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발표작
수원화성에서
이상구
무엇이 그들에게 패륜을 부추겼나
먹잠 같은 당대를 짚어내지 못했다면
그 누가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었으리
목민의 이름으로 탕평을 원했지만
사무친 마른 꿈은 구름으로 흐르고
주춧돌 푸른 이끼는
아득한 길이 되고
사초에 힘이 부친 사관의 붓끝처럼
당쟁으로 얼룩진 그때 다시 떠올라
낙남헌 구름무늬 아래
한여름이 저문다
신작
다부동 일기
총부리 서로 겨눈 슬픈 기억 곱씹었나
육탈한 살과 뼈를 먹고 자란 풀꽃들
뜨거운 하루를 안고
이정표를 읽는다
지워진 흔적들이 하나씩 떠오른 날
검문 없는 산바람 골짜기 휘감아 돌아
환하게 피어난 세상
낙동강을 감싼다
주인 잃은 군번줄 녹슨 이름 생각하며
학도병 형상으로 서 있는 푸른 나무
노을이 흘러가야 할 곳
선명하게 일러준다
무흘구곡 선바위
지난밤 눈발들을 지그시 밟고 서서
적막했던 복수초 꽃망울 부풀린다
산자락 양지의 하루 어깨에 올려놓고
등 굽은 소나무에 내려앉은 뭉게구름
바람이 핥은 세월 쓸쓸함을 지우고
골짜기 앞에 앉아서 물소리를 새긴다
하늘땅 경계 같은 깎아지른 절벽에
뜨겁게 읽은 해를 와불로 심어 놓고
얼부푼 변방의 세상 눈 감고 감아올린
<대구시조> 2023. 제27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