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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향유 부음(12:1-9)
요절: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사건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보도를 예루살렘 입성 후에 위치시켰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왜 이 보도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에서 시간적으로 다른 곳에 들어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사건을 시간상으로가 아니라 내용상으로 나열했다는 것인데, 즉 이들은 향유 부은 사건을 예수님 수난의 서곡으로 보므로 이것을 수난장에서 보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 26장, 막 14장).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가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이 언제인지를 보도하지 않지만, 요한은 이곳에서 시간을 자세히 밝힙니다(„유월절 엿새 전에“). 이를 통해 볼 때, 요한은 수난을 위한 준비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사건을 정확하게 시간적으로 배열했다는 사실에 대해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이에 비해 공관복음서는 크게 보면 시간적이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사건을 대단히 짧게 요약하면서도 전체적인 내용을 살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단 몇 마디로 줄여서 보도하면서, 그럼에도 전체적인 윤곽을 보존하려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눅 7:36-50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과는 다른 사건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매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유월절 엿새 전에“: 요한은 눈에 띄게 정확한 날짜를 밝힙니다. 1:19-2:1에서도 이렇게 비슷한 날짜 언급이 나옵니다(1:29,35,43; 2:1). 이를 통해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의 활동을 보도할 때, 첫 주와 마지막 주를 다른 활동기간과 엄밀하게 구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의 한 주와 마지막 한 주가 예수님 생애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엿새“라는 말이 당시에 통용되는 그리스식으로 계산되었다면, 이날은 예수님 생애 마지막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므로 그때는 금요일 저녁 즈음이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규정상 멀리 가서는 안 되므로 예수님은 금요일에 다니시다가 안식일이 시작한 저녁에 베다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머무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오셨을까요(„이르시니“)? 요 11:54 이하에서 그분이 에브라임에 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직접 에브라임에서 그곳으로 오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 기록자들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여리고에서 활동하셨다고 보도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두 명의 맹인을 치료하시고(마 20:29 이하와 병행 보도), 삭게오를 영접하시고(눅 19:1-10), 사람들에게 은화 열 므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눅 19:11 이하). 그러다가 안식일이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 예수님 제자인 마르다 삼남매 집에 머무시고자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요한은 독자에게 베다니가 어떤 곳인지를 기억시킵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불과 1-2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11장 전체가 우리 눈에 생생하게 들어옵니다.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는 말은 그가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2).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1절에서 우리는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유월절 엿세 전“). 유대인은 안식일에 „잔치“를 베푸는 일이 흔히 있으므로(참조: 눅 14:1),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을 더욱 확증합니다. 이곳에 나오는 그리스어 „잔치“라는 말은 규모가 있는 잔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참석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시몬과 마르다의 가족까지 합하면 족히 2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나사로 집에서 하루를 주무시고 토요일 예배를 마친 후에 시몬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앉은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것은 앞으로 올 메시아의 큰 잔치의 작은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성도가 메시아의 큰 잔치에 초청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잔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도도 자주 이러한 잔치 자리를 만들어 그곳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기념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잡담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교제도 좋지만 신앙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시몬은 이렇게 수고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잔치를 기쁜 마음으로 베풀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손님으로 있으므로 그곳은 나사로의 집이 아닙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집을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마 26:6; 막 14:3). 그런데 왜 나사로가 아니라 시몬의 집에서 그 큰 잔치를 베풀었을까요? 