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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7월3일(화)흐림
육신은 고통이다. 몸은 고통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온 몸에 퍼져있는 신경조직은 고통과 쾌락이란 불협화음을 튕겨내는 악기이다. 아프지 않는 몸을 가진 존재가 있을까? 있다면 하늘사람이거나 불보살일 것이다. 인간은 ‘희망’이란 구명조끼를 입고 고해를 끝없이 표류한다. 그에게 즐길만한 게 있을까 싶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며, 어제보다는 오늘이 덜 괴롭다는 이유만으로도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이란 쓰디쓴 억지스런 즐거움이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에 불과하다. 괴로움이 만연한 세상에서 제 나름대로 한 가닥 樂을 붙잡고 살아보려는 게 인생이다. 길다면 긴 인생을 버텨낼만한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는 괴로움에 압도당해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찾아낸 즐거움이라도 결국은 괴로움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늙는다는 것은 즐거울 일은 줄어들고 괴로울 일은 많아진다는 말이다.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현장이다. 현장에서 뛰는 삶은 뜻대로 되지 않음이요, 뜻대로 되었다 해도 결국 변해서 무너져 버림으로 모든 것이 괴로울 뿐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라. 여기에 4성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오전에 요가하고 점심 공양 함께하다. <대승은 끝났다>를 읽고 생각하다. 다나보살이 살구 한 박스를 보냈다. 저녁에 위빠사나 수행하다.
2018년7월4일(수)맑음
푸른 하늘색, 오래간만에 다시 보니 신천지에서 맞는 첫날 같다. 오후에 호흡기내과 가다. 별 이상 없단다. 안심하고 돌아오다. 신평공원에서 만난 32세 청년에게 공부하러 나오라고 하다. 저녁 강의하다. 새 도반 심진규씨 오다. 김현미 보살도 오다. 여련화보살 <티베트 신비와 마술>빌려가다.
2018년7월5일(목)비 그치다 다시 비
요가하다. 청년 불자도 오다. 어제 밤 강의에 좋은 인상을 받았기에 오늘 나왔나보다. 심신상관적/심신통합적인 치유Psychosomatic therapy의 관점으로 수행을 말하다. 의도가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몸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四大사대(네 가지 요소)가 순조롭게 유통되거나 불통하게 된다. 사대의 상태에 상응하여 감정이 일어난다. 水大수대가 증대되면 몸이 가라지고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온다. 쉽게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며 혼침과 나태에 빠지기 쉽다. 地大지대가 증가되면 몸이 딱딱해지고 뻣뻣해진 듯이 느낀다. 風大풍대가 증가하면 가벼워지고 날렵해지며 팔팔함을 느끼게 된다. 火大화대가 증가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수대와 지대가 함께 작용하면 축 처지고 가라앉아 무기력 무 재미, 우울 나태 혼침을 가져온다. 화대와 풍대가 함께 작용하면 활기차고 즐겁고 경쾌하고 민첩해진다. 따라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수화풍 사대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그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념처이다. 호흡수행이다. 유한한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영적으로 고양된 삶을 지향하려는 열망,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알아차리게 만드는 수행인 사념처가 사대의 균형을 맞춰주고 마침내 사대가 적멸한 경지까지 이끌어준다. 나는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내가 일상에 주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인가? 나는 내게 일어나는 감정을 그때 그 즉시 잘 알아차리는가, 아니면 회피하고 태연한 척 가장하는가? 나에게 어떤 감정이 억눌려 있는가? 잘 참다가도 가끔 폭발하는 감정이 있는가?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가? 긍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부정적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인정하고 느껴주면 된다. 충분히 느껴주면 이윽고 사라진다.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 자꾸 자꾸 반복되는 감정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면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준다. 어떤 감정이라도 충분히 느껴주면 사라지게 되어있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사람은 남의 감정도 잘 알아서 공감해줄 수 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상태는 에너지 상태와 準位준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근접삼매에 들게 하는 것이 첩경이다. 근접삼매에서는 사람과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외부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희락piti과 행복sukha, 산란하지 않음, 정신집중心一境性, 평온이 있게 된다. 이 경지에 들면 왠만한 정신질환이나 심인성 통증, 심신상관적인 부조화에서 오는 징후에서 벗어나게 된다. 곧 바로 근접삼매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나 초심자들은 몸을 잘 다루는 데서부터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사념처 수행에 앞서 요가나 기공체조가 도입되기도 한다. 모든 요가동작이나 기공체조의 자세나 동작에서 알아차림sati은 항상 수반되어야 한다. 어떤 동작이나 자세를 취할 때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수행할수록 사대가 각성되고, 濁탁한 사대에서 淸淨청정한 사대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따라서 喜樂희락과 輕安경한, 청정과 안심, 평정과 고요가 생겨난다. 이것은 ‘자기 안의 의사’가 ‘병든 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노마지지(老馬之智)란 말이 있다. 길 가던 사람이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늙은 말을 풀어주어 그 뒤를 따라가니 길을 찾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다. 미물 곤충에게도 살아가는 꾀가 있는 것이니 적자생존으로 진화해온 생명들 모두는 나름대로의 지능이랄까 책략이 있다. 어떨 때는 늙은 말老馬의 지혜를 써야한다. 재난이나 전쟁이 나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해 허둥거릴 때 키우던 돼지를 풀어놓고 돼지 뒤를 따라가면 살 길이 찾아진다는 고사도 있다. 이것이 遯둔 字자가 주는 지혜이다.
