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교설]⑦ 중도
중(中)이란 존재하는 양변에 취우치지 않는 가운데라는 의미이지만..
세존이 가르치는 중도는 일반인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 세계를 벗어난 차원이 다른 세계라 할 수 있다.
존재 세계에서 일체는 인식하는 자와 관계없이 어느 시간동안 실재하면서 변하는 것으로 아는데..
세존은 일체 존재를 자체의 고유성질이나 모습이 아닌 인식하는 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하여 무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변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식하는 자가 규정한 모습이 변하는 것을 말하고,
무아는 대상은 일수사견(一水四見)처럼 보는 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으로 우리가 보는 것이 그 실체가 아니다 라는 것으로 특히 대상을 인식하는 자아 atman는 실재하는 게 아님을 가리킨다.
책상이라 하면 책상은 그 자체의 실재 모습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가 조작한 모습dlrh, 조작한 그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며 고를 느낀다.
1. 중도 실천에서 보면
존재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 하거나 또는 여기서 그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데 몸은 오히려 순간적인 쾌락을 바라므로 그런 욕망을 고행으로 끊고 영원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현재 내가 전부로 알아 이 내가 쾌락을 추구하는 게 전부여야 한다는 쾌락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중도 실천은 행복할 추구하는 자가 없음을 보아 그 자리에 이르도록 실천할 뿐이다.
<초전법륜경>에는 중도 실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수
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내세를 믿지 않는 자라 해도 지금 여기에 나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감각적 쾌락이나 보이는 욕망을 이루려 한다. 인도에서는 이들이 소수였지만 오늘 대한민국은 이런 자들이 과반수를 넘는다.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윤회를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그런 자들을 세존께서는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내세를 믿는 자들은 5온으로 존재하는 한 순수한 행복만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5온이 생긴 이유를 욕탐으로 보아 욕탐을 멸하고자 석가모니가 보살 시절 6년 고행을 했듯이 평생 고행으로 5온의 욕탐을 줄여가면 5온이 죽으면서
나의 실체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믿는다.
세존은 그것 역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으로 고행이 아닌 명상 선정을 통해 이 몸이 죽으면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는 종교(나중에 힌두교가 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초전법륜경>에서는 명상 선정의 힌두교를 거론하지 않고 고행과 쾌락을 거론했을까?..
2. 중도 이해에서 보면
존재가 있으면 여기에 있거나 여기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가 없음을 알면 여기에 있다 혹은 없다는 유무 견해를 너머선다. 그것을 <잡. 12-301. 가전연경(迦旃延經)>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리(那梨)라고 하는 마을 깊은 숲 속에 있는 대빈사(待賓舍)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산타가전연(陀迦旃延)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세존께서 시설하신 바른 소견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혹은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과 경계를 얽어매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시설한 바른 소견이니라.
왜
냐 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또 존재가 있으면 그것이 윤회를 한다거나 혹은 단 한번의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재가 없음을 알면 단상견을 벗어난다.
300. 타경(他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수의 조우라고 하는 마을에 계셨다.
이 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세존을 뵙고 서로 경하하고 위로한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면 이것은 곧 무기이니라."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그러면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도 곧 무기이니라."
바라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왜 제가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뜻에 대한 설명과 법에 대한 설명은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처하여 설법하는 것이니라.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그 바라문은 기뻐하고 따라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는 것은 항상하는 자아가 있어 윤회한다는 상견이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은 일회적인 삶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단견이라 한다.
이런 상견이나 단견은 모두 존재하는 자아를 상정하고 그것이 항상한다 또는 일회일 뿐이다 라는 억지를 세우고 있는 게 된다.
존재가 있으면 그것들은 같다 혹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재가없을 보고 있다면 그것이 같다 혹은 다르다고 할게 없음을 보아 중도에 서게 된다.
그 뿐 아니다. 존재하는 게 있다는 것은 물질인 몸과 그것을 인식하는 식이 있는 데 그 둘은 같은 것은가 다른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해 세존은..
297. 대공법경(大空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수(拘留搜)의 조우(調牛)라는 마을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처음·중간·마지막이 다 좋고, 좋은 뜻과 좋은 맛이며 순일(純一)하고 청정(淸淨)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하나니 이른바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대공법경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느니라.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누가 늙고 죽으며, 늙고 죽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고
따져 묻는다. 그러면 저들은 곧 '내가 곧 늙고 죽는다. 지금의 늙고 죽음은 내게 속한 것이고, 늙고 죽음은 바로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영혼(命)이 곧 몸[身]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영혼이 몸과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곧 마찬가지 뜻인데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일 뿐이다.
만일 '영혼이 곧 몸이다'라고 알아 말한다면, 그것은 범행자(梵行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또
'영혼이 몸과 다르다'고 보아 말한다면, 그것도 범행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두 극단에 대해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 바르게 중도(中道)로 향하는 것이다.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은 세상에 나와 사실 그대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고, 이와 같아서
태어남[生]·존재[有]·취함[取]·애욕[愛]·느낌[受]·접촉[觸]·6입처(入處)·명색(名色)·식(識)·행(行)도 마찬가지이며,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다'고 보느니라.
만일 누가 '무엇이 곧 행이며, 행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고 물으면 저들은 곧 '행이 곧 나요, 행은 곧 내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저들은 이와 같이 '영혼이 곧 몸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영혼이 몸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든지 '몸이 곧
몸이다'라고 보는 자라면, 그런 범행자는 있을 수 없다. 혹은 '영혼이 몸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런 범행자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 두 극단을 여의는 것이 바르게 중도로 향하는 것이다. 현인과 성인은 세상에 나와 사실 그대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라고 보느니라.
모든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明]이 생긴다면, 그 누가 늙고 죽을 것이며 늙고 죽음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늙고 죽음이 곧 끊어지면,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을 줄을 알아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이 될
것이다.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이 생긴다면, 그 누가 태어날 것이며 태어남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내지
누가 행할 것이며 행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행이 곧 끊어지면,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을 줄을 알아 미래
세상에 있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법이 될 것이다.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이 생긴다면, 그 무명이 소멸하면 곧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나니,
이것을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라고 하셨다,
<297경>을 보면 중도 역시 유, 무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는12연기법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2연기법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보는 것을 공법(空法)이라 하였으니,
[중도 = 12연기 = 공]이 되는 도리를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