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의 두려움도 없어라! 대한조선의 독립을 이끄신 고 유관순 열사여! 대한독립만세!
3.1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속에 빛난 애국학생들....
김희상선임기자(카미 영남타임)
어찌 민족의 심안에 치욕함이 없었으랴?켜켜히 나라 뺏긴 설움이 조상들의 가슴에 한으로 맺히고, 이마에는 절절한 피땀으로 얼룩졌다.
아! 아....삼천리 금수강산.
조국과 고향을 빼앗긴 그 치욕을 필설로 말함이 아마도 거친 풍랑이나 태산보다 더욱 높았다.
오늘은 102년 또다시 맞이하는 3.1독립만세운동의 당시 조선의 정신적 자유혼의 민족 등대에 저항의 불을 지핀 대 일본 식민지 항쟁의 전초적 국가기념일이다.
아직 민족은 대동아전쟁의 개전에 앞서 식민지 수탈과 조선에 대한 억탈적 감시와 겁박으로 일본의 야만적 식민지의 수탈과 조선인의 폭력과 억압,조선의 민족정기와 정신을 송두리째 멸절시키고 있었다.
당시 치욕의 조선훼파를 지켜보면서 분연히 일어선 민족자각의 대일본항쟁의 정의는 뜨겁게 치솟았다.
독립선언서의 전파와 확산운동의 이바지 주도역은 경성을 중심한 전문학교의 학생들과 청년,교사가 중심인 자발적 성토이며 저항운동이었고,당시 3.1운동과 더불어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고조,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이를 믿었기에 만세운동은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이처럼 조선총독부가 사찰한 3·1운동의 확산 원인은 대부분 학생들의 거룩한 애족 독립만세시위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3.1독립만세운동의 각종 유인물 그리고 만세투쟁시위 경험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학생운동은 민족 차별에 분노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3·1운동의 물결이었다.
3·1운동의 암묵적 초기 기획 단계부터 학생들의 활약은 대단히 치밀하고,조직적이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공포한 ‘2·8 독립선언’이 3·1운동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자답이다. 도쿄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준비하면서 와세다대학 학생인 송계백을 국내로 밀파.1919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보성중학교출신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인 최린, 보성중학교 동문 선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그리고 최남선을 만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여주었다. 바야흐로 최린은 손병희 에게 “조선의 젊은 애국학생들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선배로서 좌시할 수 없다”며 독립운동 준비에 열의를 표했다.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1919년 1월 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모의. 1월 26일경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등과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 등을 비롯 지하비밀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문제를 본격적이며 치밀하게 논의했다.
2월 20일에는 전문학교별 대표를 뽑고 일경에 체포될 경우 다시 시위를 이끌어갈 책임자도 정했다.
2월 22일 박희도가 전문학교 대표들에게 종교계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일 예정이라는 소식을 비밀리 알렸고,2월 25일에는 3월 1일 오후 2시에 종로 탑골공원에서 종교계 주도의 독립선언식이 열린다는 급전도 전했다.
2월 28일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후 4시경 정동교회에서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이 3월 1일이 되자 학생들을 파고다 탑골공원으로 이끌었다.
학생 독자 시위 예정일이던 3월 5일에는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생 시위의 확대를 우려하며 3월 10일 서울 시내 중등학교와 전문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들은 선언서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시위를 일으켰다. 휴교 조치가 3·1운동의 확산에 촉매제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주목받은 것은 애국 여학생들의 등장이다.
유관순은 3·1운동에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여학생의 상징적 인물이다. 충남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이었다. 3월 1일과 5일 서울 시위에 참여한 유관순은 임시 휴교령이 내리자 독립선언서를 들고 3월 13일에 귀향해 태극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4월 1일에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진 데는 학생들의 활약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조직적인 배포가 큰 역할을 했다.
아~저 치욕의 검은 하늘에 드리운 민족독립의 3,1만세운동은 조선의 새날과 독립에 푸른 희망이 되었다.
일제의 총칼아래 분연히 자신을 바치신 순국선열을 고개숙여 추념하면서 다시한번 내나라,내동포,내조국을 지키고자하는 뜨거운 약속을 지켜드린다.
3·1독립만세운동에서는 특히 애국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서 만세운동과 독립저항운동으로 자리매김한 빛의 등대라는 점을 다분히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아~호국의선열들이여!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민세!
대한동포 만세!
-김희상 저널타임즈 상임고문은 '나라사랑,국토사랑,독도가꾸기 국민운동본부'의 자문위로 활동하고 있다.
20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