그것은 시몬도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가 손님이지만 그곳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시몬이 나사로 가족과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이들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미 원시적 교회공동체를 이루었다고 짐작하게 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시몬이 초청한 것은 이들 사이가 그만큼 가까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많은 일행을 2-3일간(금요일에서 주일 오전까지) 대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므로, 형제가 서로 나누어 부담을 지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 지역교회가 활발하게 활동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름이 초대교회, 즉 다른 교회에서도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로 볼지라도 이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향연을 할 때는 낮은 탁자 앞에서 두꺼운 쿠션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앉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편안한 자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도 자연스럽게 향유를 부을 수 있었습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3절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이 정보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 한 근(그리스어로 리트라)은 327그램으로서 우연히 한국의 한 근(400그램)과 비슷합니다. „향유“는 그리스어로 „미론“인데, 목이 긴 향유 통에 보관되며, 이 통은 보통 알라바스터나 유리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는 알라바스터 통이라고 합니다(„옥합“: 마 26:7; 막 14:3). 알라바스터는 딱딱한 대리석 비슷한 석회인데, 이것은 투명하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향유를 사용하려면 먼저 병목을 부러트려야 합니다(„그 옥합을 깨트려“: 막 14:3). „나드“는 인도에 있는 식물인데, 나드 향유는 라벤더와 비슷한 향기를 내며 몰약과 발삼과 함께 가장 비싼 향유에 속합니다. 당시에 흔한 모조품 향료와 구분하고자 요한은 마리아의 향유는 „순전한“ „비싼“ 향유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 26:7과 막 14:3에서는 그분의 머리에 부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머리와 발에 부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구약 전통에 따르면,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임명할 때에 머리에 뿌리고(레 8:12; 삼상 10:1; 시 23:5), 방문객에게는 얼굴에 약간 찍어 발라줍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요한이 구태여 보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기록자들이 보도하지 않은 것, 즉 발에 부은 것만 보도합니다. 더욱이 이것이 그녀의 특별한 행동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는 이것을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냈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자매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과 머리를 푸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참조: 고전 11:5 이하). 머리털로 닦아내려면 머리를 풀어헤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경건한 마리아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요한이 지극히 비싸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 발에 부었다는 것과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볼 때, 지극히 존귀하신 예수님을 극도로 높이고자 하는 그녀의 사랑과 헌신과 경외감이 표현된 것입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와 일반적으로 더럽다고 여겨지는 발, 그리고 자매의 명예인 머리털과 남자의 발은 대단히 큰 대조를 이룹니다. 특히 고대에는 자매 머리를 묶거나 장식을 합니다. 이것을 풀어헤쳐서 상대방의 발을 닦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매의 자존심을 완전히 버린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 그녀는 약 20명의 형제의 눈초리를 견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 마스크를 완전히 벗어 던진 것이며, 자기를 보호해주는 방패막이를 버리고 수치스러운 알몸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과는 다른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존귀를 받으실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 앞에서만 자기의 모든 죄와 수치를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을 무한하게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일을 하면서 값비싼 향유 한 근을 희생했습니다. 5절에 따르면 그 가격은 한 가족이 일 년간 먹고 살 수 있는 큰 금액입니다. 이것을 단지 예수님을 높이고자 한순간에 소비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베르너 드 보아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으며 사랑은 낭비한다. 사랑은 유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사랑은 단지 사랑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교회의 대표로 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한 행위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행위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의 열매를 보시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것은 열두 제자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드러납니다(마 26:8). 우리가 이렇게 실천은 못할지라도 항상 이러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에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7). 그녀는 사라져갈 맘몬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이렇게 신비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찬양시가 생각이 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이 일을 했습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 26:8에 따르면 제자들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으므로 마치 열두 제자 전부가 불쾌하게 여겼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 14:4에 따르면, 몇 명(„어떤 사람들이“)이라고 합니다. 또한 요한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상당히 용감한 행동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보도를 종합해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한다면, 유다가 이 말로써 누룩이 되어 대부분 제자들이, „그래 이건 좀 지나친 것 같아“라고 동조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마가복음)는 이것을 몇 명(전체가 아니라 부분)이 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마태는 거기에 동참한 제자 수자가 많았으므로 정관사를 사용하여 제자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유다만 언급한 것은, 그가 누룩이 되어 다른 제자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는 요한과 베드로는 불평한 것 같지 않습니다. 몇 명은 그 불평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다행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제자들의 반응은 마리아의 헌신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만큼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이 빛이 나고 신비하기까지 합니다.
