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장군家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장검 두자루가 보관돼있다.이 장검은 기존의 대부분의 전통 칼과 달리 만든 사람과 제작 시점이 나온다. 갑오년인 1594년,“갑오년 4월 태귀련(太貴連)ㆍ이무생(李茂生)이 만들었다.”
현충사에 가 본 사람들이 가장 놀라고, 궁금해 하는 것은 보물 제326호인 이순신 장군의 두 자루 장검이다. 길이는 각각 197.2cm, 196.8cm이고, 무게는 4.3kg이다. 웬만한 보통 사람들은 칼을 휘두르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역사성이 있고 사용한 격검흔(擊劍痕)이 없는 의장용,의례용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자중 태귀련은 《난중일기》에도 두어 차례 등장한다.
▲ 1595년 7월 14일. 태구련(太九連)·공태원(孔太元) 등이 들어왔다.
▲ 1595년 7월 21일. 태구련(太九連)과 언복(彦福)이 만든 환도(環刀)를 충청 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눠줬다.
현충사에 소장된 장검에 새겨진 태귀련(太貴連)과는 태구련(太九連)과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인으로 보인다.
7월 21일의 환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다.
태귀련과 함께 장검을 만들었다는 공태원(孔太元)도《난중일기》에 공태원 혹은 공대원(孔大元)으로 나오나 같은 인물이다. 공태원은 특히 이순신이 1593년 웅포 해전을 한 뒤 쓴 보고서인 <토적장(討賊狀)>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에 왜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태원은 《선조실록》에도 나온다. 선조 33년(1600년) 1월 28일, <좌의정 이항복이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논하는 차자를 올리다>에 따르면, 1590년 일본에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일본 망명자 사화동(沙火同)과 우리나라를 침입했던 왜구 신삼보라(信三甫羅)·긴요시라(緊要時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을 보내올 때 함께 풀려난 우리나라 포로 130여 명의 한 사람이었다. 일본 글자를 아는 사람으로 특기되어 있다. <백사별집=노승석 저 교감 난중일기 p303>
이순신의 장검에 새겨진 검명은 이순신 자신의 친필이다. 제작자들이 쓴 것이 아니다. 이순신 자신이 쓴 글귀를 제작자들이 새긴 것이다. 검명은 이순신이 전해주었다고 하나 난중일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정조때 만든 '충무공전서'에 등장한다고 한다.
장검에는 각각 “三尺誓天, 山河動色”과 “一揮掃蕩, 血染山河”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은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구나=산과 물의 빛(색)이 놀라서 변하는구나”란 뜻이다.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란 뜻이다.
두 검명 중 하나인 “三尺誓天, 山河動色”은 <난중일기>에도 거의 비슷한 글이 메모 형태로 나온다. 검명과는 한 글자 차이다. “尺劍誓天, 山河動色(척검서천, 산하동색)”이다. 그 뜻은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구나”이다. 三尺(삼척)과 尺劍(척검)의 차이다.(노승석 저 교감 난중일기 p171)
그런데 사실 <난중일기>속의 이 메모는 이순신의 글이 아니다. 이순신이 존경했고, 이순신과 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았던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 1103~1142)의 말과 글, 삶을 정리한 《정충록(精忠錄)1584》이라는 책의 <발문(跋文)1585>의 문장인데, 바로 이순신의 멘토였던 서애 선생이 선조의 명으로 쓰신 글이다 .
임진왜란 이전의 정충록은 다 멸실되고 1709년 숙종 35년데 다시편찬했고,영조 45년 (1769)에 조익도의 집에 있던 것을 또 다시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이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346호로 지정돼있다.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충록의 정확한 이름은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顎武穆王精忠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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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서애 류성룡 선생이 쓴 정충록 발문의 원문을 올려본다.
‘산하동색(山下動色)’ 네 글자를 악비가 먹물로 등에 새겼다고 번역하였으나,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앞의 ‘척검서천(尺劍誓天)’ 네 글자를 등에 문신했다고 보아야 문맥이 바르게 통한다. 앞의 것이 주개념이고 뒤는 보조개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을 강조하기 위해서 뒤의 네 글자가 뒷받침하는 문장이다.
위 글은 이배사에서 활약하고 계시고 이순신 문학을 연구하시는 조신호 박사(이배사 닉네임은 '명량')님께서 서애집에 있는 글을 확인하시고 쓰신 글이다.
