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007. 묵상글 들 (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 어떤 문을 두드릴 것인가? 등 )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문을 두드릴 것인가? / 2021.10.07 05:01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문을 열려면 문을 두드리라는 주님 말씀이 오늘따라 여러 생각이 듭니다.
문을 열려면 내가 열면 되지 꼭 문을 두드려야 하고 남이 열어줘야 하나?
두드려야 열린다면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하나?
뭐 이런 생각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은 스스로 열면 되지 장애인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닌데
왜 남이 열어주기를 바라고 두드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집이 자기 집이면 자기가 열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이 남의 집일 때는 남이 열어줘야겠지요.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인데 어느 집 문입니까?
회사 취직을 위한 문입니까?
아니면 하늘로 오르는 문입니까?
하늘로 오르는 문은 하느님께서 열어주시겠지만
취직을 위한 문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실까요?
우리가 취업을 앞둔 자녀가 있으면 그를 위해 생미사를 봉헌하는데
그렇게 생미사를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취업문을 열어주시겠냐는 말입니다.
취업문은 하느님이 아니라 회사 사장이나 인사 과장이 열어주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열어주신다고 믿는 사람이 신자이고,
회사 사장이 열어준다고 믿는 사람이 비 신자일 것입니다.
오늘 말라키서를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얘기하며
불신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사실 이들의 말이 터무니없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간청을 꼬박꼬박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번성하는 것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번성하라고 하신 것은 자녀,
그것도 하느님의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것이었지
재물이나 사업의 번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 끝을 생각 않는다면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보다 자기가 악착같이 돈을 벌든지
힘있는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말라키서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구원이 아니기에
오늘 주님께서 두드리라는 문은 출세와 성공의 문이 아님은 물론
지옥문은 더더욱 아니고 천국문이며 가능한 빨리 늦어도 죽기 전에는
이 천국문을 두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천국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말라키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서는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리라.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먼저, ‘청하라’는 것은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무엇을 찾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58) 하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찾아라’는 것은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시고,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신 분이시니, 주님의 믿음에 의탁하여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또한, “두르려라”는 것은 가슴으로, 곧 사랑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청하라, 찾아라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
로마제국의 박해 당시에 신자들은 굶주린 사자의 먹이가 되기 위해 원형경기장 안에 들어갈 때 장미 화관을 머리에 쓰고 갔습니다. 비록 죽을 처지이지만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강한 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치명한 다음에 나머지 신자들은 밤중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며 떨어진 장미꽃들을 모아 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쳤었는데, 이 관습에서 묵주 기도가 유래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시편 기도를 바쳤고, 평신도들은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에도 묵주 기도를 바치던 관습과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는 신심은 더욱 발전되었습니다. 오늘이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된 계기도 이슬람의 군대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유럽을 침공하려던 레판토 해전에서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치며 승전을 기원하면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박해시대에 성모 신심이 돈독했던 프랑스 선교사들, 특히 앵베르와 다블뤼 주교의 영향으로 묵주 기도가 전래되었습니다. 오늘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자리에서는 반드시 묵주가 발견되고 있을 정도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박해의 위기와 고난을 묵주 기도로 이겨내고자 무진 애를 쓰며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묵주 기도 관습에 담긴 성모 신심은 여타 종교의 주문이나 주술과는 분명히 달랐다는 것이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널리 읽힌 교리서, ‘주교요지’에도 정확한 성모 교리가 기록되어 있고 다수의 성모 신심 서적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박해시대 교우들 사이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을 본받고자 하는 동정녀들의 신앙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사회관습상 이런 생활양식이 어려워지자 동정부부의 삶까지도 등장한 것만 보아도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앙 수준과 신심의 정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이기도 했던 유점혜 아가다는 수 차례 성모 발현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묵주 기도로 청하고 감사드리는 관습이 널리 퍼져서 거의 공식화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권장하신 바입니다. 다만 청하되 하느님 나라와 성령을 먼저 청할 것과 청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어야 합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수영을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특히 주요 영법 중에서 ‘배영’을 배울 때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몸의 힘을 빼고 물 위에 가볍게 누우라고 강사는 말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물 위에 누우면 가라앉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수영 초보였던 저는 계속해서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제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할 정도로 힘차게 발차기를 해도 점점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강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고개 들지 마요. 이 물에 빠져도 안 죽어요.”
