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류지미 2023. 6. 23. 22:30
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1940 년 녹음)
https://www.youtube.com/watch?v=d0ElJJ1xuOY
작품명 : 봉선화,
작곡: 홍난파, 작사: 김형준
노래: 김천애 (1919 -- 1995)
(퍼온 글)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천애 (1919-1995)
김천애님은 평양정의 여자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후 국내에 돌아와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8년 성악과장으로 제직했고 그후 숙명여대 음대교수, 음대학장등을 역임하다가 1972년 시민회관 (지금 세종문화 회관터)에서 갖은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미국에 건너 갔습니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국내에는 오지 못하다가 우리나라가 민주화 돤 후 1990년 국내에 잠시 돌아와 KBS-TV 트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얘기를 들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독신으로 살던 님은 1995년 3월 30일 미국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North Korean Song "Garden Balsam" 北朝鮮歌謡「鳳仙花」
https://www.youtube.com/watch?v=UD1XW9Nurz8
대한민국 가곡, '봉선화/봉숭아(김형준詩,홍난파曲)' I 한국인의 감성에 젖는다, 곡해설, 바이올린 연주, 테너 엄정행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I9hrqlMZKcE
작사 : 김형준, 1920년 詩
작곡 : 홍난파, 1920년 作 노래 : 테너 엄정행
: 곡 해설 :
청년 홍난파는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던, 열세 살 위의 큰 형님뻘이던 김형준에게 자신의 멜로디에 가사를 입혀 줄 것을 부탁하였고, 작사가 김형준(金亨俊, 1885~1965)은 자신이 살던 집 울 안에 시들어가는 봉선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 신세가 꼭 저 봉선화 같구려" 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고 있는 처량한 신세를 '울 밑에 선 봉선화'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이 가삿말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홍난파의 애상적인 멜로디와 김형준의 시(詩)가 합쳐져서 오늘날의 '봉선화'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 (중략)
미국 유학 중이던 젊은 시절의 홍난파는, 도산 안창호가 세운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 1913년 설립)'에 가입해 활동한 '민족운동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흥사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순사에게 검거되었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72일간의 수감 도중 갖은 고초와 고문을 겪었던 홍난파는, 일본의 회유와 전향 협박을 뿌리치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됩니다.
변절한 그는 결국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습니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하면서 친일행적을 남기는 등 아쉬운 행보를 걷고 말았습니다. ----- (중략)
'봉선화(鳳仙花)'의 순우리말은 '봉숭아'입니다. 해방 후 국어 표준화 운동으로 '봉숭아'로 불렀지만, 현재에는 '봉선화'와 '봉숭아' 둘 다 표준어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 (중략)
격동의 시대를 눈치껏 살아보고자 했던 한 음악가의 창작 활동이었든지, 그가 친일 행적의 길을 걸은 변절자였든지 간에, 가곡 '봉선화(鳳仙花)'는 극악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에 서럽고 고달팠던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되는 애상적인 가곡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 'BONGSEONHWA(=Balsam)' Song Explanation: 'Bongseonhwa' is Korea's first song and a national song that resists Japanese imperialism. It was released in 1920 with lyrics and songs by comparing the national plight of Japanese colonial rule to the balsam flower standing under the w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