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루케도가 쓴 “나의 사랑하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용소 벽에 믿음의 산 증거가 있습니다. 한 포로가 벽에 이런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사랑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이 아무 말씀 없으셔도 나는 그분을 믿는다.”뭐 이런 글들은 사실 우리에게 별 감흥이 없습니다. 저만해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해서 유대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을 해봅시다. 이 글자를 벽에 새긴 사람을.
그는 손에 깨진 유리조각이나 끝이 날카로운 돌을 쥐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이 글을 수용소 한쪽벽에 새깁니다. 왜? 새겼을까요? 의미가 있다고 보세요? 그의 의도를 아시겠어요? 당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보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왔을 때 이 수용소를 찾아올 그의 자녀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이 수용소에 갇혀 절망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도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대선을 보면서 우리 청소년들이 눈과 귀를 막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되겠다는 분들과 그 지지자들을 보고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청년을 위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주택지원을 하고 육아 지원을 하겠다는 그 분들이 주고 있는 메시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통령이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죠.)
2013년 김연아 선수가 1년이상 스케이트를 타지 않다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합니다. 우승을 한후 캐나다 앵커가 물었습니다. “다른 한국선수들에게 올림픽에 나갈 기회를 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제 소치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출전권 3장을 얻었습니다. 느낌이 어떤가요?”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서 올림픽 같은 큰 무대에 서는 것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성취해서 행복합니다.”그때 그녀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그래서 17살의 김해진, 박소연선수가 소치 올림픽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것이 리더입니다. 다음세대에 대한 책임을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장면에 감동받았습니다. 크리스찬은 리더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을 생각하기를 당부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속에서도 이런 확신을 새길 수 있는 손은 어떤 손일까요? 희망이 사라진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답은 하나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로 선택한 믿음의 눈이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잡는 믿음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히11:1절에서 고백하듯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거거나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으며, 성령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삶- 풍랑과 파도를 맞아야 하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이나 권력의 힘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인생을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그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서 고난없는 인생, 형통한 인생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기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36-37절“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예수님이 함께 타고 있는 배가 큰 광풍에 시달리며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타고 있는 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주님이 함께 하니까 당연히 안전해야 하는데 위험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인생에도 고난과 역경은 찾아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로 쉬게 하리라”주님안에 참된 안식이 있다고 하셨지만 실제 생활속에서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과 불행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유익이 없다면 그래도 믿어야 할까? 이런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재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을 이해하는 전혀 다른 눈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큰 광풍과 큰 물결은 공포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런 상황은 다스릴 수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38절에 제자들은“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죽이기 위해 피웠던 불구덩이는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들을 붙들고 있던 병사들을 태워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사자의 부르짖음을 들으면서 다니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왕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감추는 대신 공개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은 두려워허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믿음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속의 거인 지니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다듬어져가고, 사람들과 우리가 만날 고난과 역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유익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고난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요, 고난이 우리 인생의 결론이 아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나아가 고난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만나는 풍파와 거친 파도는 내 인생을 파멸시키는 위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뜻이요, 믿음으로 주를 신뢰할 때 인생의 위기는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다듬어가는 하나님의 손길일 뿐입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배는 위기에 처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예수님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짐보따리, 옷보따리 같은 것을 베고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좋은 잠이 쌓인다. 좋은 나를 만든다.”잠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잠을 설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잘 자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머리만 대면 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편안히 잘 줄 아는 신공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 광풍에 그 풍랑속에 잠을 자다니? 많은 신앙인들이 여전히 작은 걱정 거리 하나만 있어도, 밤을 지새우며 걱정합니다. 걱정을 습관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속도 편하지, 어떻게 주무시나? 예수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 풍랑속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가 배워야할 믿음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은“Allmight God”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입니다. 모든 일이 가능하신 분입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아얄론 골짜기 위에 태양을 세웠습니다. 히스기야의 일영표에 태양을 15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갈멜산 위에 불을 내려 엘리야의 제단을 태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열고 천으로 감싼 시신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맹인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한센씨 병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야곱, 노아,에녹,모세,여호수아,다윗,다니엘이 믿었던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던가요? 만약 우리가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다면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주관하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미국 어느 시골에 치료를 위해 한 남자가 요양을 왔습니다. 그의 집 앞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날 꿈에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얘야! 그 바위를 매일 밀어라”이 남자는 자기에게 바위를 옮기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려는구나 생각하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10개월이 지났지만 바위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실망했습니다. 그날 밤 주님이 꿈속에 나타나자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10개월이나 그 바위를 밀었지만 그대로 있습니다.”그러자 주님이“내가 언제 바위를 움직이라고 했니? (to move the rock)밀라고 했지(to push against the rock), 실망하지 말고 거울을 보렴”남자는 꿈 에서 깨어 거울을 본 순간 그 안에 다른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위를 미는 10개월동안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바위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뭔가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위를 옮겨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안 옮겨지니까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하나님은 램프속 거인 지니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위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미는 믿음과 순종의 발자취를 만드는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매일 여리고 성문앞으로 나간 것처럼 매일 기도하고,말씀보고,은혜받고,주님처럼 살아보고, 그렇게 발걸음을 만들어가면 인생의 꿈을 이루고, 기도의 응답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내 앞에 놓여진 문제가 산처럼 크게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그 문제가 겨자씨만하게 보입니다. 내 앞에 문제의 바위가 여전히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최종 결과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훨씬 큽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실패는 영원한 성공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잠시 등장한 엑스트라이자 도우미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주님이 믿음이 아니라고 하신 두가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는 것도 믿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위기속에서 주님을 깨운 것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두가지는 우리가 믿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것들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인 코스프레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인생의 위기를 만나야 기도의 자리에 찾아와 울부짖는 것도 믿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이 나면 찾는 119가 아니고, 강도가 집에 들어오면 연락하는 112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와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게, 마귀에게, 각종 문제와 질병과 고통을 향해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습니다. 요14:12절의 약속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인생의 위기마다 예수님을 깨우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서 벗어나 그 위기를 향하여 믿음으로 선포함으로서 홍해를 가르고, 무덤에 갇힌 나사로를 불러내는 믿음의 용사로 살아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