물에 빠질까 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다 보니 몸이 계속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잠기도록 해야 저절로 물 위에 뜰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전문 강사가 도움을 줄 것이고, 그리 깊지 않은 수영장이니 빠져 죽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힘 빼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면서 힘 꽉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1세기의 손님 환대법에 따르면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때 공동체가 모두 돕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친구에게 가서 빵 세 개만 꾸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귀찮음으로 손님 환대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도 줄곧 졸라 대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냐는 질문이었지요.
사람에게 하는 정성의 반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힘을 쫙 빼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게 됩니다. 하느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기쁨이 스며든다(괴테).
-----------------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을 나태함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평온함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어느 형제님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기억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실수로 오랜 시간 교도소에 계셨습니다.
이 형제님이 아버지와의 혈연관계를 끊으려고 한다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 ‘어리석음’입니다.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으니 ‘나태함’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받아들인다면, 바꾸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평온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용서한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것이니 ‘용기’입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나요?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야구경기를 보았습니다.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선발투수는 한국의 유현진 선수였습니다. 유현진 선수가 잘 던졌고, 경기 결과는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승리였습니다. 특정한 팀을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선수가 선발로 나오는 팀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중은 뉴욕 양키스의 팬이었습니다. 안타깝게 그날은 뉴욕 양키스가 패하였지만 관중들은 경기의 결과보다는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고, 두발로 걷고, 언어를 사용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또 하나 말한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생각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결실을 얻으리라는 예측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은 미래를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서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의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묵주기도의 매 단이 좋지만 저는 환희의 신비 2단 ‘마리아 엘리사벳을 찾아가심을 묵상합시다.’를 좋아합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놀라운 표징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탄력靈的彈力
- 항구恒久하고 간절懇切한 기도 -
어제에 이어 루카복음의 주제 역시 ‘기도’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제가 아주 예전부터 즐겨 자주 사용했던 ‘영적탄력靈的彈力’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날로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나아갈 때 영적탄력 좋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탄력은 노화와 더불어 떨어지더라도 영혼의 탄력, 영적탄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10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신자들이 선교하는 제자들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선교하는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도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는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오늘 10월7일은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기념일의 유래가 참 중요하여 길이 기억할만 합니다.
1571년 10월7일은 10월 첫 주일이었고 전 유럽의 명운命運이 달린 날이었습니다. 1453년 콘스탄니폴을 함락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에 이어 발칸반도와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서서히 유럽을 향해 서진하다, 유럽의 11개국의 신성동맹 연합군과 격돌하니 바로 레판토 해전이요,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깁니다. 후에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를 썼던 당시 스페인의 보병 연대장 세르반테스는 이 전투에서 싸우던 중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바로 10월은 첫 주일 오늘, 유럽의 연합군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과의 격전은 오전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 끝났으며, 교황 비오 5세는 기독교 연합 함대의 승리를 위해 유럽 전역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고 교황 친히 베드로 광장에서 묵주기도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결과는 신성동맹의 대승으로 끝났고 오스만 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어 더 이상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간주되던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유럽 연합군이 졌더라면 로마를 비롯한 남유럽 많은 나라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황 비오 5세는 승리의 성모님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고, 1716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로마 보편 전례력에 삽입하여 10월 첫 주일을 축일로 지내다가, 1913년 교황 비오 10세는 다시 축일 날짜를 10월7일로 되돌렸고, 1960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축일의 명칭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새삼 묵주기도의 위력과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10월 묵주기도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묵주는 천국에 가는 패스 포드라합니다. 감각이 있는 한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어떤 형태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요즘 ‘죽어서 만난다’는 신비로운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노자 강의중 ‘상우尙友’라는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현재 마땅한 친구가 없으면 옛 성인들을 친구로 삼으라는 뜻이라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멘토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도 안에서 만나는 경우가 이러하겠구나, 죽어서 만난다는 것이 이런 뜻이겠구나’ 깨닫습니다.
