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이 만나는 김제의 초가을 풍치
◆ 가을의 서정, 모악산과 금산사
김제 여행의 포인트는 모악산의 금산사와 귀신사, 만경평야(김제평야)와 심포항, 그리고 귀로에 벽골제에 들르는 일정이다. 잠자리는 모악산이나 심포항에 잡는다.
김제땅이 보여주는 가을 서정은 모악산(母岳山)에서 절정을 이룬다. 모악산은 예로부터 어머니의 산으로 불려왔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모악산의 꼭대기에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엄뫼’ 또는 ‘모악’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엄뫼’는 높고 큰 산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순 우리말이던 산 이름이 한자로 바뀌면서 ‘모악’이 됐다. 모악산은 그 이름만큼이나 부드러운 산이다. 산에 깃든 사연도 사연이려니와 이 산 기슭에는 호남 제일의 고찰 금산사가 자리잡고 있다.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에 세워졌다는 설과 법흥왕 1년에 창건됐다는 유래가 있으나 확실치 않고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갇혀 지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문화재는 단연 미륵전(국보 62호)이다. 일주문과 금강문, 보제루를 거쳐 절 마당에 들어서면 거대한 규모의 3층 법당이 위용을 드러낸다. 겉보기에는 3층이지만 내부가 하나로 트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금산사 주차장을 기점으로 심원암을 거쳐 모악산 정상까지는 약 5.3㎞,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온갖 산(山) 생명들이 길동무가 돼 준다. 허위허위 정상에 오르면 드넓은 김제평야와 그 한가운데로 흐르는 만경강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고 전주시와 운장산도 어슴푸레 보인다.
◆ 서해를 품에 안은 망해사와 심포항
귀신사를 둘러보고 금산사 입구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타고 김제시내로 나온다. 시내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10㎞쯤 남진하면 심포항의 입구인 만경읍에 닿는다. 심포항으로 가는 길가 언덕에 있는 망해사에 잠시 들러본다. 망해사(望海寺)는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고즈넉한 절집이다.
백제 의자왕 2년 부설거사가 이곳에 와서 사찰을 지어 수도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거개의 절이 그렇듯이 망해사도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는 등 현대적인 모습이다. 다만 주지승이 거처하는, ‘해 지는 서쪽을 즐긴다’는 뜻의 낙서전(樂西殿)은 고풍스럽다. ‘할배나무’와 ‘할매나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절 앞마당의 팽나무 두 그루와 범종각은 바다를 벗 삼아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하다.
망해사는 낙조 명소로도 이름값을 한다. 해질녘 잔잔한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빛은 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망해사 뒤편의 진봉산(해발 72미터) 전망대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망해사에서 소나무 도열한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둑판 모양의 만경평야와 심포항 앞바다가 그림처럼 다가선다.
심포항은 예로부터 각종 해산물이 넘쳐났던 곳으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백합의 주산지이다.
‘김제는 몰라도 심포는 안다’는 말도 있듯 김제 사람들에게 심포는 관광지면서 둘도 없는 생계의 터전이다. 심포항 앞에 펼쳐진 개펄은 가까운 진봉면 거전리 개펄과 함께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은 썰물 때면 최장 20여 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개펄이 시야에 드러난다.
심포에서는 개펄에 들어가 갈쿠리로 백합, 꼬막, 바지락, 동죽, 맛조개 등을 캐내는 아낙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네들은 한 손은 갈쿠리로 뻘 바닥을 부지런히 긁고 다른 손으로는 연신 꼬막과 백합을 건져 올리는데 1시간이 넘도록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다. 이곳 사람들은 개펄을 ‘생금밭’이라 부른다. ‘살아서 움직이는 금(金)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금밭도 해가 갈수록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곳에 대규모 공사(새만금 방조제-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군산시 비응도를 연결하는 국책사업)가 진행되면서 기름진 개펄이 조금씩 생명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심포 앞바다에서 나는 백합(생합)은 크기에 따라 대합, 중합 두 가지가 있는데, 백합죽이나 싱싱한 횟감으로 인기가 좋다. 특히 백합죽은 백합을 삶아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이곳의 특산물인 김제 쌀을 앉힌 다음 삶아낸 조갯살과 참기름을 넣고 푹 끓여내는데 백합 고유의 향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백합죽은 여성들의 건강식으로도 좋은데 핵산, 철분, 칼슘이 풍부해 빈혈과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적이라 한다. 심포항에 백합회를 맛볼 수 있는 횟집이 많이 있다.
