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8.6.16 정주영 소떼 방북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름의 선두에 서는 사람은 있다. 그가 반드시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또는 절대로 선량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 의지와 재기는 다른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어깨를 빌리고 손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언젠가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 듯 싶은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넣은 사건이나 살인적인 파업 진압과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의 경험을 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이름이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한강 인도교 재건부터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서산 간척, 자동차 생산, 조선소 건설 등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선명하게 내걸려 있다. “그 사람의 공이냐? 그 밑에서 뼈빠지게 일한 사람들의 공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 수태 고생시키고도 아무런 변화도 일궈내지 못한 사람들은 더 많다. 그 정주영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사업은 다름아닌 서산 간척 사업이었다고 한다. 유조선까지 끌고 와 초속 8미터로 흐르는 바닷물을 막고 만든 간척지에서 그는 대한민국 최대의 농토를 일궜다. ‘노망의 세월’ 즉 세금을 뜯기느니 내가 정권 잡겠다고 일생 최대의 도박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다가 뜨거운 맛을 보고 바짝 엎드렸던 1992년 겨울 이후 그가 찾은 곳도 서산 농장이었다. 어쩌면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릿 오하라의 대사를 되뇌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땅이다. 땅은 영원하니까!”
“타고난 농사꾼이었던 그는 세심하게 작황을 살폈다. 제대로 추수가 안된 곳이 눈에 띄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직원은 “한번은 그가 B지구의 풀 속에서 추수가 안된 보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농사꾼이 어디 곡식을 남겨두는 법이 있느냐’며 내리 30분 동안 혼이 났다. A지구에 가서 무논에 벼 포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야 화가 누그러졌다”라고 말했다. 윤석용 영농작업부장은 “그분은 곡식을 무척 아꼈다. 벼를 뽑아 보고 뿌리의 생육 상태를 본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심어 놓게 했다. 이삭을 세어 볼 때도 모가지를 뽑았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2000.11.30) 뿐만 아니라 “시험 영농이 있었던 1985년부터 15년 동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에 전화로 ‘영농 현황 보고’를 받았다. 장비들의 작업 위치가 어디인지, 송아지가 새로 몇 마리나 태어났는지, 논에 물은 충분히 차 있는지, 그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어 물었다”고 하니 그 정성은 지극하다는 형용사만으로는 수식하기 어렵다.
이 땅에 대한 집착은 그가 바로 이 땅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트라우마일지도 몰랐다. 그 자신 “서산농장의 의미는, 수치로 나타나는, 혹은 시야를 압도하는 면적에 있지 않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노동자들의 요구를 짓밟고 때로는 야만적인 탄압도 서슴지 않았던 그였지만 적어도 서산의 간척지만큼은 자신의 이(利)를 위해 낭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미 꿈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1989년 그는 북한을 방문했다. 1932년 아버지 소 판 돈을 들고 고향을 뛰쳐나온 이래 57년만의 귀향이었다. 휴전선 바로 이북, 북한의 최남단이라 할 전선 이북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미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가던 북한의 강원도 오지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나일론 옷가지로 추위를 가리며 이빨을 부딪치던 친척들에게 옷가지를 내놓은 그는 고향과 이별하면서 숙모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주고 온다.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음에 와서 입게.”
그리고 9년 후 그는 다시 고향을 찾는다. 1998년 6월 16일. 서산 농장에서 기른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였다. 워낙 새벽반이었던 그의 집 앞에 꼭두새벽부터 아니 거의 밤을 새운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정주영도 상기돼 있었다. “돼지꿈 꿨어!” 승용차를 타고 500마리의 소떼를 태운 트럭의 선두에서 달리면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 시절부터 해방과 분단, 전쟁과 재건, 민주화와 노동과의 대결 그 전 과정이 슬라이드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기자들 앞에서 읽어내린 그의 소감문은 사뭇 감동적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 발음이 새는 그의 목소리가 더 떨려 나왔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의 소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는 이후로도 소 501 마리를 더 보냈다. 도합 1001마리. 1000 플러스 하나. 왜였을까. 그건 정주영의 다짐이었다. 딱 떨어지는 1천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한 마리를 더 넣어 그 이후로도 계속 지원과 교류가 이어지리라는 다짐이었고 기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임신한 소들을 집어넣었다고 하니 사실은 1001마리보다 더 많은 소들이 북한 땅에 갔던 셈이다. “차라리 저 소가 되고 싶다”고 울먹이는 실향민들을 지나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 기존의 삭막함을 지웠던 판문점을 거쳐, 요즘 그 격 때문에 문제가 된 ‘조평통’ 부위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정주영은 북으로 갔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은 그의 인생 최고의 이벤트를 창출해 냈다. 지금 변모같은 자들이 보면 영락없는 ‘종북좌파’이며 동작구에서 국회의원하고 있는 정주영의 아들도 ‘종북좌파’라고 불러마지 않을만한 행동을 그는 감행했다. 저 나쁜 놈들에게, 좀 있으면 망할 놈들에게 소 1001마리를 보내고 금강산 사업을 약속하고 개성공단을 설득하고 전범(戰犯) 김정일과 기념사진을 찍고 고무 찬양까지 했다. 하물며 북한에는 ‘정주영 체육관’이 남아 있다. 요즘 어떤 이들의 눈에 세상에 이런 종북좌파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찌그러진 시선이 난무하는 2013년 오늘, 1998년 6월 16일을 돌이켜 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한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첫댓글 그때부터 북한에 퍼주기가 시작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