얼마전 선종한 황인국 마태오 신부님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또 치열한 암투병생활중 선종 전 50일간 오로지 기도로 살았던 연데레사 수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살았을 때 보다 더 잘 알게 되니 ‘죽어서 만난다’는 진리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황 인국 몬시뇰 신부의 회고록 맨 끝에 2001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손수 번역하신 ‘어느 독일 노인의 시’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일은 무엇일까?
기쁜 마음으로 나이를 먹고
일하고 싶지만 쉬고
말하고 싶지만 침묵하고
실망스러워질 때 희망을 지니며
공손히 마음 편히 내 십자가를 지자.
젊은이가 힘차게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을 보아도 시기하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겸손되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쇠약하여 이제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늙음의 무거운 짐은 하느님의 선물
오랜 세월 때 묻은 마음을 이로써 마지막으로 닦는다.
참된 고향으로 가기 위해
자기를 이승에 잡아 두는 끈을 하나씩 풀어 가는 것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이리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을 겸손되이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제일 좋은 일을 남겨 두신다.
그것은 기도이다.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합장만은 끝까지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 위해 하느님이 은총을 베푸시도록 빌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임종의 머리맡에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오너라, 나의 벗아. 나 너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더불어 23년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마인라도 수사님을 생각하여 썼던 ‘노수사님’이란 시와 ‘죽음’이란 기도와 같은 시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쓰는 노수사님
묵묵히 삶의 뒤안길에서
낙엽과 함께 집착의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는 마인라도 노수사님
그대로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가을이었다, 자연이었다”-1998.11.9.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해후다, 귀환이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1998.11.10.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삶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자체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를 늘 깨어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백절불굴, 칠전팔기,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영적탄력 좋은 삶을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항구히, 간절히 지칠줄 모르는 기도와 삶을 권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최상,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무지와 허무의 포로가 되고, 원망과 절망, 실망도 안개처럼 피어나 시야를 가립니다. 다음 제1독서 말라키 예언서에 나오는 것 바와 같이 하느님께 심히 무례한 말을 뇌까립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 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당신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가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리라.”
참으로 항구히, 간절히 기도할수록 영적탄력 좋은 삶이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신뢰심도 나날이 깊어집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우리 모두 영적탄력 좋은 삶을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40,5ㄱㄴ. 시편1,3). 아멘.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 이야기입니다.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 8)
예수님께서 기도를 두 벗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십니다. 인간적인 친분만으로는 선뜻 들어 주기 어려운 일도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졸라 대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
하늘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지치지 않고 청할 때 아버지는 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단,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우리 갈망 안에 심어 주신 바로 그것일 때 그렇지요. 그분은 주시려는 것을 우리 편에서 먼저 바라게 하시고, 언젠가 때가 되면 채워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기도를 드린다는 건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럼없이 무언가 청하기도 하고 두려움없이 속내를 드러내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증여하는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오가는 모든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그런 관계라면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찾고 청하는지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시지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사랑의 유대입니다. 주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이어주고 하나가 되게 해 주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지요. 성령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주신 아버지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실 가장 귀한 선물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과 진실되이 엮인 이들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말라 3,14)
현세적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는 솔직히 악인들이 득세하고 재물을 누리며 번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길을 헛되다 조롱하는 무도하고 거만한 이들이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요.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 ...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말라 3,16-17)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신기루임을 우리가 깨닫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근원으로 하는 모든 피조물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누구보다 주님과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그래서 그는 늘 기도합니다. 머무름이건 침묵이선 청원이건 눈물이건 선행이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이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성령을 충만히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의로움의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경외하는 이에게 회복과 재생,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성삼위 하느님과의 뜨겁고 진실한 일치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화답송)
이 축복의 노래가 단순히 현세적 재물이나 번성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짓밟고 쓰러뜨려야 쌓는 맘몬의 바벨탑과 주님 날개 밑에서 누리는 행복 사이의 간극은 무척 크니까요.
