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년(또는 1371년) 헝가리 부다에서 출생
1399년 7월 17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사망
아버지는 헝가리와 폴란드의 국왕 라요시 1세(루이 1세 르 그랑 당주),
어머니는 보스니아 공녀 옐리사베타 코트로마니치
1386년 2월 18일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폴란드 국왕 부아디수아프 2세 야기에우워)와 결혼
1374년 무렵에 태어난 야드비가 여왕은 1384년부터 1399년까지 폴란드의 군주였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 헤드비지스(야드비가) 여왕'으로 숭배되었다. 야드비가는 여왕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야드비가 여왕은 독일어로는 헤트비히, 리투아니아 어로는 야드비가, 라틴어로는 헤드비지스로 알려져 있다.
야드비가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전해지며, 1949년 행해진 시신발굴은 그녀가 중세여성 치고는 유별날 정도로 키가 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80cm). 이것이 어떤 기형이나 장애였다는 신체적 증거는 전혀 없다.
야드비가는 아마도 1374년 2월 18일에 출생한 듯하다. 야드비가는 카페-앙주 가문 출신으로 헝가리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라요시 대왕과 보스니아 공녀 옐리사베타 사이의 막내딸이었다. 야드비가의 어머니와 친할머니 엘즈비에타는 둘 다 폴란드의 고대 토착 왕조였던 피에스트 가문의 후손이었다. 또한 야드비가는 1320년 폴란드를 재결합시킨 부아디수아프 왕의 증손녀이기도 했다.
야드비가는 헝가리 부다에 있는 궁정에서 훈육을 받았다. 1378년 야드비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빌헬름과 약혼하였고, 빈 황실의 궁정에서 약 1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훗날 이들의 약혼은 깨지고 말았으며, 빌헬름은 야드비가가 사망한 후 나폴리 여왕 죠반나 2세와 결혼하였다. 야드비가의 아버지는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야드비가나 그 언니인 마리아와 결혼하도록 합의를 했다(결국 지기스문트는 마리아와 결혼했다).
야드비가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미술, 음악, 과학 그리고 궁정 생활에 흥미가 있었다.
폴란드는 1370년까지 피아스트 토착 왕조의 지배를 받았었다. 피아스트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에겐 아들이 없었는데, 카지미르는 자신의 다른 남자 친척들이 너무 어리거나, 또는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지미르 3세는 자신의 여동생인 엘즈비에타 왕녀와 그녀의 아들인 헝가리 왕 라요시 1세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토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라요시는 왕으로 선포되었고, 엘즈비에타는 1380년 세상을 뜰 때까지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
1382년 라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헝가리 왕위는 마리아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폴란드의 경우, 소 폴란드의 영주들(폴란드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은 헝가리와의 군합국 상태가 계속되는걸 바라지 않았으며, 또한 마리아의 약혼자인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영주들은 마리아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를 자신들의 새로운 군주로 선택하였다. 야드비가의 어머니이자 헝가리의 섭정이었던 옐리사베타 대비와의 협상, 그리고 대 폴란드에서의 내란(1383년)이 있은 후, 야드비가는 마침내 크라쿠프로 오게 되었고 1384년 11월 16일 '왕(King)'으로 즉위하였다. 야드비가의 타이틀이 남성이었던 것은 그녀가 독자적인 군주이며, 왕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야드비가는 아직 어린 군주였기 때문에 폴란드에 적어도 한 명의 친척을 두게 되었고(그녀의 육친들은 모두 헝가리에 남아있었다), 그 친척은 바로 야드비가의 외가 쪽 사람인 부아디수아프 쿠야비아였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대관식 직후, 새로운 왕위 요구자들이 등장했다. 마조프셰의 Ziemowit 4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야기에우워)였는데, 요가일라는 소 폴란드 영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야드비가가 11살이던 1385년,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 폰 합스부르크가 신방에 들어 결혼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영주들에게 '기정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크라쿠프로 왔다. 그러나 빌헬름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폴란드의 주교들이 그와 야드비가의 약혼은 무효하다고 선언할 동안 빌헬름은 폴란드에서 추방되었다. 같은 해 요가일라와 소 폴란드의 영주들은 크레보 조약(이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시작되었다)에 서명하였고, 여기서 요가일라는 크리스트 교를 채택하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병합하며, 야드비가와 함께 폴란드를 다스리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야드비가(12)와 요가일라(36)-이미 부아디수아프로 세례를 받았다-는 1386년 크라쿠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야드비가가 자신의 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가일라는 대관식을 치루고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1387년에는 야드비가의 모후 옐리사베타가 헝가리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Horvathy 지지자들에게 교살되었다.
야드비가는 군주로서는 아마도 아주 약간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드비가는 왕국의 정치와 외교, 문화 생활에 적극 관여하였다. 1387년 야드비가는 할리츠 공국을 재정복하기 위해 군사 원정대를 지휘하였으며, 1390년엔 튜턴 기사단과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야드비가는 많은 라틴어 서적을 폴란드 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야드비가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였고, 병원을 창설하는데 기여하였다. 빌뉴스에 주교구를 창설한 일은 야드비가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 무엇보다도 야드비가는 자신의 드레스와 보석들을-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왕실 기장까지-아카데미아 크라쿠프스카를 재건하는데 기부하였다. 이후 아카데미아 크라쿠프스카는 야드비가와 그녀의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여 'Uniwersytet Jagiellonski(야기에우워 대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1399년 6월 22일, 야드비가는 딸을 출산하였고, 그 아이는 엘즈비에타 보니파키아로 세례를 받았다. 한 달도 안 돼 아이와 어머니 모두 산후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야드비가는 1399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야드비가는 아기와 함께 바벨 성당에 안장되었다. 폴란드 국왕이라는 요가일라의 지위는 야드비가의 죽음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35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왕위를 잘 유지해나갔다.
전설
야드비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그녀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성녀로 여겨졌다. 기적을 단언하는 수많은 전설들이 야드비가의 성인 자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야기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전설 두 가지는 '야드비가의 십자가'와 '야드비가의 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야드비가는 종종 바벨 성당의 북쪽 측랑에 걸려있는 크고 검은 그리스도 수난상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이러한 기도식 가운데 한번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신 그리스도께서 야드비가에게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진다. 종종 "성 야드비가의 십자가"라고도 불려지는 그 그리스도 수난상 십자가는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그 아래엔 야드비가의 유골이 자리하고 있다.
또다른 전설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보석 조각을 자신의 발에서 취해 도움을 구하는 가난한 석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여왕이 떠났을 때, 그 석수장이는 회반죽 위에 그녀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야드비가의 발자국이라고 주장되는 "야드비가의 발"은 지금도 크라쿠프의 교회들 가운데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출처 http://cafe.naver.com/westhistorystudy/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