2018년7월6일(금)흐림
아침10시 차 타고 대구 동화사 가다. 동화사 근처 산중식당에서 공양하다. 2시 동화사 통일대전에서 범망경보살계 포살에 참석하다. 많은 스님들이 사방에서 모여 함께 범망경보살계를 합송하고 율사스님이 諷誦풍송하는 것을 듣는다. 참석자명부에 이름을 쓴다. 포살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는다. 누가 참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찍는다고 하니 보살계포살이라는 게 결국 출석부 체크하는 것과 같아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학해스님과 만민스님과 인사하다. 지우스님과 허브차 마시고 4시15분에 출발하여 진주로 돌아오니 6시이다. 긴 하루였다.
2018년7월7일(토)흐림
오후에 진우전자 사장님과 아들이 와서 음향시설을 설치하다.
2018년7월8일(일)흐림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순간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어떤 모습을 보일까? 당당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비굴해지지 않을까? 지금 죽음이 오더라도 ‘잘 됐다. 기다렸던 바이다. 모두 안녕’하고 떠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난 세상에 유배된 듯이 살아간다. 이생은 즐기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염오해야 한다. 厭惡염오와 嫌惡혐오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여기는 내가 정착할 곳이 아니며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며 때를 묻히면 안 된다. 나는 어느 때라도 곧 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떠날 때 가지고 갈 짐이 없어야한다. 뒤를 돌아다 볼 일을 만들면 안 된다. 칼로 끊어버린 듯 떠나야 한다. 오늘 다락방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살았던 쇼펜하우어를 생각하고, 설산의 동굴에서 고난을 이겨낸 밀라레빠를 생각한다. 눈 덮인 산야를 달리는 하얀 호랑이를 그리워한다.
2018년7월9일(월)가는 비
아침부터 가는 비 내린다. 조계종 소식이 아침부터 들려온다. 허정스님, 혜진스님, 경진스님이 카톡으로 메시지를 전해온다. 설조스님께서 단식한다 해도 빠른 시일 내에 무슨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뾰족한 책략이 없는 것 같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끝이 어떻게 될지 그냥 두고 보자는 분위기이다. 서로 건드려 보면서 수 싸움을 하고 있다.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가 관건이다. ‘조계종 적폐청산과 청정승가 회복’이라는 정의로운 명분을 거머쥐었다 해도 대중을 일깨우고 결집시켜서 변화를 이끌어낼 세력을 현실화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그 작업을 담당할 두뇌와 조직책과 선전요원과 자금을 동원할 팀이 꾸려졌느냐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선결되어야한다. 그러나 지금 우정공원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분들은 제대로 된 팀워크를 구성하지 못한 것 같다. 붓다는 ‘진리Dharma’라는 한 방울의 물로 남섬부주의 탁류를 바꾸었다. 종단과 세상을 맑힐 曹溪 一滴水조계일적수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번 장마에 물이 불어나 조계 계곡에 물내려가는 소리가 커졌으나 물이 계속 불어나 홍수가 질지, 비가 멈추면 이내 물이 말라버릴지 독수리의 눈으로 지켜보아야겠다. 도도히 흐르는 혼탁한 강물을 맑히는 조계일적수는 한 사람의 초인일까, 집단의지의 화현일까? 메마른 대지를 적실 큰비를 내릴 구름은 오래참고 견디는 인고의 과정을 겪어야한다는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점점 밝아오는 걸 보라. 영원한 밤이란 없다.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라. 영원한 밝음이란 없다. 명암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뒤바뀔 뿐, 지구자체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지구를 떠나고, 태양계를 떠나고, 은하계를 떠난 관점으로 지금여기를 본다면 어떤가? 또 나아가 우주를 떠나서, 식별과 명칭을 떠나서 지금여기를 본다면 어떤가? ‘지금여기’랄 것도 없는데 ‘무슨 어떤가?’가 성립하겠는가? 물을 수가 없으니 입이 저절로 닫힐 수밖에 없다. 홈통에 빗물 흘러가는 소리가 도롱도롱 한다.