주님과 늘 긴밀히 연결된 이, 그분을 경외하는 이의 기도는 성령의 은총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더 행복해지고, 더 행복해서 더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깊이 심어주신 갈망을 찾아내어 그분께 그것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이니, 성령을 소유한 여러분은 복됩니다. 아멘.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9)
오늘은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이슬람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레판토 해전 기념일'(1571년 10월 7일)을 맞아 제정된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한 모친이신 성모님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금 '묵주기도의 성월'을 보내고 있고,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 전체, 곧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부활의 신비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기도보다도 큰 기도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바닷가 산책을 할 때나 오후에 적석산을 산책 할 때 그리고 사제관에서 성당으로 걸어서 오고갈 때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 삶 전체를 믿게 하는 '믿음의 기도'이며, 성모님의 손을 잡고 바치는 '전구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이르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11,9)
그런데 이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청하기만 할 뿐입니다.
'받고 얻고 열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기에, 청하는 것을 지금 주시든 다음에 주시든 상관하지 않고, 단지 굳게 믿으면서 청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 없이 청하기만 하거나, 그리고 청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청하기만 한다면 쉽게 낙담하거나 넘어지게 되고, 결국 떠나가게 될 겁니다.
먼저,
주시는 분을 굳게 믿고,
그리고 끊임없이 간청합시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자세’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바랄 때, 줄곧 졸라 대는 지속적인 태도, 곧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한 마음을 지니라는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을 얻고,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기도할 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던가요?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적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한 체험들은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만이 모든 일을 온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 ‘뱀’이나 ‘전갈’은 아닌지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뱀과 전갈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입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 9)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본분이며
우리의 중심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기도보다 끈질긴
믿음은 없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거듭되는
간구와 간청의
시간입니다.
기도로 아버지의 은총에
도달하게 됩니다.
청하는 기도로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로 공유되는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다시 돌아 가야 할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가장 필요한 믿음을
청합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인간 세상에서는 친한 벗이라고 해도
줄곧 졸라 대야만 청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결코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인간의 청을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간청을 곧바로 들어 주신다면, 그냥 한 번만 기도해도 되겠다.”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 주신다면 오랫동안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 주시니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여라.”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우리는 ‘지체 없이’ 라는 말을, ‘곧바로, 지금 즉시’로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지체 없이’ 라는 말은, ‘가장 좋은 때’ 라는 뜻입니다.
그 ‘때’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때’와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가
다르다는 것인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모릅니다.
(기도하자마자 곧바로 응답을 얻는 경우도 있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너희에게 주셨으니, 청하고 찾아서 얻어라.
또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열고 들어가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간절하게 청해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또 우리가
애타게 두드려야만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이미 주셨고, 우리가 들어가기를 바라는 그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계신다.’ 라는 말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안 주시는 하느님께 달라고 졸라 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것을 잘 받는 방법이고,
문을 안 열어 주시는 하느님께 열어 달라고 졸라 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것을 안 받는 것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안에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 평화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울면서 기도했지만,
기도를 마칠 때에는 평화를 얻고 웃음을 되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그 평화는 기도에 대한 응답과 같습니다.
