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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의 천리[千里] 변[邊]을 지나 열하[熱河]를 굽어보며 제[第] 1[一]
명[明]과 청[靑]나라의 도읍지[都邑地]였던 연경[燕京], 그리고 청[淸]나라 황제[皇帝]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열하[熱河]는, 오늘날, 지금의 북경[北京]과 승덕[承德]에 있다.
그들은 지금 이곳이, 명[明]과 청[淸]의 북경[北京]이며, 청[淸]의 열하[熱河]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러한 짓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얄팍한 수작[酬酌]과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북경[北京]과 열하[熱河]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설명[說明]는 내용[內容]과는 정면으로 배치[背馳]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치[一致]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연경[燕京]과 열하[熱河]는, 지금의 북경[北京]과 지금의 열하[熱河]와는 전혀 다른 지역[地域]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금[古今]의 역사[歷史]와 부합[符合]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수 [數] 천년[千年] 동안 이어 내려오는 각종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과 어긋나고 배치[背馳]된다는 것은, 한줌의 실오라기 같은 진실[眞實]은 티끌만큼도 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들어내고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연암[燕巖] 선생이 열하[熱河]로 가던 도중, 심양[瀋陽]에서 묵을 때, 심양[瀋陽]은 본시 청[淸]이 일어난 터전이어서, 동[東]쪽으로 영고탑[寧古塔]과 맞물리고,瀋陽 乃其始興之地。則東接寧古塔,
북[北]으로는 열하[熱河]를 끌어당기며,北控熱河, 남[南]쪽으로는 조선[朝鮮]을 어루만지고, 南撫朝鮮,
서[西]로는 향하는 곳마다 감히 까딱하지 못하니, 그 근본[根本]을 튼튼히 다짐이 역대[歷代]에 비하여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西向而天下不敢動。所以壯其根本之術。非歷代所比故也。라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심양[瀋陽]의 모습이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대로 심양[瀋陽]은 요동[遼東]의 대야[大野]에 자리 잡고 있다. 동북[東北]으로 장백산[長白山]을 바라보고, 서북[西北]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바라본다.
심양[瀋陽]은 청[淸]나라의 성경[盛京]이었으니, 엣 광영[光榮]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 그 옛날 화려했던 성경[盛京]의 일면[一面]을 보는 듯 하다.
당시[當時] 조선[朝鮮]에서, 만리[萬里] 여정의 열하[熱河]를 다녀온 연암[燕巖]의 기록[記錄]은 실로 방대하다.
연암[燕巖]이 남긴 기록[記錄] 속에는, 당시[當時] 청[淸]나라의 현실[現實]과, 청[淸]나라의 열하[熱河]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중요[重要]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담고 있다.
청[淸]나라의 열하[熱河]는 청[淸]나라가 망[亡]할 때까지 막북[漠北]에 있었다. 그리하여 열하[熱河]대한 기록[記錄]은, 그 이름도 막북행정록 [漠北行程錄]이다.
역사[歷史]에 수 없이 많이 기록[記錄]된 막북[漠北]은, 글자 그대로 사막[沙漠] 또는 대막[大漠]의 북[北]쪽 지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을 사이에 두고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를 마주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연행록[燕行錄]에서, 강[江]을 건너 북경[北京]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벌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인 용만[龍灣]의 구룡연[九龍淵] 입구이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남긴 기록[記錄]대로, 산하[山河]가 장려하고 웅장[雄壯]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으로부터 서남[西南]쪽에,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구룡연[九龍淵]이 있는 이 산[山]의 천[千]길 절벽[絶壁]위에, 통군정[統軍亭]이 천리[千里]의 산하[山河]를 굽어보고 있다.
이것이 통군정[統軍亭] 이다.
통군정[統軍亭]에 대한 기록[記錄]과 압록강[鴨綠江]을 설명 하려면, 짧게는 하지 못한다. 참고삼아 소개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통군정[統軍亭],
임사홍[任士洪]의 기명[記名]에, 주성[州城]이 압록강[鴨綠江]에 임하였으니, 그 북[北]은 여진씨[女眞氏]의 지역이고 그 서[西]쪽은 중국[中國]의 경계[境界]이다.
섬들이 둘러 있고 언덕과 산[山]이 높고 험[險]하며 대창, 소창, 송골이라는 여러 산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층층[層層]이 나타나고 겹겹이 보여 중화[中華]의 산하[山河]와 성곽[城郭]의 장려[壯麗]함을 연상할 수 있는데,
바로 주[州]의 북[北]쪽에 산[山]봉우리가 뾰죽이 서 있어서 사방[四方]에 통하여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위에 정자[亭子]가 있어 통군[統軍]이라 하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누가 이름 지었는지는 모른다. [중략]
멀리 호산[胡山]이 바라다 보이는 통군정[統軍亭],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통군정[統軍亭]은 지붕 모양이 우산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도 지붕 모습은 옛 기록[記錄]대로, 같은 모양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登統軍亭。是亭正壓燕遼之界。莽蕩奇壯。非他樓閣之比 [중략]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이 정자[亭子]는 연경[燕京] 지방과 요동[遼東] 지방을 바로 누르고 있어 넓고 기이[奇異]하고 웅장[雄壯]함이 다른 누각(樓閣)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중략]
저 아래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압록강[鴨綠江]의 구룡연[九龍淵], 압록강[鴨綠江]의 용연[龍淵]]은 천하[天下]의 장관[壯觀] 이었다.