유다의 불평을 통해 우리는 그 향유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엇습니다. 다른 고문서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서 이러한 나드 한 근이 400 데나리온에 거래되었다고 하므로, 유다가 시세에 꽤 밝은 것 같습니다. 당시 노동자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으므로, 300데나리온이면 한 가족의 일 년 생활비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불평이 내용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준다면 그것은 큰 자선입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자선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에는 실제로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말에는 경건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유다의 생각에 동감한 것은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한 인간의 사랑과 헌신을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예수님께 큰 은혜의 빚을 지고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이 자기를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분을 경배하는 데에 아까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른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마리아가 그 향유를 선교기금으로 헌납했더라면 재정을 담당한 유다는 그것을 팔아서 그 판매 대금 일부를 횡령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못하게 되어 분노하는 그의 속내를 밝힌 것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당시 후원금을 받아서 제자들과 생활비로 사용하시고 일부를 적선으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돈을 유다는 조금씩 자기 몫으로 빼돌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가 배신한 이유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부터 제자로 살면서 도둑질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예수님까지도 돈을 받고 팔아넘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르침을 곁에서 수없이 듣고서도 회심할 기회를 놓치고 계속 거짓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 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비록 유다는 마리아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어린 마리아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에 대해 막 14:6이 좀 더 자세히 보도합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유다가 꾸짖고 다수의 제자가 이에 동조했다면, 이것은 상당한 압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를 방어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그리고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그녀를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유다와 그에 동조한 제자들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7절 하반절은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만 이러한 독특한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원문을 직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가 나의 장례의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도록 (가만 두어라).“ 한글 번역도 이 직역에 거의 일치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대교회에서도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필사자가 „간직하다“는 말을 완료형으로 고쳐서 기록한 사본이 많습니다. 그러면 간직하다는 말을 실행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그녀가 나의 장례의 날을 위하여 그것을 실행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 말이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실행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두고 의역해야 합니다. 마태와 마가도 이 말씀을 의역하여 마태는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로, 마가는 „장례를 위하여 함이로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향유를 부은 것을(그것을) 나의 장례식에서 할 일을 미리 한 것으로 간주하라.“ 즉, 곧 일어날 예수님의 죽음을 그녀가 미리 준비한 것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기록한 것의 의미와 일치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향유를 부은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 앞에서 나에게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는 오로지 그분만 의미가 있다.
마리아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린 것 같은데, 그 많은 재산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부모가 죽을 때 유산으로 남겨준 것 같습니다. 삼 남매에게 율법에 따라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향유는 마리아가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참금이 없이는 결혼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순간에 날렸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었으므로, 당시 자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결혼 지참금을 그분을 높이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을 복음의 열매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자기 생명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생명 대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으로, 돌발적이 아니라 지속해서 감사하는 마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우리 행위를 받으신다
그녀의 행위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도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값비싼 향유를 머리 부분에만 조금 찍어서 발라드리면 되는데,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발에 쏟아부었습니다. 유다의 불평을 통해서 볼 때 통에 향유가 거의 남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27그램이면 1리터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므로 부으면 쉽게 소진됩니다. 그럼에도 발에 너무나 많이 부어서 닦아낼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은 합리적으로 본다면 지나침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머리털로 이를 닦아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셨다면 이것을 부담스럽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발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불경한 일로 생각했으므로, 자기의 명예인 머리를 풀어서 그 머리털로 닦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녀가 하나님 아들을 대하는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으시고 이 경배를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로 얼룩져 있으므로,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지라도 하나님은 이것을 거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모든 자는 위로를 얻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 행위에 의미를 주신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러한 큰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로하시는 표시로 보신 것 같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길과 그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경배의 표시로 이것을 했지만, 예수님은 이 위기의 시간에 이를 통해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뜻하지 않게 이 큰 구속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하는 장례보다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분에게 향유를 붓기 전에, 마리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값진 나드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고 그분을 따르지는 않지만, 그분이 우리를 인정하시고 몇백 배로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안심하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6절에서와같이 유다의 도둑 심보를 들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래도 정말로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다른 제자들(„너희와“)에 향한 말씀입니다. 신 15:11에서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가난한 사람의 때가 아니라 메시아의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돌아가십니다. „역사에서 모든 시간은 자기 고유한 우선권(priority)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때에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가 아닌 마리아가 그때를 포착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신비합니다.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자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막 14:9를 통해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크게 위로받으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배운 중요한 내용을 간추립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헌신을 받아주신다.
2. 예수님은 우리 헌신을 통해 위로받으신다.
3. 예수님은 우리의 헌신에 새로운 의미를 주신다.
4. 예수님께 드려야 할 때를 놓치지 말자.
이러한 관점으로 본문을 복습하시면서, 이 비상한 이야기가 여러분을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