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력 증진을 위한 등산 이틀째입니다. 5명 투숙객 중 4명이 무전숙박하는
꼴 보기가 싫어서 AM7시30분에 다들 내보내고 북부경찰서 쪽으로 트래킹
방향을 잡았어요. 북부경찰서가 청사를 진지 대략5년 만에 근처 상가들이
문을 닫은 걸 보니 철거에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자동차 학원도 바리게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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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쳐진 건 진즉에 이사를 간 거겠지요. 이곳부터 진건 쪽으로 하천을 끼고
구리까지 왕 숙천 개발이 연결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대한 상권이
형성 될 것인데 2-3년을 못 버티고 나가게 생겼으니 도대체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전투 등반을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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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제주 4.3사건‘을 ’여수 반란 사건’과 연결 지어 들었고 나름 충격을
받았어요. 오늘 그 마무리 특강을 도올 강의를 통해 들었는데 도올이 부르는
‘부용 산’을 듣다가 설움과 억울함이 썸을 타면서 기어이 울음이 터져습니다.
UOOC!내 이 잡 것들을 어찌 찢어 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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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 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 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 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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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에 따르면 원래 이 노래가 빨치산 노래가 아니었고 폐병으로 죽은
누이동생을 산에 묻고 내려오다가 오빠였던 박기동이 가사를 썼고 음악
선생 안 성현이 곡을 붙여' 5월가'처럼 전해져 오다가 안 치환이(1997)앨범을
냈다는 것 같습니다. 룻기를 읽다보면 우연의 연속은 필연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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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선생이었던 안 성현마저 죽은 천재 제자(김 정희)를 추모하며 곡을
썼다지요. "아,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제주 4.3민주
항쟁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야욕으로 제주 시민3만 명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여순1만5천). 찬탁 반탁, 반쪽정부, 우익좌익,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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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재다 4.3이후에 만들어진 프레임입니다. 우익인사들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좌 빨’ ‘빨갱이’란 단어 좀 쓰지 마시라.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강경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 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285동
이 소각됐다고 합니다. 왜 이런 대량학살이 일어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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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잊혀 질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품은 채 4.3의 자취를 따라가
봅시다. 1945년 8월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별안간 미일전쟁에서 원폭으로 인한 항복 선언이었기에
졸지에 맞은 해방을 독립으로 맞지 못한 아픔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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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승전국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을 일본에 속해있는 나라로 취급
해 점령국이 패전국 다루듯 군정을 들어온 것입니다. 실재로는 일본은 자치를
하도록 두고 한국만 미군정이 통치를 한 꼴이지요. 이 일이 '얄타'회담에서
미.소가38도선을 경계로 각각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으로 계약 되면서 복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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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 시작합니다. 한국은이미 1950. 6.25.전에 원치 않는 분단 상황이 조성
되고 만 겁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고 해요.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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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습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인민위원회’란 어떤 조직일까요?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 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제주
에서도 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 준’이 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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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건 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이를 계기로 45년 말까지 청년
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어요.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가장 주력한 것은 치안 활동이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 토지・산업체 등 적산 및 군수물자를 감시하는 일에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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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초등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하기까지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행정을 주도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되었고, 인민위원회는 주로
마을 향사를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인민위‘는 동네사람들이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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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회 성격으로 보면 됩니다. 당연히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
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
에 친일파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
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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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말부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것
이 제주4.3의 근본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
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앞선 2월 17일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
유교 계・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이 망라 된 ‘3・1투쟁 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전도적인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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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원칙을 정하였고, 미군정 당국과 수차례 협상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는 시민주도로 강행될 수밖에 없었어요. ‘큰넓궤’는 제주
4.3당시 동 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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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중순 중산 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은
야산을 흩어져 숨어 있다가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나 40여일 후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됩니다. 주민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으나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정방
폭포나 그 인근에서 학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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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발포 사건’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 여론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 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이것이 결국 제주4.3으로 가는 단초가 되고
맙니다. 다랑쉬굴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길이 30m 인 용암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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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이곳은 4.3사건으로 피신해 있던 지역 주민 11명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
된 현장으로 1992년 발견 당시 유골과 당시 동굴 내부에서 쓰였던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 허벅 요강 등의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의 농기구
가 발견되었다고 해요. 당시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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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봉쇄했고 굴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갔습니다.
다랑쉬굴은 1991년 12월 발견되어 1992년 4월 1일 공개했으며,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 만인 5월 15일 한줌의 재로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다랑쉬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꺼내진 뒤, 나머지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는 다시 콘크리트로 봉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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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금에
나섰고, 이어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기관, 단체, 회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전도적인 파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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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미군정 경무부 장 조병옥이 제주도에 와서 총파업을 와해시켜
나갔습니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하여 총파업에 강경 대응하였고, 조 병옥 경무 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통해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으며 3.1절 집회가와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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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
으로 조작하였습니다.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
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었으며,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3・1발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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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48년 제주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되었고, 이것이
‘Red Hunt’ 즉 빨갱이 사냥의 시작입니다. 조병욱이나 이승만의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어찌하오리까? 예주야! 면허 따고 담양갔다가 가마골-지리산자락을
경유하면서 올 때 말하던 그 곳을 기억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