통군정[統軍亭]이 팔로[八路] 중에서 으뜸이라고 한 말은, 누구든 이곳에 와서 사방[四方]을 한번 둘러보면, 옛 선조[先祖]들의 기록[記錄]과 더불어 실감[實感]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압록[鴨綠]이 천참[天塹]이라고 한 말은, 하늘이 내린 천하[天下]의 지세[地勢]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연도기행[燕途紀行]
日晩。偕同伴登臨統軍亭。山河雄壯。氣象萬千。荒野茫茫。逈接碧空。三江交流。限隔南北 [중략]
늦게 동행들과 통군정[統軍亭]에 올라가 보니, 산하[山河]가 웅장[雄壯]하여 그 기상[氣像]을 형언할 수 없으며, 황야[荒野]는 아득하여 멀리 벽공(碧空)에 닿았는 듯 하고, 세 강[江]은 교류[交流]하고 남북[南北]으로 경계[境界]가 막혀 있었다. [중략]
倚欄四望。浩浩蕩蕩。向者百祥,練光。眞兒戱耳。諺傳統軍亭爲八路中元戎。果是的論。然近接胡地。景象陰慘。令人愁絶 [중략]
난간[欄干]에 의지하여 사방[四方]을 바라보니, 너무나 호탕[浩蕩]하여, 전번에 본 백상루[百祥樓]나 연광정[練光亭]은 참으로 어린애 장난감과 같았다.
사람들이 전[傳]하는 말에, 통군정[統軍亭]은 팔로[八路] 중에서 으뜸이라 하더니 이것이 과연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호지[胡地]에 근접[近接]되어 있어 경상[景象]이 음참[陰慘]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을 짓게 한다. [중략]
연행일기[燕行日記]
산천 풍속 총록[山川風俗總錄]
自渡江至北京。地皆沙。自入遼野。往來車馬益多。沙益細。乍風輒揚。狀若烟霧。後人不見前人 [중략]
강[江]을 건너 북경[北京]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이다. 요동[遼東]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거마가 더욱 많아지는데 모래 또한 더욱 가늘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안개처럼 휘날려 뒷사람이 앞사람을 보지 못한다. [중략]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 바로 앞을 흐르는 압록강[鴨綠江]이다. 이 강[江]을 건너면, 요동[遼東]이 시작된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기순[祁順]의 시[詩]에,
낙랑[ 樂浪]의 나뉜 지경[地境] 요[遼]까지 닿았는데, 이 한 강[江]이 가로질러 길고 멀리 푸르구나. [중략]
심양[瀋陽]은 장백산[長白山]의 서남[西南]쪽 지대인 요동[遼東]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대[歷代]의 사서[史書]들은, 모두 그렇게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연행[燕行]의 기록[記錄]에서,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에서, 강[江]을 건너, 서남[西南]으로 내려와 요동성[遼東城]을 거쳐, 북[北]쪽으로 길을 잡아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의 항공촬영[航空撮影] 전경이다. 강[江]을 건너면 요동[遼東]이다.
그들은 지금, 조선[朝鮮]의 의주[義州]를, 포이진현[布爾津縣]으로 부르는데, 의주[義州]의 별칭[別稱]인 포주[抱州]를 글자만 바꾸어 놓았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契丹,始設弓口門欄于抱州城東野
거란[契丹]이 처음으로 궁구문란[弓口門欄]을 포주성[抱州城] 동야[東野]에 설치하였다. [중략]
도곡집[陶谷集]
連山關次書狀韻
연산관[連山關]에서 서장관의 시[詩]에 차운하다.
요양[遼陽]의 풍물 우리나라와 비슷하니 遼陽風物近吾邦
동쪽 구름 바라보며 홀로 창에 기대노라. 回首東雲獨倚窻 [중략]
꿈속의 넋은 변방[邊方]에 가로막힘 알지 못하고 魂夢不知關塞隔
밤이 오자 날아서 포주[抱州]의 강[江]을 건너노라. 夜來飛度抱州江
抱州義州號
포주[抱州]는 의주[義州]의 별칭[別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근[權近]이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아 지은 시[詩]에,
변방[邊方] 고을 쓸쓸한데 나무 늙었고, 한 줄기 장강[長江]은 요양[遼陽]을 가로막았네. [중략]
월사집[月沙集]의 권응록 [倦應錄]에서는, 오늘날 상국[上國]을 유람[遊覽]한 사람들은 모두 망해정[望海亭]을 가장 빼어난 경치로 치는데, 今之遊上國者。咸以望海亭爲最勝,
산해문[山海門] 만리성[萬里城]의 머리 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각산사[角山寺]가, 殊不知有角山寺在山海門萬里城頭最高頂,
남[南]쪽으로는 중토[中土]을 굽어보고,南臨中土, 북[北]쪽으로는 오랑캐 땅을 바라보는 곳이라, 北瞰胡地,
참으로 천하[天下]의 장관[壯觀]임을 유독 알지 못한다.誠天下壯觀也,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을 놓고 본다면, 이러한 월사집[月沙集]의 기록[記錄]은,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교[奸巧]하고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로 진행되고, 그 의도[意圖]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산해관[山海關]뒤의 각산[角山]에 있는 각산사[角山寺]가 남[南]쪽으로 중토[中土]와 임해 있다면, 지금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와, 한국[韓國]의 서해[西海] 바다에 중국[中國]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월사[月沙] 선대[先代]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한편의 시[詩]를 읊고 있다.
聖節使將行求別語。遂書其勝以贈之
성절사[聖節使]가 떠날 즈음에 전별[餞別]의 말을 해 달라고 하기에, 그곳의 경치를 써서 주는 바이다.
옛 각산[角山] 아래 산해관[山海關]이 있던 자리이다. 옆에 보이는 산[山]으로 오르면 각산[角山]의 정상[頂上]에 오른다. 이곳은 카자흐스탄에 있는 자이산 호[湖]의 입구이다.
이곳으로부터 100여리 사이에, 옛 산해관[山海關]의 고성유지[古城遺址]가 완연[完然]히 남아있다.
