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지산성(사적
60호)과 봉서사
▲ 건지산성 내성(內城)의 흔적 |
건지산에는 건지산성(乾芝山城)이란 늙은 산성이 씌워져 있다. 정상 주변에 내성터가 있다고
하여 침침한 눈을 긴장시키며 살펴봤으나 수풀과 흙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어 쉽게 찾
지는 못했고 정상 북쪽 봉우리(해발 130m)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성터 윤곽이 나타났다.
건지산성은 정상 부근을 에워싼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에 닦여진 외성(外城) 2중 구조로 되
어있다.
내성은 봉우리를 머금은 테뫼식으로 긴 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띄며 흙으로 다졌는데,
규모는 길이 150m, 너비 30m, 둘레 350m 정도로 테뫼식 산성 중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외성은 계곡을 중심으로 2개의 봉우리를 포함한 말안장 형태로 흙 일부를 깎아서 위에 성을
다지는 방식으로 닦여졌다. 동쪽 성벽은 거의 완만한 지형으로 돌과 흙을 섞어서 다졌으며,
둘레는 약
1,300m 정도이다. 성 바깥과 안쪽에 해자가 조성되었으며, 동문터와 서문터, 수구
(水口)터 등이 확인되었고, 성 안에서는 건물터 5개와 조선시대 군창(軍倉)터가 나왔다.
또한 산성 서남쪽 낮은 봉우리에 2개의 조그만 성이 있는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일종의 보
루(堡壘)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백제식 산성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봉서사 서쪽
에는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가 있는데 거기서 불탄 쌀과 백제 토기 조각이 나왔다.
하여 이를 근거로 백제 후기 성으로 의심하기도 했으며, 고약한 왜정(倭政)은 이곳을 주류성(
周留城)으로 지들 멋대로 비정하기도 했다. (이곳은 절대로 '주류성'이 아님)
허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되었다는 의견도 크게 나오고 있으며, 해양대국 백제(百濟)의
중심지가 현재 남한 땅이 아닌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보는 견해도 크게 설득을 얻
고 있다.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원래 이름은 고려)와 신라가 백제 땅을 나눠 가졌다는
기록이 있음> 하여 요즘에는 대놓고 백제 후기 산성이라 하지 않고 애매하게 삼국시대 유적으
로 비껴 설명하고 있다.
산성 북쪽은 험준한 암벽을 활용해 성벽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흙으로 쌓았으나 장대한 세
월의 거친 흐름으로 많이 씻겨내려가 정상 북쪽 봉우리와 산 북서쪽에서 산성 흔적이 남아있
다. 그리고 1999년 발굴조사를 통해 테뫼식 산성이 먼저 축성되고 외성(포곡식 산성)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고려시대 한산군의 읍성(邑城)으로 여겨지고 있다. |
▲ 솔내음이 그윽한 건지산 정상 서북쪽 숲길
▲ 건지산성 외성터 ① |
건지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내려가면 토성처럼 생긴 두툼한 언덕길이 나온다. 그 길은 외성
터로 서문터까지 이어지는데, 길 좌우로는 누렇게 뜬 잡초가 무성해 황량하기 그지 없으며,
그 주위로 소나무가 짙게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선사한다.
건지산은 동쪽과 서쪽이 평야지대로 멀리 금강이 바라보이며, 서해바다와도 가까워 조망이
좋
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산성을 쌓아 금강 하류를 지키는 방어기지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충분히 그럴만한 요충지이다.
* 건지산성 소재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등 |
▲ 건지산성 외성터 ②
▲ 건지산성 외성터 ③
▲ 건지산성 외성터 ④
▲ 건지산성 외성 서문터
야트막한 고갯길 좌우로 외성의 흔적들이 살짝 남아있다.
▲ 건지산성 외성 서문터 안쪽
▲ 봉서사(鳳棲寺)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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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터에서 동쪽으로 가면 봉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건지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봉서사
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인데, 창건 시기는 건지산 산
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 '봉서암'이 나와있어 적어도 17~18
세기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기산면 영모리에 있던 영모암(永慕庵)을 1682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기록도 있으나
영
모암과 봉서사가 나란히 언급된 문헌들이 존재해 서로 같은 절은 아닌 것 같다.
절의 이름은 봉황이 사는 곳이란 아름다운 의미로 대한제국 시절에 한산 출신인 월남 이상재(
月南
李商在)가 여기서 공부를 했으며, 석북 신광수(申光洙), 석초 신응식(申應植)도 여기서
공부를 했을 정도로 지역 공부방으로 유명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 심검당, 요사채 등 5~6동 정도의 건
물이 있으며,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를 보고자 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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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
▲ 봉서사 샘터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온다. |
▲ 봉서사 극락전(極樂殿)
봉서사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저 안에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1751호 |
극락전에 깃든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로 관
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
맙게도 그들의 정보를 머금은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는데, 이 문서를 통해 1619년에 수연(守
衍)이 만든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조성 주체와 시주자 관련 정보도 들어있어 이들의 탄생 이
야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수연은 17세기 초~중기에 활동했던 조각승으로 1615년 김제 금산사(金山寺)의 독성상을 만들
었고, 1622년에는 서울 지장암에 전하는 목조비로자나불상을 만들었다. 이후 강화 전등사(傳
燈寺)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예산 수덕사(修德寺) 석가여래삼불좌상 등을 다른 조
각승과 함께 만들었다. 봉서사 삼존좌상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초창기 것으로 그의
조각적 경
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삼존불은 다른 불상/보살상에 비해 얼굴이 비대할 정도로 크고 덩치가 큰 편인데, 그것
이
바로 수연의 조각 스타일로 턱이 짧은 큰바위급 얼굴, 두툼한 코와 쩍벌어진 어깨, 넓은
가슴, 긴 허리, 강직한 선 위주로 표현된 도식화(圖式化)된 주름과 왼쪽 어깨와 무릎 밑에 펼
쳐진
독특한 형태의 주름 표현 등을 보이고 있다.
17세기 전반기 수연의 대표 불상이자 조성 관련 기록을 머금은 발원문 발견으로 크게 평가되
어 국가 보물의 지위를 받았다. |
▲ 온갖 호법신들로 정신이 없는 법당 지킴이, 극락전 신중탱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치성광여래),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공간이다.
▲ 봉서사 느티나무 - 서천군 보호수 2015-1호 |
샘터 앞쪽에는 늙은
느티나무 2그루가 하늘 높이 자라나 경내에 경내를 드리우고 있다. 이들
은 500년 이상 묵은 것들로 높이 20m, 나무 둘레는 3m에 이르는데, 봉서사가 17~18세기 정도
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 이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 절은 세운 것은 아
마도 저들의 그늘맛이 달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몰까지는 아직 말미가 있어 건지산 남쪽 자락에 있는 한산향교나 북서쪽에 있는 목은 이색
묘역까지 가볼까 했으나 날씨도 쌀쌀하고 건지산에서 많은 것을 봤더니 머리까지 아파서 여기
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고 한산면 중심지(지현리)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서천 연말 나들이는 마무리를 고한다.
* 봉서사 소재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산4-2 (건지산길 122, ☎
041-951-02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