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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견성(明心見性)
명심견성(明心見性)이란 마음을 깨끗이 닦아 본성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견성을 해야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열반경에 이르길 "본래 자비는 중생들의 佛性이나, 佛性이 번뇌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어서 佛性이 곧 자비이자, 如來임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보적경 가섭품에서는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청정무구하다.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으로서 항상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진리를 구할 것이고 밖으로 찾아서는 안 된다. 누가 내게 성내더라도 마주 성내지 않고, 두들겨 맞더라도 마주 두들기지 않고, 비난을 받더라도 마주 비난하지 않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비웃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열반경》에서는 중생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지만, 오랫동안 번뇌에 가려져 있어 자신의 불성을 깨닫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본래 지닌 불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불성이 없거나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번뇌망상과 업장이 그것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텅빈 하늘로 비유해 보자. 하늘 자체는 구름이 끼었다고 해서 더러워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맑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구름이 걷히면 하늘은 본래의 실상을 드러낸다.
《보적경》의 가섭품에서도 본성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본래 청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이며, 수승한 열반의 경지이므로 영원하고 즐거우며 청정하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닦아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는 모든 정법 수련의 핵심 사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본래의 성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주만물의 본성인 眞善忍으로 자비와 선량, 진실함과 지혜, 그리고 분노하지 않는 화평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인간세상에 출현한 성인들은 모두 자비 사랑 어짐 등의 덕목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알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우리는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존중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바람 자체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욕구가 지나쳐 집착으로 변하면 문제가 생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치거나 상처를 주기도 하고,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원망과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툼과 분노, 질투와 과시욕, 지나친 자존심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 등은 마음의 평화를 가리는 먹구름과 같다.
이러한 먹구름이 짙어지면 마음은 본래의 평온함을 잃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하며,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괴로워한다. 결국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성인들이 말하는 자비와 사랑, 진실을 보는 지혜는 이러한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으로 생긴 업장에 가려져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
남을 자비롭게 대하고 싶어도 마음속에 쌓인 원망이 앞서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싶어도 순간적인 분노가 먼저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본래의 자비롭고 평화로운 성품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핵심은 마음의 평화를 가리는 번뇌와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을 살펴 이를 해소하는 데 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겉으로 드러난 감정만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노를 억지로 참는다고 해서 분노의 원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질투하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질투심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잡초의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잎만 잘라내는 것과 같다. 잠시 깨끗해 보일 수는 있지만, 뿌리가 남아 있으면 잡초는 때가 되면 다시 자라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분노와 질투, 원망과 두려움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그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 고정관념을 깊이 살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가? 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괴로움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업과 번뇌를 줄이는 수행은 단순히 나쁜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아니다. 그 감정을 되풀이해서 일으키는 욕망과 집착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렇다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빈털터리로 살라는 뜻은 아니다. 결혼하지 말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그것에 얼마나 얽매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욕이 일어날 때 그 욕구에 무조건 끌려다니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타인의 의사와 권리를 침해하는 강간이나 간음의 죄업을 저지를 수도 있다.
반대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심한 욕구불만과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욕구를 지혜롭게 다룰 수 있다면, 욕망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다른 욕망도 마찬가지다. 돈을 벌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돈과 지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거나, 남보다 앞서기 위해 양심을 저버린다면 그 욕망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의 목적은 삶에 필요한 물질적 요소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집착 없이 지혜롭게 선택하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몸과 생각, 감정과 욕구를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몸이 늙거나 병들면 자신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고, 남에게 비난받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괴로워한다.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그 분노에 휩쓸려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몸의 감각은 변하고 생각은 끊임없이 바뀌며 감정과 욕구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몸과 마음의 구성 요소인 오온(五蘊)을 영원불변하는 참된 자아로 여기며 붙잡지 말라고 가르친다.
성인들이 한결같이 마음을 닦고 안으로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라고 가르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외부의 모든 조건을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단순히 진리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어떻게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지 직접 살펴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밝혀 본성을 깨닫는 명심견성의 길이다.
본성이 후천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이치와 관념과 집착심을 왜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륜대법 李洪志 사부님의 자세한 가르침을 소개하니 수행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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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심 제거
집착심(執著心)이란 연공인이 어떤 사물, 어떤 목표에 대해 내려놓지 못해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초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몹시 고집을 부리면서 권고를 듣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세간(世間)에서 공능을 좀 얻는 것을 추구하는데, 이는 필연코 고층차로 가는 수련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심리가 강할수록 버리기가 더 어려워져, 심리적으로 더욱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안정하지 못하며, 뒤에 가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여기는데, 심지어 배운 것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다.
집착심은 사람의 욕망에서 생기는 것으로, 추구하는 목표나 목적이 뚜렷한 국한성을 가지는 특징이 있어 비교적 명확하고 구체적인데, 흔히 그 본인은 인식하지 못한다.