월사집[月沙集]
만리성[萬里城] 머리에 우뚝한 각산사[角山寺] 萬里城頭角山寺
외롭게 솟은 절승[絶勝]의 망해정[望海亭] 孤高絶勝望海亭
용황[龍荒]의 드넓은 삭막[朔漠] 대야[大野]를 굽어보고 俯視龍荒朔漠野
남극[南極]이라 노인성[老人星]을 평평하게 마주 하노라. 平臨南極老人星
그 옛날 내가 푸른 소 타고 산해관[山海關]을 지날 때 昔我靑牛過關去
한가 한 날 제공[梯空]의 자명[紫冥]에 올랐노라. 暇日梯空上紫冥
불사[佛舍]의 벽에 시[詩] 지으니 산 빛이 움직이고 詩佛壁山色動
술잔 부여잡고 낭랑히 읊으니 창해[滄海] 명해[溟海]가 출렁인다. 把酒朗吟掀滄溟 [중략]
각산[角山] 아래, 산해관[山海關]과 발해[渤海] 사이에 있는 대막[大漠]의 지대이다. 저 아래 구름이 닿는 곳이 당시[當時]의 발해[渤海][지금의 자이산호] 이다.
여기가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고 있는 요해[遼海]의 입구 이다.
월사[月沙]의 시[詩]에서 말하고 있듯이, 용황[龍荒]의 드넓은 삭막[朔漠] 지역에, 각산[角山]과 산해관[山海關]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을, 용황[龍荒]의 드넓은 삭막[朔漠]지대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
용황[龍荒]이라 불리던 지역 역시, 대막[大漠]의 북[北]쪽 지역에 있는 땅이라고 역사[歷史]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은, 일일이 그 수를 열거[列擧] 할 수 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서[歷史書]의 중요한 내용들을 왜곡[歪曲]하고 변조[變造]하여 그것이 마치 당시[當時]의 원본[原本]인 것처럼 가장[假裝]하고 있으며, 그러한 예[例]는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나의 예[例]를 든다면, 한양[漢陽]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의 거리가 천여리[千餘里]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당시[當時]의 원전[原典]인 것처럼 가장[假裝]하고 있는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이며 조작[造作]이다.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은, 기전[畿甸]의 크기만도 천리[千里]를 넘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바로 광활[廣闊]하고 아득한 벌판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천리[千里]의 요동[遼東]벌에 이르게 된다.
이 요동[遼東]벌에서 발길을 옮기다보면,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여 흘러 내려오는 요하[遼河]와 만나게 된다.
광활[廣闊]하고 아득한 벌판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 오늘도 요동[遼東]의 태양은, 아득히 광활[廣闊]한 벌판에서,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고 있다.
이 요하[遼河]가 흘러 내려오는 장백산[長白山]의 산[山] 기슭에, 지금도 장장[長牆]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삼탄집[三灘集]
사령[沙嶺]
실과 같은 긴 장장[長墻]은 오랑캐 땅 질러 있고 長墻如線橫胡地
하늘 닿은 큰 들판은 바다까지 닿았구나. 大野連天到海汀 [중략]
이 장장[長牆]은, 많은 부분이 파괴[破壞]되어 사라졌으나, 당시[當時]의 모습 그대로 일부[一部]가 남아 있다. 그들은 변새[邊塞]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학봉집[鶴峯集]의 조천기행[朝天紀行]에서,
길고 긴 담장[長牆] 누가 쌓아 새문[塞門]을 만들었나. 長牆誰築限塞門
요하[遼河]에서 시작하여 광녕[廣寧]까지 이어지도다. 首出遼河尾廣寧
라고 말하고 있는 이 장장[長牆]은, 이곳에서 비스듬이 서[西]쪽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현지[現地]사람들은 이 장장[長牆]을 변새[邊塞]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허장성세[虛張聲勢]함을 탓해서 무엇 하랴.
옛 역사[歷史]를 말하고 있는 담장[長牆]은 오늘도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이니, 보는 이의 마음을 산란[散亂]하게 한다.
바람이 불면 모래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 요동[遼東]의 학야천리[鶴野千里],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이 어찌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 아니겠는가 ?
요동[遼東]은 이러한 하천[河川]들이 사방[四方]에서 흘러들기 때문에, 생활 할 수 있는 물이 풍족하다
요동[遼東]이 그 옛날 천하[天下]를 다투던 대막[大漠]의 요충[要衝]이 된 이면[裏面]에는, 그럴만한 지세[地勢]의 이로움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강유집[東江遺集]의 상사[上使]가 지은 사령[沙嶺]의 시[詩]에 차운하다. 次上使沙嶺韻, 에서는,
아득히 막막한 고평[高坪]의 들판을 漠漠高坪野
모래바람 속에 하루 종일 지났구나. 風沙盡日行
수 없이 싸워온 전쟁터의 보루[堡壘]들 所經多戰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견고[堅固]한 성[城]이었던가 ? 那箇是堅城
이렇게 시[詩]를 읊었다.
옛 요동성[遼東城]이 있던 자리, 그리고 오늘날의 시가지 모습, 앞으로는 학야천리[鶴野千里]가 펼쳐진다.
역사[歷史]는 천도[天道]의 대순[大順]을 따라 흘러간다. 이곳 사람들은 옛 선조[先祖]들의 역사[歷史]를 잊지 않고, 오늘날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옛 영화[榮華]를 되살려 가고 있다.
도곡집[陶谷集]의 관사[館舍]에 머물러 있던 날, 무료[無聊]하여 생각나는 대로 두보[杜甫]의 시[詩]에 차운해서 행역[行役]을 따라 서술하여 장편을 짓다. 留館日無聊。漫次杜陵韻。追叙行役。爲一大篇。百韻, 에서는,
아득히 들판 이어져 끝없이 드넓은데 渺綿看愈曠
뾰족한 작은 봉우리 어느새 멀리서 펼쳐지는구나. 尖皺忽遙宣
라고 요동[遼東]의 벌판을 표현 하고 있으며,
이어서 요동[遼東]으로부터 사오백리[四五百里] 사이는 모두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작고 뾰족한 봉우리들이 은은히 비치고 바라 보였다. 自遼東後四五百里間。皆無邊大野。至是始微見小尖於隱映間. 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이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는 사령[沙嶺]이다. 펼쳐진 모래 산[山]과 언덕이 가이 없다. 이곳에서 우가장[牛家莊]이 멀지 않다.