<대승은 끝났다>에서 옮겨온다. 내 의견을 괄호에 넣어 덧붙인다.
한국불교의 미래-
지금의 한국불교는 근본불교와는 여러 측면에서 너무나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근본불교의 정법을 접하고 이해했을 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난감해질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불교의 문제는 대부분이 계율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역사를 계율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근본 규제를 지킬 수 없는 자들의 거대한 용틀임(발광)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지금 한국불교의 출가자들 사이에는 ‘마음의 황폐함’이 견고하게 자리 잡혀 있다. 대중에 대한 불만, 스승과 어른 및 도반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가득 차서 그것이 결과적으로 당사자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행동거지까지 거칠고 완고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기본적인 근본 규제(비구계 가운데 4바라이와 13승잔법)들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서 결과적인 상태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존경심과 배려심은 자연스러운 발로여야지 억지로 쥐어짜내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이제부터라도 맹목적인 추종과 맹목적인 보시를 버리고 합리적인 비판과 전략적인 보시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둡다. 부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꼬삼비 비구들의 참회는 신도들의 불추종과 무보시(보시거부)의 결과였다. 한편 한국불교는 첨단의 시대에 어떻게 근본불교의 수행과 문화를 꽃피울 것인지 보여주는 첨병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일본은 규제를 없애는 대승의 영향(대처승이 제도화된 것을 말한다)으로 사실상 대중이 사라져 버렸고 티베트는 국가의 멸망과 대승의 승속 무차별한 정교일치로 인해 티베트불교의 폐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티베트불교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에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불교는 이제 겨우 소생하고 있을 뿐 불투명하다(공산당이 지도하는 방향으로 부흥하는 중국불교는 중화주의, 국가주의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대승불교는 대만과 한국 등에서만 잔존하고 있다(아니다. 티베트, 몽고, 베트남도 대승권이다). 대만불교는 대승불교권이지만 근본 규제가 잘 지켜지고 있어서 대중과 신도와 불교문화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근본 규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근본 규제를 무시한 채 아무리 까다롭고 엄격한 세속적인 제도(조계종에서 스님들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실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신설한다고 해도 대중은 정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교활해질 뿐이다. 중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인 허운 스님은 임종 시에 불법을 영속시킬 방법에 대해 ‘戒계’라는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한국불교 또한 ‘계율’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4단두(바라이, 四斷頭)와 13승잔(僧殘,승가바시사)만이라도 ‘실제로’ 점검하는 재계의식(포살,布薩)을 보름마다 실행하는 일에 한국불교 정화에 성패가 걸려 있다.
나의 의견: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고양이 목(조계종)에 달아야 할 ‘방울’이란 ‘비구계본대로 준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강제적이며 강력한 환경조성’이다. 이것은 계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승려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 필수적 강제적인 것이 되어야하며, 또한 사회적으로 검증가능 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조계종단전체는 전 국민 앞에 ‘이제까지 비구계를 여법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참회해야한다. 그리고 조계종 전체가 비구계를 다시 받아야한다. 그렇게 되면 비구니승가도 비구승가를 따라서 참회하고 다시 수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비구니 계본에 의하면 비구니들은 비구 계사에게 수계를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걸 실행할 수 있겠는가?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양심을 밝히고자 하는 용기가 없다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조계종 현 집행부가 교체되어 제도가 조금 개혁되더라도 비구계를 계본대로 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승가의 청정은 확보되지 않는다. 청정하지 않는 승가는 중생의 귀의처가 될 수 없고, 삼보 가운데 들 수도 없다. 승가는 자기의 청정함을 당당하게 천하에 밝힐 수 있어야하고, 사회적으로 검증가능 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조계종에 대한 의혹은 눈 녹듯이 사라져서 승가는 저절로 화합하여 정진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재 조계종의 인적자산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보조스님이나 쫑카빠 대사 같으신 고승, 허운대사나 아니면 녹야원의 5비구 같으신 성자가 다시 오셔서 지계청정한 종단을 다시 창종해야 할 것이다.
저녁 강의에 진주, 진옥 보살 왔다.
2018년7월10일(화)흐림
오전에 요가 하다. 연경처사 와서 우편함을 대문 옆에 달아주다. 저녁에 위빠사나 수행하다.