◆ 아득한 푸른 벌판, 벽골제와 지평선
김제는 무엇보다 도작문화(稻作文化)의 발상지로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곡창지대를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무려 6천 9백만 평에 달한다. 들판이 오죽 넓었으면 ‘징게 맹게 외얏밋들’(김제 만경 너른 들)이란 말이 나왔을까 싶다. 큰 곡창지대만큼이나 수리시설 또한 거대해서 벽골제(碧骨堤, 사적 111호)는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로 꼽힌다. 이 저수지는 선조들이 벼 재배에 들인 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농경유적으로, 김제시 부량면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둑이다.
저수지를 만들고 물길을 열어 오직 땅과 함께 살았던 농군들의 혼은 1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김제평야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에게 김제평야에 가보라고 하는 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쪽빛 하늘과 가없이 펼쳐진 녹색 들판을 바라보며 혼탁해진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좋겠다. 인공 구조물들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 지평선이 보여주는 순수의 빛은 한 줄기 시원한 청량제다.
김제시 광활면은 이름 그대로 ‘광활한’ 땅이다. 마치 몽골의 대초원을 연상케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이 없는 유일한 면(面)이다. 실제로 성덕면 심평리에서 광활면 창제리까지 들을 관통하는 논둑길만 장장 15㎞에 이른다. 광활 들은 1925년 대규모의 간척공사로 갯벌이 바뀐 땅이다. 그 당시 간척공사는 사상 최대 규모여서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논둑길답게 자동차로 20분이 걸린다. 또한 이곳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한데, 선생은 ‘그 끝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라고 표현했다. 옥토로 이름을 날린 김제는 식민지 시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노략의 대상으로 삼은 땅이다. 소설 <아리랑>에도 일본인 하시모토가 등장하는데 그가 사용했던 사무실이 죽산면에 있다. 벽골제 앞 광장에 <아리랑 문학비>가 서 있다.
농경사회의 여러 유물들을 한데 모아놓은 수리민속박물관에도 들러보자. 4개의 전시실에는 벼농사와 관련된 수리시설의 변천과정과 1,70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둑을 쌓고 물을 가둔 벽골제의 축조 과정을 모형으로 제작 전시하고 있다.
벽골제 맞은편에는 조정래 아리랑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작가의 육필원고· 취재수첩· 애장품· 자화상 등 350여 가지 물품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 바로 뒤에는 폐교를 활용해 만든 창작스튜디오가 있다. 도예가와 서예가들이 작업실로 쓰고 있는데 단체 예약 방문 시 체험도 가능하다.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063-540-3934).
▶ 여행수첩(지역번호 063)=호남고속도로 금산사 나들목으로 빠지면 금산사 가는 이정표가 잘 돼 있다. 김제에서 712번 도로를 타면 금산사로 갈 수 있다. 김제에서 금산사행(원평)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40분 소요. 김제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6km쯤 남진하면 벽골제다. 서해안고속도로→서김제 나들목→삼거리 우회전→29번 국도 만경 방향→만경고 삼거리→좌회전→702번 지방도 심포항 방향→망해사. 심포항은 망해사를 지나쳐 직진하면 된다. 지평선 드라이브: 벽골제-죽산-광활면-심포항.
▶ 잠자리와 맛집=모악산(금산사) 쪽에 모악산유스호스텔(548-4401), 동원장(548-4300), 모악산장(548-4411), 제일장(548-4115), 김제시내에 지평선모텔(545-7771), 벽골제모텔(545-7772), 심포항 주변에 사보이장(544-6790), 심포장모텔(545-1662) 등이 있다. 벽골제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호스텔 포유(543-2177)는 호텔급 수준의 깨끗한 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4만-6만원(조식 포함). 심포항에 있는 신선횟집(543-6557), 지평선횟집(548-4000), 연서횟집(543-1900)에서 백합 요리(백합회, 백합탕, 백합구이)를 맛볼 수 있다. 금산사 입구에 산채백반을 내놓는 집이 많다. 광주회관(548-4038), 호박정(548-0861), 진미식당(548-0829) 등. 김제시내에 있는 반야돌솥밥(544-8220)은 만경평야에서 재배한 쌀에 대추, 콩이 들어가 맛깔스럽다. 김제 시청 인근의 매일회관(542-7345)은 20여 가지의 반찬이 나오는 백반집이고, 시내 수협 옆의 변산온천산장바지락죽(546-3939)은 바지락죽으로 유명한 변산온천산장의 김제 분점이다. 바지락정식을 주문하면 바지락전, 바지락죽, 초밥, 백합구이, 조개구이 등이 나온다. 총체보리 한우촌(543-0076)은 무농약으로 재배한 총체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사료를 먹여 키워 한우 본래의 맛이 살아있는 곳이다. 꽃등심 1만 8000원. 모악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540-3539), 금산사(548-4441), 김제역(542-7788), 김제고속버스터미널(544-0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