삼탄집[三灘集]
사령[沙嶺]
숨어 있는 모래 언덕 준령[峻嶺]이 되었는데 隱約沙墩有嶺形
모래 돈[墩] 다한 곳에 바로 우정[郵亭] 서 있다네 沙墩盡處是郵亭 [중략]
흙 보루와 연대[煙臺]로 거리 나눠 구분했고 土堡煙臺分道里
뽕밭에다 갈대 벌판 반은 덤불 덮여 있네 桑田蘆蕩半榛荊[중략]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는, 이 지역에 있는 연대[煙臺]에 대하여, 소흑산[小黑山]이후에는 길에 연대[烟坮]들이 있다. 小黑山以後。路有烟坮.
세상[世上]에 전하기로는, 척계광[戚繼光]이 구축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원숭환[袁崇煥]이 구축한 것이라. 한다. 世傳戚繼光所築。或云袁崇煥所築.
명[明] 나라 때에 건주[建州]를 방어[防禦]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皇明峕爲防建州而設此.
산해관[山海關] 밖은 10리나 5리에 하나씩 있지만, 산해관[山海關] 안에는 5리마다 서로 마주 보고 중단[中斷]되지 않는다. 關外則或十里五里一臺。關內則每五里相望不絶.
벽돌의 사이사이에 회를 놓아서 쌓았는데 사방[四方]의 둘레는 깎아 세운 듯하고 높이는 10여 장[丈]에 둘레는 10여 아름 가량이다. 以甎石夾灰築之。四圍如削。高可十餘丈。周可十餘圍.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대로 네모난 연대[烟坮]도 있으며, 둥근 연대[烟坮]도 있다. 이러한 연대[烟坮]의 일부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 형태[形態]는 네모나거나 둥글게 생겼는데 오르내리는 데는 구름다리를 사용한다. 其制或方或圓。其上下用雲梯.
그리고 대[坮] 위에는 타첩[垜堞] 있는데 포[砲]와 화살 구멍이 뚫려 있다. 而坮上有垜堞。穿砲矢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烟坮]는 거의 원형[原形]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연대[煙臺]들은 지금도 설명하고 있는 그 모양,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일부[一部]가 남아 있다.
수 많은 연대[煙臺]들이 파괴[破壞]되어 흔적[痕迹]조차 없이 사라져 갔으나, 그 일부는 남아서 당시[當時]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연경[燕京]을 가는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요해[遼海]의 입구[入口]에 다 달아 산천[山川]의 웅장[雄壯]한 지세[地勢]와 천하[天下]의 광대[廣大]함을 실감[實感] 했던 발해[渤海],
중국[中國] 사람들은 이 발해[渤海]를 동해[東海]라고 불렀다.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고 있는 흙으로 덮은 다리,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이 지역[地域]의 다리는, 나무를 밑에 깔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고 말했다.
이 다리는, 다리 기둥은 쇠를 사용 헀으나, 같은 방식[方式]으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심양[瀋陽]에서, 서남[西南]쪽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으로 내려올 때, 이곳에 있는 이러한 어느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는 이르기를, 중국[中國]에는 실로 동해[東海]라고 이를 만한 대양[大洋]의 바다와 같은 동해[東海]는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바다라고 부르는 동해[東海] 바다는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위치[位置]와 그 실체[實體]가 무엇인가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의 엄중[嚴重]함과 소중[所重]함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고 있는 발해[渤海]의 입구가 되는 이곳에서는, 각산[角山]과 요동[遼東]의 천산[千山] 준령[峻嶺], 그리고 구름이 하늘 끝에 감돌고 있는 광녕[廣寧]의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산해관[山海關]의 옛 성지[城地]와, 좌우[左右]로는 요동[遼東]의 학야천리[鶴野千里],
그리고 해뜨는 모습이 천하[天下]의 장관[壯觀]이라고 감탄[感歎] 했던 발해[渤海]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행록[燕行錄]에서 발해[渤海]의 해 뜨는 모습은, 천하[天下]의 장관[壯觀]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 바다의 해 뜨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 기이[奇異]한 경관[景觀]이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지세[地勢]가 이로움은 하늘이 만든 천험[天險]이니 地利天設險
나라를 보전하는 데는 산하[山河]가 보배로다. 有國山河寶
발해[渤海]는 동[東]쪽으로 들판을 껴안고 渤海東抱埜
무려[巫閭]는 빙돌며 하늘에 치솟았다 巫閭廻揷昊 [중략]
지금은,마르카콜호 Markakol, Ozero 라고 부르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산중호수[山中湖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정봉[頂峯] 전경[全景]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북방[北方]의 웅장[雄壯]하고 장엄[莊嚴]한 산이다.
저 멀리 구름에 닿을 듯 보이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방대[尨大]하여 어느 한 산[山]을 일러 말할 수 없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馹汛隨筆]
북진묘기[北鎭廟記]
北鎭廟。在醫巫閭山下。背後千峰。如展屛帳。前臨大野。右環滄海。廣寧城撫在膝下
북진묘[北鎭廟]는 의무려산[毉巫閭山] 밑에 있다. 그 뒤에 여러 묏부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큰 벌이 트이었으며,
오른편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광녕성[廣寧城]은 마치 슬하의 아이들처럼 앞에 벌여져 있다.
萬戶浮烟。繚靑一帶。層塔逈白。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띠를 두른 듯 그 속에 잠긴 탑[塔]이 유달리 희게 보인다.
