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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스승과 그냥 스승은 다르다.
대승불교의 근본스승은 무엇보다도 (크나큰 이타의)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가 갖추어진 기본에, 출리심을 비롯하여 경율론 삼장[교법]과 계정혜 삼학[증법]에 대한 뛰어나야 하고, 그 인연이 직접적으로 나와 밀접해야 한다. 그리고 근본스승은 한 분만 모시는 것이 아닌 여러 분을 모실 수록 나에게 더더욱 큰 도움이 된다. 위대한 인도의 스승이셨던, 아띠샤 디팡까라 쉬리즈냐나께서는 그분이 모신 근본스승만 150여명이 넘는다고 했고, 선재동자 또한 53분의 선지식을 근본스승으로 모셨다.
이곳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모임의 근본스승님은 금타스님과 청화스님이시다. 비록 두 분의 육신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시지만, 스승들께서 남기신 부처님법의 가르침은 현재까지 경주 법사님을 통해서 전해져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두 분의 가르침을 경주 법사님께서 온전하고 여법하게 전하시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 즉, 경주 법사님은 곧 금타스님과 청화스님의 나툼으로 믿고서 공부해야 한다!
근본스승은 현교(한국과 같은 대승 바라밀교), 그리고 밀교에서 모시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
현교에서는 스승을 '부처님처럼' 섬긴다. 그리고서 5도와 10지에서 8지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스승을 '부처님으로' 모시며 나의 모든 것을 공양올려야 한다. 그리하여 8지서부터 시작하여 부처의 경지를 도달하기 위해 소지장을 완전히 제거한다. '부처님처럼'과 '부처님으로'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로 어머어마하다!
현실적으로 한국 불교는 청화큰스님 이후로 근본스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착각)일까? 오직 선불교만을 올인했다가, 빠알리 전통의 니까야 불교(해탈과 열반의 경지인 아라한을 지향하는 유부/경량부)와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전통의 (이타의 보리심으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쌓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완전히 여의어 마침내 부처를 이루려는, 문수/미륵보살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날란다 정법을 계승한 티베트 불교에 눈과 마음이 뜨이고서 느낀 직감이다. 즉 한국 불교라는 우물 안에서, 우물 밖으로 나오니 너무나 달리 보여지는 것은 최소한 전혀 이상한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사주명리 상담 접수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하'하고 잘 알려진 유명한 사찰의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 중이신 어느 스님에게 고민상담이 왔는데, 그 스님의 고민 내용이 현재 그 선원의 방장급 스님이 주관하는 경전 공부 모임에서, 그 방장급인지 주지스님인지 여하튼 그 사부대중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실세급 스님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기에 매우 불편하고 괴롭다며 그 분과 원래 잘 맞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문의한 것이었다. 고민 상담을 요청한 스님은 조계종단에 소속된 스님인데 미안마에서 니까야 경전을 공부하셨던 분이셨는데, 사주를 풀어봐도 머리가 보통 비상한 분이 아니었다. 거의 니까야 경전을 외우다 싶을 정도로 어떤 내용이 어느 니까야에 있는지를 잘 아는 스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은 그렇게 니까야 경전에 해박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들과의 대중 속에서 처신하는 인간관계나 처신 등 지혜로움은 떨어지는 분이었다. 니까야 공부를 하시는 분들의 특징이 니까야가 부처님 원음이다보니 오직 니까야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강한 고집에 의해 다른 대승경전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복덕자량도 많이 부족한 분이셨다. 그래서 그 스님께 여쭈어 봤다.
"스님께서는 방장스님을 비롯한 같이 공부하는 도반스님들보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 경전을 매우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방장스님을 비롯한 사부 대중 스님들이 당황하거나 어려워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에 말씀을 조리있게 잘 하십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현재 사향사과 중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스님께서는 아무리 경전을 독파하신다 할지라도 그 전에 복덕자량을 쌓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님께서는 목숨을 내놓을 정조의 부처님으로 모시는 근본스승이 계십니까?"
그 스님은, 은사과 계사는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근본스승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문사는 되었을지라도 수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즉, 근본스승이 없거나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절대 공부의 진척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라 할지라도 근본스승이 없이 배우는 경전은 스승에게 경전의 가르침을 구전받는 공덕보다 100분의 1 또는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20대와 30대에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틈만 나면 공부에 눈을 밝혀왔다. 직장에서도 점심시간에 혼자 빠져나와 직장 근처의 포교당에서 점심시간에 1080배를 하고, 퇴근 후에는 금강강독회를 나가거나 혼자 논서를 보거나 또는 서대문 옥천암의 야외에 보도각백불 앞에서 또 최소 500~1080배 이상의 절과 염불을 해왔다. 주말에는 금강정진회나 또는 길상사와 화계사 도봉사, 심지어 해운정사까지 오고가며 철야 참선 정진과 동시에 최소 2000배 이상을 하면서 남들에게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괴로움과 갈등을 이겨내고자 업장소멸 발원을 간절히 했다. 꿈에서는 지장보살님이 나타나고 청화스님께서 무섭게 야단치고 오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등등 현몽들은 참으로 많이 꾸었는데다, 나와 주변인들의 전생과 더불어 간혹 가까운 사람들의 앞날의 일들까지 예지가 보이는 등등, 믿기 어려운 체험들도 조금(?)은 했으나, 정작 중요한 것! 나의 마음 안밖으로 수행이 발전되어 진짜 뭔가 변하는 것이란 거의 없다 싶이 했다. 뭔가 집중된다 싶으면 가정과 주변인연들 심지어 금강정진회 내에서 일부 도반들 중에서 불편한 역경계가 찾아와 아래로 미끄러져, 다시 진심과 치심으로 얼룩지는 것이 수없이 반복되기에, 수행에 대한 회의감과 허망함을 느끼가 일수였다. 그리고 정작 궁금해 미칠것만 같은 경율론의 의문점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스님이나 불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 중에서는 나의 질문과 생각이 이상하다며 폄하하고 가르쳐들려는 무례한 사람들도 있어 자존심도 적지 않게 상해,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올라 눈을 부릎뜨고 따지고서 멱살 잡고 두들겨 패고 싸우고 싶었지만, 불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에 속에서 배알이 꼬이고 뒤집혀지더라도 참고 참으며 또 참은 적이 한 두번이 않이었다.