속인은 집착심이 무척 많아 어떤 것을 추구하면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연공인의 집착심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공능을 추구하거나, 어떤 광경에 사로잡히거나, 어떤 현상에 열중한다든가 하는 등등이다.
연공인으로서 당신이 그 무엇을 추구하든지 모두 옳지 않기에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한다. 도가(道家)는 무(無)를 주장하고 불가(佛家)는 공(空)을 주장하여 공문(空門)에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는 최종으로 공무(空無)에 도달하려는 것이기에 모든 집착심을 제거해야 하는데, 당신이 버릴 수 없다고 하는 것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예컨대 공능에 대한 추구이다. 당신이 추구함은 바로 사용하려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우리 우주의 특성과 상반되는 것으로, 실제로는 여전히 心性문제다. 얻으려는 것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 뽐내거나 과시해 보이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남에게 과시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가령 당신의 사용목적이 아주 순수해서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라 해도, 그 좋은 일을 당신이 한다 해서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속인들의 일을 당신이 초상적인 방법으로 상관한다 하여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전수반(傳授班)에서 70퍼센트 되는 사람들의 천목이 모두 열렸다고 한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다. 왜 나는 감각이 없는가? 돌아가서 연공할 때 주의력을 천목에 집중해 생각하기에 머리가 아플 정도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집착심이다.
사람마다 신체소질이 다르고, 근기(根基)도 다르기 때문에, 천목이 동시에 보일 수 없으며 모두 같은 층차에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모두 정상이다.
집착심은 연공인의 공력이 정체되거나 배회하는 상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심해지면 연공인을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특히 일부 공능은 心性이 좋지 못하면 나쁜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다. 心性이 믿음직하지 못해 공능으로 나쁜 일을 한 실례도 있다.
어떤 지역의 한 남자 대학생은 사유를 통제할 수 있는 공능이 나왔는데, 이 공능은 자신의 사유로 다른 사람의 사상행위를 지배할 수 있어 그는 그것으로 나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연공할 때 어떤 광경이 나타나면 꼭 똑똑히 보아내고 결말을 알아보고자 하는데, 그것 또한 집착심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취미에 인이 박여 쉽게 버리지 못하는데, 이것 역시 집착심이다. 근기(根基)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사람은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연공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일부 것들을 얻기 위해 연공한다.
후자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연공의 목적에 국한성이 나타나게 한다. 이러한 집착심을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연공해도 功이 자랄 수 없다. 그러므로 연공인은 모든 물질적 이익을 담담하고도 담담하게 보아야 하며, 아무런 추구도 없이 순리를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집착심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 이것은 연공인의 心性이 어떠한가에 달렸다. 心性을 근본적으로 제고하지 않고, 그 어떤 집착심을 갖고서는, 모두 수련 성취할 수 없다. 《출처: 法輪功 李洪志》
불성(佛性)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 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이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사상 중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로 자신의 대뇌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은 당신의 일생을 저애하고 지배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흔히 이기적이고 또 좋지 않기에 사상업력을 생기게 할 수도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또 업력의 통제를 받게 한다.
사람은 主元神에 의해 주재(主宰)되어야 하는데, 主元神이 마비되어 관념으로 대체된다면, 그럼 당신은 무조건적으로 투항한 것이 되어, 생명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좌우지된다.
당신 자신은 선천적인 자기 자신으로서 불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물을 인식할 때 흔히 일종 관념이 형성되기 쉬운데, 이런 관념은 자기가 아니다.
그 어떤 관념도 없이 문제를 보면, 모두 자신의 선량한 본성에서 나온 견해가 있고, 진정한 자신의 견해가 있게 되어, 자비롭고 선한(慈善) 마음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당신 자신이 자신을 더욱 드러내 노출할 때일수록 당신의 사상은 더욱 높고, 더욱 진(眞)에 가까우며, 당신의 선천적인 선량한 본성의 경지(境界)를 갖게 된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극미시하에서, 극미시하의 미립자 중에서 사람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다. 사상의 틀을 배제하고 보면 사람의 선량한 성격(脾氣), 천성, 특성,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해 내기가 쉬운데 그것이 진정한 자기이다.
主元神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개변될 수 없다. 主元神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主元神의 본질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의 각종 관념, 각종 업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고, 덮이며, 완전히 둘러싸여 본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主元神 자체는 개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업력은 그렇게 미세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업력은 속인 중에서 빚어낸 것으로 속인 중의 물질이다. 이것은 그렇게 미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만들 때의 그것은 극히 미시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섞여 들어갈 수가 없고, 단지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었을 뿐이다.