測其地形平坡。漸成數丈圓阜。而俯仰天地。無所畔岸。日月出沒。風雲變化。皆在其中 [중략]
그 지형[地形]을 살펴본즉 편편한 벌판이 차츰 여러 길 되는 둥근 언덕을 이루어, 굽어보나 쳐다보나 천지[天地]가 하도 넓어 걸릴 것이 없으며, 해와 달이 떴다 졌다 하며 바람과 구름이 일다 사라졌다 함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 중략]
연행기사[燕行記事]
黃埃蔽日之中。漸見醫巫閭山一帶。橫亘西北。勢如馳馬。下有北鎭廟之白塔。依俙於遠眺之外
누런 먼지가 해를 가린 가운데 점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나타난다. 서북[西北]으로 뻗친 산세[山勢]가 마치 달리는 말과도 같다. 그리고 아래쪽에 북진묘[北鎭廟]의 백탑[白塔]이 있어 멀리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廟在桃花洞。中有仙人巖,聖水懸泉。多言洞壑之勝。而路左數十里。日短行忙。未暇歷賞 [중략]
사묘[祠廟]는 도화동[桃花洞]에 있는데, 그 안에 선인암[仙人岩], 성수현천[聖水懸泉]이 있어 경치가 좋기로 이름났다. 그러나 수[數] 십리[十里]나 외진 곳에 있으며, 해는 짧고 길이 바빠 구경하지 못했다. [중략]
의무려산[醫巫閭山]의 한 줄기가 대막[大漠] 옆으로 길게 뻗어 나가고 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산 속에는,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고 있는 기이[奇異]한 바위들과 물이 고여 아름다운 곳들이 많은데, 이러한 것을 가리켜, 선인암[仙人岩], 또는 성수현천[聖水懸泉] 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카자흐스탄의 땅이기 때문에, 그 이름의 유래[由來]를 알기 어렵다.
요해[遼海]의 입구[入口]에서 바라보이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정봉[頂峯] 모습이다. 산[山]이 높기 때문에, 눈도 일찍 내린다.
이 산중[山中]의 호수[湖水]에서 흘러 나가는 저 가느다란 물줄기는, 바로 요수[遼水]의 근원[根源]이며, 요하[遼河]상류[上流] 중의 하나이다.
연행기[燕行紀]
연경에서 진강성까지[起燕京至鎭江城]
毉巫閭山。高十餘里。週二百四十里。舜封十二山。以毉巫閭爲幽州之鎭山。勢掩抱六里。亦名六山。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높이가 10리가 넘으며, 둘레가 240리인데, 순[舜]이 십이산[十二山]을 봉[封]할 때에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산세[山勢]가 6리를 덮어 안았으므로 육산[六山]이라고도 한다.
南距七里有北鎭廟。隋開皇間始建。唐天寶間。封廣寧君。宋加王號。
남[南]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북진묘[北鎭廟]가 있는데,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처음 세웠고, 당[唐] 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광녕군[廣寧君]을 봉[封]하였으며, 송[宋] 나라에서는 왕호[王號]를 올렸다.
元大德間。封貞德廣寧王。明初尊爲北鎭。毉巫閭山之神
원[元] 나라 대덕[大德] 연간에는 정덕광녕왕[貞德廣寧王]을 봉[封]하였고, 명[明] 나라 초에는 높여서 북진의무려산지신[北鎭醫巫閭山之神]으로 하였다.
元季廟燬。明永樂十九年勑建。成化間重修。淸康煕,雍正,乾隆間。屢加修葺 [중략]
원[元]나라 말년[末年]에 묘[廟]가 불타 버린 것을, 명[明]나라 영락[永樂] 19년에 칙명[勅命]으로 중건하고 성화[成化] 연간에 중수하였으며,
청[淸]나라에서는 강희[康煕], 옹정[雍正], 건륭[乾隆] 사이에 여러 번 보수[補修]를 거듭했다. [중략]
물결이 창일[漲溢]하게 일고 있는 발해[渤海], 바람이 불면 파도가 높게 일어나고 그 기세[氣勢]가 사납다. 옛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를 만도 하다.
요해[遼海]의 입구, 서[西]쪽으로는, 길이 130Km에 이르는 발해[渤海][지금의 자이산호]가 길게 이어져 있다. 연행록[燕行錄]에 기록된 발해[渤海]는, 바로 이 바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발해[渤海]의 연안[沿岸]을 따라 서북[西北]으로 올라가면, 열하[熱河]의 길목인 고북구[古北口]에 이르게 된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산해관[山海關]이 있는 유새[楡塞]의 지역을,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라고 불렀다.
중국[中國] 역대[歷代] 사서[史書]들의 기록[記錄]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산해관[山海關]을 벗어나면 북[北]쪽으로는, 바로 당시[當時]의 달자[㺚子]인 몽고[蒙古]와 인접[隣接]하고 있기 때문에, 화[華]와 이[夷]로 그 지경[地境]을 나누어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문곡집[文谷集]
광녕[廣寧]에서 부사의 시[詩]를 차운하다.[廣寧 次副使韻]
기이[其二]
유새[楡塞]의 지형[地形]은 이하[夷夏]의 경계[境界]요. 楡塞地形夷夏界
계문[薊門]의 풍경은 고금[古今]의 정[情]이라. 薊門風景古今情 [중략]
연경[燕京]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거마[車馬]로 실을 만큼 쌓여 있다. 저 아득히 오래된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부터,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오천년[五千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를 포함하여,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온 각종의 역사서[歷史]에 이르기까지,
연경[燕京]과 연산[燕山]에 대한 옛 기록[記錄]들은, 고금[古今]의 역사[歷史]를 시야[視野]의 앞으로 생생[生生]하게 이끌며, 분명[分明] 하고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연경[燕京]은 고금[古今]의 수[數] 천년[千年] 동안 본래[本來]의 그 자리에서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恒常]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한 번도 옮겨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이 망국[亡國]의 비운[悲運]을 겪으며, 연경[燕京]이 동서[東西]로 만리[萬里]를 날아다니고 옮겨 다니는, 역사상[歷史上] 그 유래[由來]를 찾아 볼 수 없는 괴이[怪異]하고 해괴[駭怪]한 일들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장막을 드리우고 벌어지고 있으니,
인간[人間]들의 추악[醜惡]하고 간악[奸惡]한 그 모습은 끝이 없는 것 같으며, 그 음흉[陰凶]하고 간교[奸巧]한 마음을 들어 내 놓고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 주는 듯 하다.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 그리고 열하[熱河]는, 남[南]쪽에서 볼 때, 북[北]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 현지[現地]를 조사하고 실측[實測]하면서, 열하[熱河]에서 남[南]쪽으로 산해관[山海關]과 연경[燕京]을 굽어보며, 그러한 지역[地域]이 그러한 곳에 있었음을 보게 되었고,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역사[歷史]의 유전[遺傳]함과 역사[歷史]의 순리[順理]와 무상[無常]속에서도, 그 근본[根本]의 뿌리는 끝없이 깊음을 알게 되었으며,
지나간 역사[歷史]를 회고[懷古]하며, 선대[先代]들의 모습들을 다시금 새로이 그려보게 되었다.