도데체 왜 나의 수행이 발전되지 않고 자꾸 미끄러지고 곤두박질 하듯 역경과 경계가 많은 것일까? 수행을 하면서 왜 좋은 일은 하나도 안 생기고 오히려 역경계들만 닥치고 찾아오는 것일까? 왜 수십만 배 이상을 하는데 가정은 기울어지고 아버지는 8년동안 중환자실을 안방처럼 드나들며, 이로인해 나의 어깨는 더더욱 무거워지며, 수행이나 일상생활이나 모든 것들이 전부 꼬이고 뒤집히며 나쁘게만 전개되는 것일까?
결국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어느날 티베트의 대선지식께서 한국에 오셔서 한 달 동안 현교와 밀교에 대한 법문을 찾아가 들었을때, 내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대승불교에 대한 수많은 의문점들, 누구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그 궁금증이 묻지도 않았는데, 법문 중에 내 마음을 아시고서 설명하시듯, 폭포수처럼 마구마구 터지듯이 흘러나오고, 그 궁금증이 모두가 해결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피부와 모든 털이 삐죽 선 듯한 전류감과 동시에 불자로서 그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던 환희의 눈물이 뚝뚝뚝 흘려내렸다. 그리고 변하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변하지 않았던 원인, 그 원인은 두 가지였다. 바로 내 마음에 간절하고 진실된 '근본스승'에 대한 인연과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오랜 세세생생부터 저지른 나의 아만과 교만 및 거만이라는 악업 때문이었고, 근본스승에 대한 인연복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바로 내가 박복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불교는 선불교이다. 오리지널 인도/티베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중국서부터 그 왜곡됨이 적지가 않은 것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문사수와 육바라밀을 말로는 자주 하지만 그 정의와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아는 스님들이나 신도들은 많지 않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보리심'에 대해서 단지 '깨달음의 마음'이라고 잘못아는 불자들이 태반일 정도인데다, 소승과 대승, 아라한과 부처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정말로 많지 않다. 우물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한국 불교 밖에서 나오면 얼마나 한국 불교가 부실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지 눈에 선하다. 그리고 좋은 텃밭에서는 좋은 작물이 나오고 그렇지 않은 텃밭에서는 좋은 작물을 결코 기대할 수가 없듯이, 한국에서 과연 진정한 근본스승이 금타스님이나 청화스님 이후에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정말 제2의 청화스님이 나오길 간절히 발원한다.
문사수와 육바라밀을 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 기초를 다지는 '예비 수행'이라는 것을 마스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유식 5도에서의 '가행도(십신/십주/십행/십회양)' 단계이자 삼사도 중에서 하사도(이번생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예비 수행 단계)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근본스승을 찾고 의지함으로서 생기는 이득은 다음의 8가지가 있다.
①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와 가까워지는 이득.
②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부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득.
③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악지식에게 해침을 당하지 않는 이득.
④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번뇌와 악행이 모두 저절로 사라지는 이득.
⑤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오도와 십지의 수행이 증장되는 이득.
⑥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세세생생 선지식과 만나게 되는 이득.
⑦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이득.
⑧ 근본스승을 의지하여 일시와 궁극의 모든 뜻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이득.
근본스승을 찾고 의지하지 않거나 의지하고 나서 비방하여 짓는 허물(죄)은 다음의 8가지가 있다.
① 근본스승을 비방하면 일체 부처님을 비방하는 허물.
② 근본스승에게 분심을 가지면 쌓은 공덕이 사라지고 지옥에 태어나는 허물.
③ 밀교에 의지하여 수행하더라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는 허물.
④ 지옥의 길을 닦는 것과 같은 허물.
⑤ 깨달음을 새롭게 얻지 못하고 얻은 것마저 없어지게 되는 허물.
⑥ 이번 생에 병들고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기는 허물.
⑦ 세세생생 삼악도를 돌고 돌게 되는 허물.
⑧ 세세생생 스승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허물.
근본스승을 직접 옆에서 오래오래 시봉하며, 문사수를 수습하지 않고서,
혼자서 책을 보고 사유하며 집중명상(사마타)를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수행에 진척을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근본스승 없이 책을 보거나 명상을 해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생에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99.9%는 불가능하고 거짓말일 뿐이다!
모든 수행의 시작은 반드시 8유가 10구족을 갖추고, 반드시 예비수행을 거쳐야 한다. 그 첫 시작은 바로 근본스승을 모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후부터 문사수가 시작되고, 온전한 계향이 이루어진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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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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