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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이 글을 작성하는 이유
동학농민봉기를 한 동학농민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기에 나라가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조정과 1894년 6월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해산을 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이 해산을 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 철군요청을 하지만 청나라는 철군하려고 하는데 일본군은 철군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고종이 있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을 하는 데 이것이 바로 갑오왜란이라는 것입니다.
갑오왜란은 임진왜란이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공격한 첫 번째 침략이었으며, 이렇게 무력으로 조선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친일내각인 김홍집을 내세우면서 청나라와는 전쟁 즉 청일전쟁을 하게 되며 봉기에 그친 동학농민은 이제 전쟁수준의 동학농민군이 되어 일본에 저항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게 된 결과, 조선은 전쟁터가 되어 많은 조선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며 결국 동학농민군은 패배를 하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배척하려고 하다가 결국 일본 사무라이에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이렇게 임진왜란이후 처음으로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왕과 왕비를 감금한 이후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한 세력은 임진왜란의 주역인 조슈번과 샷슈번의 출신이며, 이 세력들은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주축세력으로 일본 근대화를 성공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본제국주의를 실현하였으며 , 이들의 직접 후손들이 현 일본집권세력으로 아직도 지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제국주의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대통령이하 집권여당세력들은 일본총리들이 수차례 사과를 하였다고 하는데 자민당출신은 오부치총리 한명으로, 그 외에는 자민당출신 총리가 아니며, 현 일본 기시다총리 이하 집권세력들은 아직도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윤석열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일본의 조선강제병합은 불법이라고 선언해주기를 바라고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기시다 총리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 주길 바랍니다,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임진왜란 이후
최초 일본의 무력침략인
경복궁점력사건의 과정
동학농민봉기에 의한
전주성 함락
(1894.6.1.)
고종
청나라에 파병 요청
(1894.6.6.)
청나라 파병 통보하자
일본군은
스스로 파병함
(1894.6.8)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동학농민봉기에 의해 1894년 6월 1일에 전주성이 함락당하자 이에 당황한 고종은 청나라 파병요청을 하게 되어 청나라군은 1894년 6월 6일에 입국하고, 일본군은 이틀뒤인 1894년 6월8일에 입국을 하게 됩니다,
전주성함락
동학농민군
자진 해산
(1894.6.11.)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입국을 하자 동학농민들도 나라가 갑신정변 때처럼 다시 외세에 의해 힘들어질 것을 우려하여 1894년 6월 11일에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서 자진 해산을 하게 됩니다,
전주성함락까지의 과정
조선 조정
전주화약 체결후
청나라군과
일본군 철군 요청
(1894.6.11.~7.23)
전주화약체결후
청나라군,일본군
철군요청 과정
동학농민 봉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이 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요청을 하게되고, 이에 청나라는 갑신정변(1884)의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에게 통보를 하게 되자, 조선조정이 파병 요청을 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조선조정에서
청일양국에
철군 요청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조선조정은 서둘러 1894년 6월에 전주성에 무혈입성한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후, 난이 진압이 되었으니 청일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일본의 경복궁점령까지 과정
일본 경복궁점령사건
(갑오왜란)
1894년 7월 23일
일본의 경복궁점령
(갑오왜란)
동학농민군 자체 해산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일본군
철군 요청
조선 조정은 전주성을 함락한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고서 동학농민군도 자체 해산을 하자 일본과 청나라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라"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군만
철군요청 거부
(6.16 제물포 상륙
6.23 한양진군하여
용산에 주둔)
청나라군은 조선조정에 요구에 응하려고 하자, 일본군은 1894년 6월 12일 혼성 제9여단 선발대,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한 후,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면서,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동학농민군 진압으로
중앙군
부족한 상황
당시 조선군 중앙군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고,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군 배치
일본군
경복궁 점령 시작
(1894,7.23
0시 30분)
일본군 대장
(아베 전총리 고조부)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경복궁점령사건의 행동대장
(아베신조의 고조부)
1894년 7월 23일 0시30분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됩니다
경복궁 영추문에서
교전 발생
(새벽 4시경)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경복궁 영추문에서 교전
경복궁내에
상당수의 조선군
주둔하고 있었음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던 것입니다,
건춘문에서도
교전이 시작함
같은 시간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건춘문에서 교전
영추문에서
제압당하여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
(새벽 5시경)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폭파시키면서 궐내로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게 됩니다
고종이
일본군에 잡혔지만
교전은 계속되지만
일본은 고종의 가짜명령서로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킴
고종이 일본군에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는데,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켰다고 합니다,
조선군은
오후 2시까지
일본군과 교전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군 모든 병력
무장해제를 당함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했습니다.