본성은 사물에 대하여 자체의 견해가 있다. 만약 정말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의 본성적인 견해를 되돌려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온 그곳이다.
초기에 형성된 당신의 관념이 바로 초기에 당신을 만들어낸 곳의 관념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의식관념을 타파하기란 아주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다.
법(法)은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부동하게 체현한다. 이 층차에는 이 층차의 체현이 있다. 당신이 이 한 층차에서 산생된 생명이라면 당신은 이 한 층차 법(法)의 관념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 되돌아 나온다면 당신의 인식표준은 곧 거기에 있게 되는데 그 표준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업력에는 眞 · 善 · 忍의 표준이 없는바, 그것은 그것이 이 관념을 형성할 때의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하며, 사람을 속인들이 말하는 아주 교활하거나 혹은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되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수련할 때 부동(不同)한 사상업력이 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수련을 저애한다.
사람이 만약 업력의 저애가 없다면 수련은 아주 쉬운 것이다. 이 업력은 여러 해 전에 어떤 상태 하에서, 어떤 도덕표준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곧 이런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한다. 만약 이것이 많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의 일생은 모두 그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곧 이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며 곧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은 없다.
그 자신은 완전히 그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선량하지 않은 후천적 관념에 포위되고 가려진다. 그는 진정하게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자신의 표준이 없게 된다.
관념은 대뇌의 사상(思想)속에서 형성되는데, 관념이 만든 사상업은 사람의 머리에서 하나의 업력덩어리를 형성한다. 선념(善念)이라고? 불교에서는 생각만 해도 곧 業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른바 선념이란 더욱 높은 표준에 서서 가늠해 보거나 眞·善·忍이란 더욱 높은 표준으로 보면 역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속인이라면 모두 자신을 찾을 수 없는데, 이 관념은 사람의 일생만 좌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려가며 계속 좌우지한다. 언젠가 변화가 일어나면 그 때서야 제거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줄곧 내려가며 좌우지한다. 이 관념이 더욱더 강대해지면 정말 그 자신은 없어지게 된다.
지금 업이 구르고 구른다고 말하는데, 모두 이러한 정도에까지 굴러왔다. 당신이 그러한 속인을 보라. 온종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부동(不同)한 사람, 부동한 근기, 부동한 오성(悟性)이라고 함은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누가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의 불성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그는 희망이 있다. 누가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후천적인 의식관념에 너무나도 깊이 매몰된 것으로, 희망이 없다.
(출처 : 전법륜2)
제자 :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마음이 아닙니까?
사부 : 그것은 물론이다. 매 사람은 세상에서 살면서 모두 자신을 위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수많은 사심(私心)이 생겨난다. 사(私)가 있으면 쉽게 정(情)에 이끌려 수련 중에 아깝고 버리기 어려운 것이 각 방면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수련에서 집착을 내려놓기 어렵다. 때로는 대법을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역시 집착심에 의해 자신의 역할을 수호하려 하고 자신의 명예를 수호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수호한다.
속인이 표현하는 것은 더욱 복잡하다. 자신이 벼슬하기를 좋아하고, 선조와 가문을 빛내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돈이 있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보다 한층 뛰어난 것을 좋아하는 등등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수호하는 것은 바로 정(情)과 사(私)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표현이므로 제거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비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를 때렸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한테서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어느 면이 잘못돼서 조성된 것이 아닌지를 찾아야 한다. 이런 모순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이 사(私)를 버리고, 자신의 집착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 개인수련 중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데까지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하는바 당신의 적을 용서하는 것을 포함해서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하는 적은 인간이 구분한 적이며, 사람이 이익을 위해서 구분한 것이지 신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요구도 높다. 신이 어찌 인간을 적으로 여기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수련과정 중에서 어떠한 일에 부딪히든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얻었을 때에도 역시 다른 사람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가 이것을 잃으면 그에게 어떤 손해가 있지 않을지, 그의 마음이 괴롭지 않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일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先他後我)하는 정법 정각으로 수련하여 원만을 이루게 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사(私)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자신’을 제거할 수 있다. 당신들이 수련이 잘된 그 부분은 틀림없이 방금 내가 말한 것과 같고 모두 이러하다.
그러므로 당신들 이쪽에서 볼 때 당신들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닦고, 안에서 찾으며,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것을 적게 보고, 하는 일마다 내가 말한 대로 따라 할 수 있다면 사실 당신들은 바로 정진 중에 있는 것이다.
(출처 : 99년 오스트레일리아 설법)
제자 : 교만, 질투 등과 같은 자신의 집착을 인식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늘 제거해 버리지 못합니까?