부연일기[赴燕日記]의 주견제사[主見諸事]에서 이르기를, 산해관[山海關]은 곧 수륙[水陸]의 큰 관방[關防]이고,
통주[通州]는 곧 기보[畿輔]의 대도회지[大都會地] 이며, 봉황성[鳳凰城]은 곧 변문[邊門]의 방수[防守]이다. 山海關是水陸大關防。通州是畿輔大都會。鳳凰是邊門防守
산해관[山海關]과 통주[通州]는 서로 위아래에 있으며, 而山海關通州互相上下, 심양[瀋陽]은 연경[燕京]의 다음 가는데,瀋陽爲燕京之亞,
우리 경사[京師]에 비하면 부유[富有]하고 화려한 것이 백배[百倍]나 되지만, 연경[燕京]에 비교한다면 열[十]에 일 이[一二]가 될 뿐이다. 比我京富麗百倍。而比燕京爲十之一二矣。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記錄]에서는, 대국[大國]의 책력[冊曆]을 새로 반포[頒布]하매, 궐내[闕內]에서는 건륭[乾隆]의 연호[年號]를 쓰고, 밖에서는 가경[嘉慶]의 연호[年號]를 쓴다 하며,
5월 21일에 태상황[太上皇]이 황제[皇帝]와 더불어 열하[熱河]에 거둥[擧動]하여 만만수성절[萬萬壽聖節]을 지내고 백로절[白露節]이 든 후[後]에 돌아왔다 하니,
열하[熱河]는 북경[北京]에서, 또 북[北]으로 700리[七百里]를 들어가 있는 지역[地域]이니, 몽고[蒙古]의 나라에서 지척[咫尺]이라.
궁궐[宮闕] 배치가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니, 이름을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하고, 황제[皇帝]는 해마다 여름이면 이리 거둥하여 3, 4개월[三四個月]을 지낸 후[後]에 돌아오니,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 하나, 실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일러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해관[山海關]과 통주[通州]는 서로 위아래에 있다., 而山海關通州互相上下,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경[燕京]을 가는 사신[使臣]들이 대진[大鎭]을 우회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갔다는 기록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연행록[燕行錄]에는, 이에 대한 논의[論議]가 다수 기록[記錄]되어 있다.
연경[燕京]은 산해관[山海關]의 서[西]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해관[山海關]의 남[南]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열하[熱河]는 연경[燕京]의 동북[東北]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북[北]쪽 이라고도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은, 실은 열하[熱河]가 북[北]쪽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의 이면[裏面]에는, 열하[熱河]는 연경[燕京]에서 볼 때, 북[北]쪽의 지역이므로, 이를 함축적[含蓄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행기[燕行紀]의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에서는,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가 말하기를,
고북구[古北口]의 북[北]쪽 3리 지점이 조하천[潮河川]이니, 수어천호[守禦千戶]가 있는 곳으로 관[關]이 있다. 亭林顧炎武曰。古北口北三里。爲潮河川。守禦千戶所有關.
登潮河川營城。有詩曰
조하천영[潮河川營] 성[城]에 올라가 시[詩]를 지었다.
수레는 더디고 대막[大漠]엔 가을인데 車馬逶遲大漠秋
백단산[白檀山] 남[南]으로 보이는 게 신주[神州]로다. 白檀南望是神州
연경[燕京]의 구름과 푸르름은 연[連]하여 하늘 끝에 다하고 燕雲樹色連天盡
선대하[宣大河] 물소리는 관새로 들어 사라져 간다. 宣大河聲入塞流 [중략]
고북구[古北口]가 있던 지역의 산세[山勢] 모습이다. 난하[灤河]는 북[北]으로 흘러 열하[熱河]와 합쳐진다.
열하[熱河]를 난하[灤河]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곳에서 북[北]쪽으로 올라가면, 열하[熱河]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큰 댐이 이르티시강 하류[下流]에 세워져,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오고 가던 길의 태반[太半]이, 난하[灤河]와 함께 물속에 잠겨 버렸다.
이렇게 고북구[古北口]에서,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는데, 고북구[古北口]에 있는 백단산[白檀山]의 남[南]쪽에 신주[神州]인 연경[燕京]이 있다는 말이다.
열하[熱河]는 고북구[古北口]의 북[北]쪽에 있었다.
동[東]쪽은 요해[遼海]의 천리대야[千里大野]가 나직이 하늘에 닿아 있고, 서[西]쪽은, 푸르고 푸른 발해[渤海]의 바다가 하늘의 저편 끝에 어리어,
출렁이는 파도를 따라 밀려가고 밀려오는 곳, 이곳에서 열하[熱河]로 가는 길과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 진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압록강[鴨綠江]을 일명[一名] 요수[遼水], 일명[一名] 안민강[安民江] 이라고 말하고 있다.