~(번역문생략)~
만력 13년(1585, 선조18) 3월 하순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신 류성룡은 교시를 받들어 삼가 쓴다.
정충록 발문 원문(서애집)
宋氏南渡而後 中興之機有三 而皆以小人敗 方汴京陷沒 金人不能自有 委之而去 郡邑豪傑 各守其土 以待王師 於是 李綱建遣張所收河北 傅亮收河東 兩河旣收 則天下固宋之天下也 及宗澤留守京都 招撫羣盜 以百萬計 連請過河 使宋人不爲退縮偸安之計 按汴之故 畫河以守之 則金虜必不敢蹂躙中原 此二機 皆爲黃潛善,汪伯彦所沮 最後武穆以英偉傑出之才 奮不共戴天之志 從天下忠勇之士 薄伐問罪 兵鋒所至 勢如風雨 醜虜遊魂 逃遁不暇 而趙氏之遺民舊家 日望㫌旗 燕山以南 已有破竹之勢 視前二公之爲 事愈難而功過之 恢復之形 盖十八九成 時則有秦檜者潛爲虜間 巧弄萋斐之譖以敗之 三機旣失 則天下之事 遂不可爲矣 然李綱終於擯棄 宗澤卒於發背 而公之得禍 尤酷於二子 其不幸 又爲如何 而秦檜之罪 浮於潛善,伯彦遠矣 詩曰 悠悠蒼天 此何人哉 嗚呼痛矣 世謂檜之姦邪 難於辨別 故高宗惑之 臣則常以爲使檜至此者 高宗之心爲君親不誠者 有以致之也 夫君臣之義 父子之倫 根於天性 本於民彝 結於民心 而不可解者也 二帝爲虜 九廟蒙塵 少有忠義之心者 皆欲北首爭死敵 彼高宗獨無此心乎 便可卽眞 來救父母之言 亦可以少動矣 如武穆者 初亦湯陰之一男子耳 尺劍誓天而山河動色 四字沮背而鬼神悲泣 出萬死不顧一生之計 憤憤不已者 其心將欲何爲 不過爲君父復讎耳 如使高宗稍有臥薪嘗膽泣血枕戈之志 則鬼蜮之徒 雖累千百 何足以眩其明而抵其隙 以壞我長城哉 臣故曰 高宗之失 在於不誠 不在於不明 盖誠則明矣 不然 節義之褒 勇略之諭 寢閤之命 精忠之錫 前後丁寧 其知武穆不爲不審 金字之牌 胡爲一日十二於郾城之下哉 臣之此言 亦春秋微顯闡幽之意 而公羊子所謂大居正者是也 近有蔡淸者著論 妄議公不當班師 譏公不知權 噫 使公而果出於此 則愈足以驗檜之譖 而益高宗之惑也 世豈有大將主兵於外 君命之還而不還 而可以成功者哉 假令一卒臨江以守而責公專輒 則公之本心 何以自白於天下後世耶 古所云將在軍 君命不受者 非此之謂也 公惟知鞠躳盡瘁 義之與比 以徇臣子之節而已 至於成敗利鈍則天也 公何固必於其間哉 萬曆甲申 有譯官來自燕都 以精忠錄一帙進者 上覽之嘉歎 下書局印出 而題跋之命 謬及於愚臣 臣敬取而卒業 則凡公平日所著詩若文及宋史本傳 古今人敍述詠歌之辭 裒集無遺 間爲圖畫 以象公經歷戰陣之跡 英姿颯爽 風采飛動 令人不覺髮竪冠而目裂眥 繼之以流涕也 嗚呼 非忠匪臣 非孝匪子 前乎百世之上 後乎萬世之下 所以建立人極 綱紀棟樑於宇宙間者 何莫非斯道也 人心無古今之殊 斯道有晦明之異 而國之廢興存亡關焉 今是編也 其意在於課忠責孝 有勸有懲 其感於人心者深矣 况君子盡忠而賈禍 小人以譖而得志 亦豈非來世之龜鑑耶 然則聖上之所以嘉歎是錄 而欲廣其傳者 其爲世道慮至矣 後之觀者 若但喜其戰陣之形 擊刺之狀 而欲快心於狼居之北 不知以忠孝爲本 則是直衛,霍之事耳 豈足以知武穆哉 而亦非殿下今日印頒是書之意也 萬曆十三年三月下澣 資憲大夫禮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提學臣柳成龍 奉敎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