타시네요. 선생님 차가 맞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차 주인은 “내 형이 선물로 내게 주었단다.”라고 대답하자,
소년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을까?”
차 주인은 이 아이가 차를 사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저도 그런 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받지 못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받으려고만 하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줄 것에 집중하면 그런 마음은 금세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때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주려고 할 때는 스스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욕심의 마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는 것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것만을 요구했던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놀라운 표징을 직접 보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음에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받을 것만을 요구하다가는 나의 변화 대신에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대로,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 가고 거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 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조욱현 토마 신부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군대에 가면 ‘사수와 부사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오랜 경험과 능력을 갖춘 군인입니다. 사수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사수는 이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신병입니다.
사수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부사수를 돌봐줍니다.
내무반 생활, 행정 업무, 외출과 외박에 대한 것을 알려줍니다.
사수가 있기에 다른 선임병들이 부사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수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부사수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수가 제대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수가 제대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배우면서 부사수는 진정한 사수가 됩니다.
저도 사수가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전입 온 부사수에게 업무를 가르쳤습니다.
간혹 사수 중에는 부사수를 괴롭히고,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 사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사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 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를 찾았습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입니다.
교황님이 방문하기 전에 람페두사 해변에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그 소식을 듣고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 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
신앙 안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삶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 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 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 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 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요구하지도 않고 요청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때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들은 그리 좋은 말들이 아닙니다.
‘논쟁’, ‘시험’, ‘요구 이런 표현들인데 바리사이들이 흔히 하는 짓입니다.
이 대신 그러니까 논쟁 대신 담화 또는 나눔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험하지 않고 믿으면 얼마나 좋고,
믿지 못하더라도 시험 대신 알려고 애쓰고 질문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을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랬다면 주님도 그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고 표징을 보여 주셨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우리가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감히 요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하늘에서 표징이 너무도 필요할 때
표징을 주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아주 겸손하게 청을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도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내친김에 이런 묵상과 성찰도 합니다.
하느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에게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면 얼마나 좋을까?
겸손은 사랑을 낳고 사랑을 초대합니다.
겸손한 요청은 사랑의 응답을 부릅니다.
아기의 요청이 언제나 엄마의 사랑스러운 응답을 부르듯
겸손한 사람의 요청은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응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갈등과 싸움이 없는 것은 덤입니다.
‘구’를 ‘청’으로 하나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시험과 요구에 응답은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방인의 땅에서 4,000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다.(8,10)
달마누타(Dalmanutha)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갈릴래아 호수 서쪽 포구 막달라일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대목에서 마태오 복음은
예수께서 마가단(Magadan)으로 배를 타고 가셨다(15,39)고 했는데,
이 또한 맏달라와 같은 지명이다.
막달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하다.(루카 8,2; 마태 17,56; 요한 19,2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타(막달라)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청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인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만한 기적’이었다.
이는 곧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증명해 줄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종말에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를 증명할만한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출애 16,1-36)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여호 10,12-14),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의 대결에서
제단 위에 내린 야훼의 불길(1열왕 18,30-40) 등과 같은
하늘에서의 표징으로 예수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우주적 이변들’로 표현한다.(묵시 12,1.3; 15,1)
지금까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이 어디 한 두 개인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예수의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이 이제 와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표징을 청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데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아직까지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표징을 청하는 무리한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예수께서 하늘의 표징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이 ‘믿음을 위해서’ 표징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험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야훼께서 직접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고 하셨고,
모세도 백성들에게 “야훼를 시험하지 말라”(출애 17,2)고 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걸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마태 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속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특히 “나는 분명히 말한다.”(12절)는
공관복음 모두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어법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다음에는 통상 앞에 서술된 내용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확신과 진실성’, 또는 ‘더 높은 단계로의 진행’ 등의 말씀이 따른다.
시험과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없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려둔 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표징이란 요구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善射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자기가 믿는다는 하느님께 조건을 걸고 선물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나도 저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부 다짐이다.
이것은 신앙을 놓고 거래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 다짐을 보고 조건을 승낙할 수도 있지만,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영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