압록[鴨綠]을 요수[遼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럴만한 근거[根據]와 그 이유[理由]가 있는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수[水] 천리[千里]를 구불구불 돌아 흘러 요동[遼東]을 관통하여 흘러가기 때문에,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압록강[鴨綠江]을 일명[一名] 요수[遼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現地]에서는, 자이산호 일대[一帶]의 역사[歷史]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
현지[現地]의 토인[土人]들은, 오늘날 신강성[新疆省] 탑성[塔城]의 북[北]쪽 지역인 자이산호가 있는 이르시티강 일대[一帶]가,
명[明]나라에서 설치[設置]한 삼위[三衛][타안위[朶顔衛], 복여위[福餘衛], 태령위[泰寧衛] 중의 한 지역[地域]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판을 치는 금세기[今世紀]에 이르러서도, 현지[現地]의 토인[土人]들은 자신[自身]들의 역사[歷史]를 잊지 않고, 천하[天下]를 호령[號令]했던 선조[先祖]들의 드높은 기상[氣像]을 호흡하며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우리보다 조금 뒤쳐져 있다고 해도, 민족[民族]의 긍지[矜持]를 잃지 않고, 자신[自身]들의 역사[歷史]를, 당당[堂堂]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를 우뚝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을 볼 때,
거짓의 역사[歷史] 왜곡[歪曲]이 어지러이 판을 치는 한국[韓國]의 현실[現實]을 뒤돌아보면,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천하[天下]에 이렇게 수치[羞恥] 스럽고,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 학문[學文]이고, 무엇이 석학[碩學]이며, 무엇이 선진국[先進國]이며, 무엇이 우리의 오늘날 현재[現在]의 모습인가 ?
인간[人間]의 길인, 천하[天下]의 정도[正道]를 무참히 짓밟고, 천하[天下]에 용서[容恕] 받을 수 없는 불의[不義]를, 스스럼없이 자행[恣行]하고 저지르며, 인간[人間]의 존엄성[尊嚴性]을 철저히 짓밟고,
진애[塵埃]의 티끌만한 양심[良心]도 없이, 거짓과 이간[離間]으로 나라의 혼란[混亂]을 조장[助長]하며 선동하고, 존엄[尊嚴]한 국가[國家]의 주권[主權]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치는 자들,
사욕[私慾]과 권력[權力]을 차지하기 위하여 벌이는 추잡[醜雜]하고 간교[奸巧]하며 사악[邪惡]한 행태[行態]는, 나라를 혼란[混亂]속에 빠트리고, 국가[國家]를 좀먹으며, 국민[國民]들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고,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천하[天下]의 조롱[操弄]거리로 만들며,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패망[敗亡]으로 내모는 일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요. 천도[天道]는 곧 인도[人道]이니, 역사[歷史]는 천도[天道]와 함께 숨 쉬며 흘러간다. 고금[古今]의 역사[歷史]는 그렇게 흘러 왔다.
역사[歷史]는 인간[人間]의 발자취이니, 역사[歷史]의 진리[眞理]는, 그러한 패악[悖惡]한 자들을 절대 용서[容恕]치 않을 것이다.
다음 2편[二篇]에서 계속 됩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장문의 글임에도 전혀 느끼질 못하는, 가슴을 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그토록 찾고 찾던 마지막 퍼즐이 말입니다.
발해(渤海)!
연경(燕京)!
열하(熱河)!
이러한 몇 가지중요한 것들의 지리적 위치가 풀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모든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다. 지금도 토착민들은 옛 조선왕조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니 그 분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매국노들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지금도 신음중입니다. 글 감명깊게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까지 스스로 답사하시고, 이런 글을 우리 카페에 게재해 주시는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황제가 설치한 삼위(三衛)의 지리적 위치가 위에서 이야기한 곳이라면, 복여는 옛 부여 땅이라고 하였으니, 참고가 됩니다. 원전에서 말하는 곳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경강역고에서 말하는 요수의 상류인 요해!
이게 참 애물단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서야 그 비밀을 풀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몇 가지 난제가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지금 한국에서 역사의 기록에서 말하고 있는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의 고토를 찾아, 그 지역이 이곳이다. 라고 고증하고 증명한다 해도 이를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식민사학의 거짓 역사에 함몰되어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니, 역사의 왜곡이 큰 성과을 거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지식층에 있는 고명한 학자라는 자들이, 거짓의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으니,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부끄러운 일들은, 어찌보면 심은대로 거두는 하나의 일면 일것입니다.
한국의 국민들이,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식민사학이 먼저 각성하고 정리 되어야 하며 , 그동안 거짓과 왜곡으로 얼룩진 치욕의 잔재를 과감히 척결 해야 할것입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신강성의 서북 지역, 지금 천산의 북쪽 지역에는, 옛 성곽들이 즐비 했습니다. 당시의 사진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성곽들이 씻은듯이 사라지고,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러한 웅장한 성곽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했을까 ? 그에 대한 해답은 한마디로 명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력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최남석님 안녕 하십니까 ?
감사 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안 하신지요.
두루 평안 하시며, 늘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누구나 다 자랑 스럽게 열변을 토합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어느 지역에 있던 어떠한 나라였는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지금의 동북삼성과 반도의 북쪽에 고구려가 있었다. 라는 것은, 왜놈들이 조선사를 짓밟기 위해서 만든 역사의 허위 날조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고구려의 역사를 당당하게 말하고는 있으나, 고구려의 본 모습은 그 일면도 보지 못하는 어이 없는 일이 일어나는 괴이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조선의 변경에 있는 한 족속에 지나지 않았던 청이 일어나 , 천하를 석권 하였으니, 역사는 천도를 따라 순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청이 일어난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내지였으니, 역사는 이렇게 돌며 순환 하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
옛 연행사신들이 연경과 열하를 오고 갔던 길을 따라가 보면, 연행록의 기록들은 금과 옥조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연행록의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들이, 지금의 북경과 산해관에 맞추어 왜곡되고 변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게 들어 나는데, 조선사 역사의 참화를 피해간 사서들은, 아마 극히 드물 것 입니다.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항상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며, 늘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통군정의 정자를보니 정말 이곳이 의주라니 그저 놀라울따름입니다. 사서에서 말한것을 실제 사진으로 확인하니 뭔가 큰 실마리가 풀리는듯합니다. 그 옛날 고려에서도 요동성은 변방을 담당하는 중요한지역인데 성곽의 흔적은 없고 사진만 남아있다니 예전에 요동성의 사진자료를 본적이 있는데 이곳에 대입해보면 맞는것같아보입니다. 역사의 기록에서는 연경에서 큰지진으로 장춘원, 기춘원 그리고 황성이 무너졌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혹시 그런 기록들의 흔적이 실제로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 찾기어렵겠지만 이것만찾으면 연경이 확실합니다. 다음편이 무척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대부여님 안녕 하십니까 ?
