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다.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대부분 집단최면이거나 기억의 오류, 착각 등이다. 사람은 원래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다. 거기에다 후대들이 예수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나 주변에 떠도는 민담 류의 이야기를 가공해서 첨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그렇다고 그 이야기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원래 이야기를 만들거나 전하는 사람들은 어떤 효과를 위하여 다소간의 과장이나 수사를 덧붙이기 마련이다. 예수 자신도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으며 어떻게 보면 신약 전체를 문학적 비유로 볼 수도 있다. 시나 문학 작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듯이 신약을 축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종교적 진실을 놓치기 쉽다.
가령 오병이어 이야기를 예수의 권능으로만 해석하면 좀 따분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신의 권능이라는 게 겨우 밥 한 끼 해결하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면 전체적으로 무슨 마술 한 편을 감상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야기의 진의는 뭘까에 관심이 가기보다는 과연 무슨 트릭을 썼을까 하는 속된 호기심이 앞선다. 그 이야기를 그냥 비유로 읽으면 안 될까? 어렸을 적에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면서 어머니께서 꼭 끌어다 쓰는 속담이 있었다. '콩 한 쪼각도 나눠 먹는단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을진대 하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임에랴. 가난한 종교 공동체 안에서 소박하게 나눠먹는 모습에 대한 비유로 적절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 문학적 수사에 비해 보다 투박하고 꾸밈없이 다가오는 이야기도 있다. 장님이 눈뜬 이야기는 뭔가 지금 읽어도 디테일이 살아있다.
그 때 예수는 평생 장님이 엎드려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는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남을 치료할만한 약도 도구도 없었다. 물론 그 장님을 의원에게 보낼 만한 돈도 없었다. 단지 그 장님에게 빛과 광명을 보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을 뿐이었다. 예수의 머릿속에 그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던 흔한 치료법 몇 가지가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예수 자신도 그런 치료들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예수는 손바닥 위에 황토를 올려놓고 침으로 이겼다. 그리고 장님을 끌어당겨 눈 위에 그 흙을 발랐다. 예수의 손과 침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자애가 넘쳐 흘렀다. 장님은 평생 처음 겪어본 따뜻한 손길에 눈시울이 더워졌다. 이제 가장 중요한 씻김이 남아 있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시오. 실로암 못은 근처에 있는 작지만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맑은 물방울이 샘솟는 것이 보였고 새벽이면 생동하는 기운이 감돌았다. 그 장님은 새벽에 그 물에 엎디어 눈을 씻었고 실로암 못이 보였고 주변에 사람들이 보였다.
이 이야기도 얼마든지 비유나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명료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의사도 뭣도 아니었고 그냥 침으로 이긴 황토를 장님에게 발라주었다는 이야기다. 그 장님이 나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인가. 지금도 모든 기적적 치유의 기본 원리는 따뜻한 연민과 소박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