2018년7월11일(수)맑음
모처럼 햇볕 쨍쨍. 화창한 날씨. 빨래와 이불 말리다. 창자를 꺼내서 말리고 싶을 만큼 청청한 햇살이 작열한다. 저녁 강의하다. 3법인을 순서대로 다시 암기할 것을 당부하다.
Sabbe sankhara anicca. 모든 형성작용은 무상하다. 諸行無常
Sabbe sankhara dukkha. 모든 형성작용은 고통이다.諸行苦痛
Sabbe dhamma anatta. 모든 법들은 자기가 없다. 諸法無我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라고 외웠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중국번역은 원문에 충실하지도 않고 순서도 제멋대로이다. 중국에 태어난 용수존자라고 추존되는 僧肇승조법사의 肇論조론이란 논서를 읽어보면 그가 불교를 잘못 이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魏晉玄學위진현학(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에 유행했던 노장풍의 사상, 그들은 도덕경, 주역, 장자의 사유방식과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관조했다)의 용어로 불교를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렇게 이해된 불교를 格義佛敎격의불교라 한다. 격의된 불교는 부처님의 진의를 왜곡하고 변질시켰다. 그런데 격의불교의 유풍이 아직까지도 한국불교에 남았다. 소위 유불선삼교회통이라는 말, 진리는 하나인데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말, 이런 말들이 불교인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인가? 이것은 얼마나 불교를 폄하하고 욕보이는 말인지 당사자는 모르고 하는 말이다. 불교를 제대로 모르는 불제자들이 부처님을 욕보이는 시대가 바로 말법의 징조이다.
2018년7월12일(목)맑음
요가 끝나고 냉면 먹으러 가다. 차를 마시면서 이미화가 조계사 촛불법회 참석하러 가자고 제안하여 급작스럽게 서울행 버스를 타다. 문정과 현정이 동행하다. 7시 30분경에 조계사로 달려가니 조계사 맞은편 템플스테이본관 앞에서 집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혜진스님은 벌써 와서 마스크를 하고 앉아 계신다. 가사를 수하고 모임에 합세하다. 이윽고 진흙속의 연꽃님도 보이고 최윤영도 보인다. 각진스님과 김영국거사, 언론인협회 회장의 연설을 듣고 구호를 외치다. 혜진스님의 안내를 받아 우정공원 한 곁 천막에서 단식 중인 설조스님을 예방하다. 아미화, 문정, 현정, 최윤영과 함께 설조스님(올해 88세, 법주사가 본사)께 예경 드리고 말씀을 듣다. 청정승가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삼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상의 보시라고 하였는데 스님께서 그런 숭고한 의지를 실천하려 하신다. “단식은 조계종 변화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단식 시작할 때부터 건강이나 편안함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장례준비를 하고 시작했다. 조계종단이 맑아지길 바라면서 하는 일이다.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단식을 계속할 것이다. 대중은 항시 침묵하다고 계기가 오면 분노가 폭발한다. 나는 대중이 궐기하도록 불쏘시개 되려한다. 조계종 최고 어른인 종정스님을 비롯해 원로의원 방장스님 등이 침묵하는 것이 가장 슬프다. 어른스님들이 침묵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1994년 종단개혁의 미비가 오늘의 불행을 낳았다. 재정 통계와 통제를 이루지 못했다. 조계종은 재정관리가 투명하지 못하다. 투명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교단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종단에서 수입은 편의대로 기재하고, 지출은 임의대로 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도박, 부동산 투자 등 상식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모든 부패가 불투명한 돈 관리 때문이다. 감사도 형식적이다.” 나는 비애와 자애가 섞인 아득한 감정을 느꼈다. 한참동안 묵연하다가 스님의 손을 잡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9시에 집회에서 빠져 와나 경부선 터미널로 향하다. 11:10 진주행 버스 타다. 돌아와 씻고 일기를 쓰니 03:30. 천상에서 아수라로 떨어졌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긴 하루의 여정이었다.
2018년7월13일(금)맑음
초하루 독경법회하다. 점심 공양 하고 硏耕연경 부부 댁을 방문하다. 최근에 이사한 것을 축하하면서 집들이 커피 타임을 갖다. 아파트실내가 아담하고 편안해 보인다. 거사님 서재에서 이현상 평전과 박헌영 평전을 빌려오다. 실내 온도가 섭씨31도이니 바깥은 말할 것도 없이 덥겠다.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봉일암 동초스님께서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하시다.
2018년7월14일(토)맑음
아침 7:20 버스로 대구 관오사 가다. 점심 공양을 받다. 오후 2시에 강좌모임을 시작하다. 더위가 심해서 그런지 참석율이 적다. 4:30에 강좌 끝나다. 6시에서 7시까지 질문응답을 하다. 진주로 돌아오니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