일본군
경복궁 점령한 후
고종과 명성황후을 감금하여
조선의 권력은
일본에게 넘어감
이렇게 하여 일본군은 경복궁을 완전 점령한 후 고종과 고종비인 명성황후는 경복궁에 갇히게 되고 조선의 조정 즉 권력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갑오왜란 결과
임진왜란 후
300년만에 일어난
일본의 무력 침공 사건
경복궁 점령사건 즉 갑오왜란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300년만에 일본이 무력으로 침공하여 조선왕을 사로잡은 전쟁입니다,
일본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감금함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는 그나마 피난을 하여 일본군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당시 고종과 고종비 명성황후는 일본군에 의해 감금이 되는 것이기에 무력으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것입니다,
일본 무력 침략으로
한일강제병합의 신호탄
갑오왜란 즉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왕을 제압한 전쟁이었으며, 이때부터 일본이 조선을 지배를 하였던 것이며 형식적으로 완료되는 것이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한일강제병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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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점령사건
(갑오왜란)
행동대장
아베전총리의 고조부
갑오왜란 행동대장
아베신조의 고조부
아베신조 가계도
경복궁점령(갑오왜란)에 나선 일본군 장군이 바로 일본 전 총리였던 아베총리의 고조부였습니다, 이 고조부가 막말의 조슈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오시다 요시마사이었는데 일본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일본은 동학혁명으로 인하여 조선을 침력할 명분으로 삼은 결과가 된 것인데, 역사로 보면 참 안타까운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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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동학농민봉기에
당황한 고종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일본군마저 파병되는 결과
동학농민군은 외국군대가 파병되는 것을 보고서 조선조정과 급히 화약을 맺고서 해산을 하지만 일본군만은 철군요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후 고종과 고종비인 명성황후를 감금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역사를 동학농민군에 의해 일본군이 들어왔기에 이 모든 책임을 동학농민군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조선의 철군요청을 받아들리지 않고 무력으로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임을 잊지않기를 바랍니다,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경복궁점령사건 이전과 이후 과정
청일전쟁
배경 과정 결과
청일전쟁의 전후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풍도해전을 일으킴
(1894.7.23.)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 이틀이 지난 1894년 7월 25일에 청일전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풍도해전을 일으키게 됩니다,
풍도해전과 풍도위치
일본은
김홍집 1차 내각구성
군국기무처 설치하여
조선 권력을 장악
그리고 일본은 친일내각인 김홍집 1차내각(1894.7~1894.12)을 구성하면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조선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은 일본군에 의한 꼭두각시 정권이 됩니다,
김홍집 친일내각과 군국기무처
일본이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여
청일 전쟁 시작
(1894,8.1)
이렇게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일본군은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을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는데, 이 때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고 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1894년 9월 경상남도 동래군과 부산항을 통해 증원파병을 하게 됩니다,
평양전투에서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
(1894,9)
청일전쟁이 진행되면서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이 청나라-일본 양국군대의 전장터가 되었고, 남부지방은 농민군과의 국지적 교전이 계속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면서, 일본은 1894년 9월에 평양에서 청나라를 이겨서 만주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이 후 전쟁에서도 일본이 청나라를 압도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전투
동학농민군
반발
(1894,11~12)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은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지만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배한 후 후퇴한 후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하며,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또 다시 패배하여 후퇴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완전패배
(1894.12)
전봉준 체포,처형
(1895,4)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완전 패배를 한 이후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은 해산을 하며, 1894년 12월 28일 전봉준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이 되어1985년 4월 23일 처형이 됩니다,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체포
일본
2차 친일내각 구성
(1894.12)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완전 진압을 한 이후 친일 김홍집 2차내각(박영효 연립,1894.12~1895.7)을 구성하여 일본 포고령 2차(홍범 14조)를 발표합니다,
김홍집 2차 내각-홍범14조
청일 전쟁
일본이 승리하여
종결
(1895.4.17)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자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고 청일전쟁은 끝이 나게됩니다,
청일전쟁의 끝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 제도
청일전쟁의 종결
(일본의 승리)
청일전쟁
영향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요동반도)
일본이 청나라에 반환
(1895.5)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한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게 되자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이후 랴오둥반도(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1895.5)으로 반환되었습니다,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
랴오둥반도
일본
명성황후 암살
(을미사변)
(1895,10.8)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자, 이것이 일본의 심기를 건드려 일본은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되며, 결국 6개월뒤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사무라이에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을미사변-
일본 사무리아가 명성황후 암살
[출처] 경복궁 무력점령사건 갑오왜란 청일전쟁 조약 배경 과정 결과 영향-명성황후 암살 시해,을미사변,김홍집내각,전봉준처형-영추문,건춘문-아베신조 가계도 고조부 일본군 행동대장|작성자 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