말씀 하시는 지진에 대한 흔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지금도 회자 되고 있슴니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당시 연경의 도성에 관한 것입니다. 다음편에서 소개할 예정 입니다.
견고하고 웅장한 성곽들이 즐비했던 이 지역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성터의 유지와 극히 일부의 성곽만이 남아 있으니,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이면에는 역사의 왜곡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여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선생님 모순되는점이 하나있는데, 연행록에는 압록강을 넘으면 요동이며 곧 대막지대가 펼쳐진다고 나옵니다. 즉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사막지대가 없는것처럼 묘사되있는데 의주의 별칭인 "부얼진현" 을 찾아보니 신강성 알타이산 근처로 나오는데 만약 이곳이 정말 의주였다면 도착하기전에도 수많은 사막지대를통과해야되는걸로 대륙지형지세를 보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연행사신들의 기록에는 한결같이 압록강을 건너야만 사막지대가 있는것처럼 되있는걸까요? 또 어떤기록에서는 조선의도읍지에서 연경까지 거리가 사천몆백리로 나오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먼데 이부분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조선사의 사막에 관한 역사의 기록들은, 많은 내용들을 조선사를 말살 하려는 자들이 삭제 하거나 왜곡하여 변조하고 그것이 마치 당시의 원전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습니다.
연행록만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기록들은 당시의 원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행록 자체가 그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양에서 열하까지는, 오천리가 넘는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의 기록이 당시의 원전 기록 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서들은, 특히 연행록에서는, 한양에서 의주까지 1070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체 연행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내용들을 지금의 북경에 맞추어 변조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자들은, 그들의 한계를 들어내고 있습니다. 반만년의 방대한 역사의 기록들을 모두 왜곡하고 조작 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역사의 기록들을 읽어 내리다 보면, 앞뒤가 많지 않는 내용들을 수 없이 보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역사서를 왜곡하고 변조해 놓은 것들 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왕조실록으로 부터, 선조들의 개인 문집에 이르까지, 역사 기록의 왜곡과 조작, 변조는 그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참화 속에서도, 살아 남은 기록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는 사적지대 입니다. 정사에도 이러한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당시에, 현지에서 나라의 명으로 지방을 다스린 대신들의 개인 문집 속에는, 그 지방의 모든 것에 대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함경도만 하더라도, 적사 지대가 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사지대는 사막과 모래더미, 그리고 늪지대가 어우러져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인데, 함경도는 이러한 땅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하나 둘이 아니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양에서 압록강의 의주까지 1070리, 또는 1090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왜곡과 조작의 기록이라는 것을 스스로 들어 내고 있는 것 입니다.
조선의 정조대왕이 이르기를, 기내 천리에 사는 백성들이여,... 이렇게 몸소 말하고 있는데, 반도에서 어떻게 기내 천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조선의 기전만도 천리가 넘는데, 한양에서 의주까지가 천리라니, 지나가는 우공도 이말을 듣는다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입니다.
지금의 신강성으로 가는 사막지대에는, 고성들이 즐비 합니다. 당시에도 지금 같은 사막지대 였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러한 곳에 그 수많은 성곽들을 축조 하겠습니까 ?
우리의 역사 기록들이 위대한 것은, 그 지역의 고목과 돌 하나까지도,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따라서, 그 지역의 현지를 가보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수 백년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한 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기록들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
연행록에서 한양에서 의주까지 가는 길에 사막의 기록이 없는 것은, 모두 삭제되었기 때문 입니다. 조선의 경도에서 의주까지는 사천리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기록 입니다.
함경도의 북관이라든가 연경이 만리 길 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한 말이 아니라 역사 , 사실의 기록 입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사신이 고려의 송악에 오면서 말하기를, 동으로 오천리를 왔는데도, 갈길이 아득하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이사신은, 연나라 지역에서 출발 했습니다.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차차 앞으로 모든 것이 밝혀 지리라 사료 됩니다.
한 번 더 읽었습니다.
벨루하산에 대한 위키백과나 백과사전등의 인터넷 사전류에서는 "봉우리가 2 개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金山(금산)에 대한 일통지에서는 원래의 금산과 30리 밖에 동금산, 또 20리 밖에 서금산 이렇게 3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에 청하(淸河)가 흘러 요해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경강역고의 말입니다. '금산과 요해와 삼위'에 대한 글을 쓰다보니 생각이 나서 댓글을 올립니다. 님께서 벨루하산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셨거든요. 이것은 일통지와 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너무나 잘보았습니다. 저는 내심 발해가 발하슈호 아니면 바이칼호 일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좋은글감사드리며 2편도 기대가됩니다.
운명보다 운명같은님 안녕 하십니까 ?
감사 합니다.
발해에 대하여, 중국의 사서들을 살펴보면, 여러 지역을 발해라고 말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에서도 발해는 한곳이 아니라, 다른 지역을 발해라고 부르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행록과 고구려를 이어 일어난 대조영의 발해는, 이 지역이 맞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우리의 역사를 찾아가며 현지인들의 역사에 대한 구전과 기록, 그리고 오늘날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설명들은,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보는데 있어서 우리의 역사를 고증하고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와,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의 본 모습은, 큰 틀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운명보다 운명같은님의 댁내에, 늘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