사부 : 만약 당신들이 정말로 이런 것들을 그토록 중하게 본다면 곧 그것을 억누를 수 있으며, 그럼 당신은 그것을 약화시킬 수 있고 점차 철저하게 제거해 버릴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나는 알고 있다고 느끼고, 또 아주 조급해하지만, 그러나 실천 중에서 당신은 결코 진정으로 그것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사실 당신은 단지 이런 사상 활동을 오로지 보고 느끼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뿐, 당신은 그것의 행위를 억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단지 생각만 했지 결코 실천하여 닦지 않았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당신은 나 역시 마음을 써서 닦았고 나는 실천 중에서도 이렇게 했다고 말하는데, 또한 이런 정황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기간 양성된 것 역시 구(舊) 우주의 생명에 눌려 내려온 요소들에 의해 층층이 분할되었기 때문에, 매 한 층을 돌파하면 한 층을 제거해 버리고, 한 층을 돌파하면 한 층을 제거해 버리며, 한 층을 돌파하면 한 층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갈수록 약해지며 갈수록 적어진다. 그것은 단번에 전부 제거되지는 않는데, 이런 표현이 있다. 수많은 다른 속인의 마음을 포함하여 역시 이런 표현이다.
(출처 :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 법륜대법(파룬궁)은 李洪志 대사께서 1992년부터 중국에서 전하기 시작한 심신수련법으로, 몸과 마음의 정화효과가 탁월하여 현재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業이 많아 대부분 몸에 질병이 많기에 몸은 등한시하고 마음만 닦는 방법으론 병든 사람들을 해탈시킬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李洪志 사부님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성명쌍수의 大法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전법륜은 인생을 살면서 꼭 알고 싶었던 진리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전법륜에는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왜 인간으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지, 우주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특성(우주의식, 우주정신)은 무엇인지, 영혼의 구성, 업력을 소멸하고 공덕을 쌓는 법, 수련과정 중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과 예방책, 제3의눈(천목), 숙명통, 빙의현상과 방언, 주화입마, 공중부양, 꿈과 몽유병, 자심생마, 살생과 육식문제, 질병의 원인, 영감, 근기, 청정심 등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겨 있어,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수행을 하든 모두 지도적 작용이 있습니다.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후천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여 인식한 정보를 대뇌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들이 자신의 정신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고 살면 거짓말에 속아 낭패를 보는 것처럼, 평소 우리가 무엇을 자주 보고 자주 듣는가가 수행에 아주 중요합니다. 컵 안에 든 흙탕물을 맑게 정화시키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계속 부어서 맑은 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탁해진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면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탁하고 어두운 에너지를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법력과 자비심을 고루 갖춘 대각자의 고차원 에너지가 발산되는 진실한 경전을 자주 보고,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선정과 가급적 유해물질이 없는 순수한 식품을 적당히 먹고, 아울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정화시키는 길입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대각자와 正法을 인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가짐(욕심과 불신여부)과 업력의 크기에 따라 효과 또한 다르므로, 단시간에 효과가 크지 않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꾸준히 보고 정진하는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전법륜 무료보기 => https://www.dafamedia.or.kr/book/HTML/zfl 중국의 공산당은 우주의 진리에 상반되는 무신론과 진화론을 퍼뜨리는 정당이자 邪敎로서, 현재 우주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 법륜대법(파룬궁)을 박해하는 큰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에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에 절대 동조하면 안됩니다. 불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대각자와 정법을 비방하고 파괴하는 일은 죄악이 몹시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1776년에 독일에서 결성된 일루미나티라는 단체의 조직원들이 만든 것으로, 무신론을 선전하며 인과응보나 윤회 같은 것도 믿지 않고 죽으면 만사가 끝이라는 사상을 어릴 적부터 세뇌교육시키는데,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도덕이 크게 타락하고 물질만능주의의 부정적인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현재 중국은 코로나로 인하여 공산당 조직에 가입한 사람들이 무수하게 죽었는데, 혹자는 사망자 수를 1.5~2억을 추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산당 조직에서 탈퇴를 선언한 후 진리의 편에 서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 진언을 진심으로 묵념하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오히려 평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강성한 로마제국이 멸망했던 원인도 진리를 전하던 예수와 그 신도들을 300여년간 잔혹하게 박해했기에 그 응보로 페스트 전염병이 돌아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들과 박해받는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동정하고 지지했던 사람들, 박해받는 예수의 제자들을 몰래 보호한 의인들은 페스트 역병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필독) 폼페이 멸망의 진실과 교훈 예부터 高人들은 소위 "하늘의 道는 소원하거나 친함이 없고 오직 선인(善人)과 함께 할 뿐이다."라고 하며 모든 악행을 금하고 선행을 권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앞으로 더 평안해지고 부강해지는 방법은 온갖 악행을 하는 공산당을 멀리하고, 진리의 편에 서서 도덕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필독) 코로나 전염병을 퍼트리는 神과 나눈 이야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