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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자 바나바(행 9:26-3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더위가 완전히 물러가고, 이제는 낙엽 떨어지는 가을인가 싶은데, 낮의 기온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을인데 가을이 아닌 것 같은 날씨입니다.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국가대표인 신유빈 선수가 경기를 하다가 쉬는 중에, 바나나를 먹는 장면이 유명해졌는데, 아열대 과일인 바나나가 춥다고 생각되어졌던 강원도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였는데, 갈수록 뜨거워지는 기후로 인하여, 우리의 먹거리마저 바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집집마다, 김장을 하는데, 배추 한 포기당 만원이 넘어, 김장을 포기하고, 포장김치를 선택하는 추세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포장김치를 만드는 회사들도 김치를 구하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폭염과 폭우로, 배추 가격이 크게 올라, “금배추”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채소 가격이 올라도 너무 많이 올라, 걱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아주 뚜렷한 나라입니다. 계절을 따라 이름 지어진 아주 유명한 드라마들이 있습니다. 가을 동화, 겨울 연가, 봄의 왈츠, 여름 향기입니다. 가을 동화와 겨울 연가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가을 동화의 송승헌과 송혜교, 겨울 연가의 배용준과 최지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을 동화의 촬영지인 속초의 아바이 마을, 겨울 연가의 남이섬, 여름 향기의 보성 녹차밭은 갔다 왔는데, 봄의 왈츠의 촬영지인 청산도는 아직 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속초의 아바이 마을과 가평의 남이섬을 갔다 왔습니다. 아바이 마을은 찾는 사람도 없이, 너무나 조용했는데, 남이섬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굿파트너”라는 드라마에서, 변호사 차은경 역인 장나라가 이혼 후, 딸과 단 둘이서, 캠핑 간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남이섬입니다. 남이섬을 갔다 온 후에, 방영된 회차에서, 그 캠핑 장면이 나오는데,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겨울 연가가 방영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이섬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의 수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관하지 않고, 붐비고 있으며, 년간 200만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그곳을 찾을까요? 그리움과 보고픔이 아닐까요?
여러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누가 그립습니까? 누구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에서, 변호사 우영우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러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이라고 정해진 멘트를 던지며, 자기를 소개합니다.
오늘 만나보고자 하는 바나바도, 똑바로 읽어도 바나바, 거꾸러 읽어도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이름만 보아도, 앞뒤가 똑같은 것처럼, 앞에서 볼 때나, 뒤에서 볼 때나,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보기가 좋은데, 돌아서면, 보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돌아서면, 욕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그리스의 구브로 출신인데, 본명은 “요셉”이고, “바나바”는 별명입니다.
사도행전 4:36절 말씀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섬입니다. 그 당시, 구브로는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 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를 생각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바나바”의 출생지를 구브로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가, 사도들의 눈에 띄게 되고, 별명을 하나 얻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본명보다 더 잘 알려진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
여러분! 별명이란 그 사람의 특징을 따라 지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었기에,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낙심하고 지친 사람에게 새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던 사도들이, 그의 별명을 바나바라고 부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위로자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을까요?
첫째, 바나바는 아낌없이 주는,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7절 말씀입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아낌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내놓았습니다. 바나바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전부 다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그의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은 교회에 커다란 격려와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면, 오천 명,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계속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성도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그들을 감당하기 위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마침 바나바가 자기 재산의 전부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의 헌신이 초대 교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아도니람 저드슨”이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턴에 있는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라고 하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했고, 가족들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는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로 향했습니다. 가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순교의 자세로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후, 그는 오랜 기간을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그리스도인을 미얀마 땅에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성도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선교의 횃불을 켜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섬김을 생각할 때에,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바나바는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화해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26-27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그 다메섹 성에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사울을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그를 피했습니다. 그가 제자된 것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의심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초대 교회가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1-2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 체포하려는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마 “이것은 분명히 작전이야. 분명히 교회 안에 들어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다음, 일거에 잡아넣으려는 속셈일거야. 속지 말아야 돼.”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된 삶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 때, 누가 그를 믿어 줍니까? 모든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는데, 누가 사울을 믿어줍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을 찾아갑니다. 사울 대신,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가를 사도들에게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바나바는 지금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바울의 신원보증을 서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여. 진짜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내가 보증합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인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변했고, 다메섹에서는 이미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28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사울을 믿을 수는 없어도, 바나바는 믿을 수 있었기에, 바나바의 말을 듣고, 사울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울을 향한 의심을 거두었습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떳떳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본격적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한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한 사람, 바로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바나바 같은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믿어주는 사람, 화해시켜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떤 모임에서든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믿어주고, 화해시켜 주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나바는 위로하며 격려하는,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25-26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핍박을 피하여, 흩어져야만 했고, 흩어진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핍박으로 인해, 처음으로 문화를 뛰어넘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노력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이방인의 땅인 안디옥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도행전 11:21절을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습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전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즘 말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초대 담임목사가 되고, 바나바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나바가 아주 특별한 일을 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성도들의 도움으로, 다소로 피신하여, 그곳에 은둔해 있었습니다.
꿈과 열정을 억누른 채, 숨어 지내야 했던 사울의 심정이 그동안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잔뜩 의기소침해 있을 때에, 자기를 찾아 주었으니, 사울의 입장에서 바나바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바나바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사울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가, 1년 동안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불사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오늘의 바울을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홀로 버려진 사람, 실의에 빠진 채 절망감에 빠져 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먼저 찾아가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 따뜻한 손길 하나 때문에, 그들이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다시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나바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하며, 격려함으로, 새 힘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바나바는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주님을 만난 사울이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을 때, 사울을 의심하며 불안해하던 사도들에게, 사울을 보증하며, 소개했고, 그런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출입하며, 한 사람의 성도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교회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도, 바나바는 사울에게 최고 지도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바나바는 아무도 찾지 않던 사울을 찾아가, 그를 그의 교회의 부목사로 데리고 왔고, 바울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다가, 아예, 부목사인 사울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내어주고, 바나바는 부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사울의 이름은 바울로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바나바의 도움이 있었기에, 사울에서 바울로 바뀔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사역은 날마다 확대되었고,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를 데리고 왔던 바나바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중된 자가 먼저 될 때의 기분, 사촌이 땅을 사면, 내 배가 아프다는데, 바나바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아주 많이 싫어했을 것입니다. 당장 내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자기를 앞서가는 바울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까지도 내어줍니다.
여러분! 아마도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바울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줄 알았던 바나바가 있었기에, 바울이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워준 바울이 위대한 지도자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무대 뒤로 겸손히 숨을 줄 알았던 바나바가 있었기에, 바울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바나바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누가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누구라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본을 보이셨고, 바나바가 뒤를 이었고, 또 그 뒤를 바울이 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름같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뒤를 이어왔습니다.
나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바나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내가 바나바가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나바는 아낌없이 주는,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화해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며 격려하는,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낌없이 나누며, 섬기며,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해의 사람, 위로하며 격려함으로 새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같은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복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
바나바처럼, 아낌없이 나누며, 섬기며,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위로하며 격려함으로 새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