기도하면서 얻은 평화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우리는 그 힘과 용기로 절박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미 주셨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감하기는커녕 반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얻기를 원하는 그것이 완전히 나의 것이 되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미 주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좋은 때’와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과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것’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우리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결과가 생겼을 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랑이란, 달라고 졸라 대는 그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영적인 은총과 선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은총은,
또 기도의 응답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응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원하는 때에 주셔야만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생떼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할 때 일어나는 일; 믿어진다>
오늘 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되고 자녀로서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을 받는 특권까지 누립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지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도 원할 때 무언가 더 주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언가 자신에게 꾸준히 청할 때 자녀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꾸준히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청하는 것은 약간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청할 수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굉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꾸준히 청한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하느님은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평생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조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 노트에는 기도 제목들이 3천 페이지나 넘게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우정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 문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한 사람씩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노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조지 뮬러의 안 믿던 한 친구가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친구는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지 뮬러는 마지막 기도 제목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그때까지 안 믿고 있었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죽은 바로 그해 그 소식을 들은 이 친구는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고 나서 그 친구는 전 영국 땅을 순회하면서 “조지 뮬러 목사의 기도는 다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는 다 응답합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약 두 아이가 무언가 청하는데 한 아이는 그저 ‘찔러보는 식으로’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고 하고, 또 한 아이는 하나가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청한다고 할 때 누구의 청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자신께 신뢰심을 보이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청하면 그분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심은 기도의 ‘꾸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한 번만 청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천 번 넘어지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를 느끼며 믿음이 함께 성장합니다. 아기들도 걸음마를 할 때 매번 똑같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발전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더해져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까지 괴팍하였습니다. 얼굴과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도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방탕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문제만 일으켰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부모의 학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학창 시절에 당한 왕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원래가 이렇게 못돼먹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엉터리 같은 남자의 마음에 사랑의 온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게 된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사랑의 말로 고백했고 청혼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온갖 진심을 보여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같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참 매몰찬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무도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비싼 값을 치른 후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가면을 쓰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고, 청혼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말과 가면의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것입니다. 남자는 결국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선량함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던 여인을 신부로 얻게 되자 그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가 잠든 사이 그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가면 속에 감춰진 남편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한 과거의 추한 모습들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가면을 슬그머니 벗겨보았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면 속의 얼굴은 과거 그가 보았던 험악하고 비열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미소 머금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표정은, 오히려 그가 쓴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있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그러면서 “믿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좋으신 분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내가 청하는 것을 꼭 들어주실 것이 믿어집니다. 그렇게 나 자신도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합니다.
저는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997년 신학교 입학하는 해 1월 1일부터 계속 바쳐오고 있습니다.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칠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조금씩 변화됨을 스스로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랬다면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자꾸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조금씩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면 못 할 게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실 것을 확고하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꾸준하게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젖을 줄 때까지 계속 ‘엄마!’를 외치지 않는 아기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칠 때마다 젖을 주는 엄마를 보면 아이는 그 대상이 엄마임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됩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세상은 고통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말합니다.
세상의 변화에서 무엇에 더 눈길을 주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의미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희망을 준다면
집 안에 촛불을 켜서 가족과 사랑을 나눈다면
어두운 밤에도 따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내 삶에 행복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 하늘의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고
깜깜하고 싸늘한 집에 들어온다면
나의 삶은 어둡고 외롭고 추울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 불행을 초대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찾고 기도를 합니다.
밤하늘의 별이 우리가 찾은 복음의 별빛이라면
집 안을 따스하게 만드는 불빛은 우리의 기도 생활입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내 삶에 행복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청하고 희망을 찾으며 기도로 두드린다면
오늘을 살면서도 영원을 살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내면의 따스함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묵주기도는
가장 강력한 희망의 도구이며
행복을 내 안으로 초대하는 기도입니다.
횟수에 매이는 유혹,
보여주기 위해 하는 유혹을 조심한다면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기도이고
일상에서 마음을 붙잡아 주는 기도이며
기도하는 삶으로 이어주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기도합니다.
특별히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며
기쁜 소식을 청하고
삶의 희망을 찾으며
기도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21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말라3,13-20ㄴ)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20)
말라기 3장 19절에서는 주님의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 날에 악인이 처할 궁극적 운명이 무엇인지를 다루었다. 그것은 완전한 파멸이었다.
이제 말라기 3장 20절에서는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그 날에 의인이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제시된다.
이처럼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날은 반대로 의인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을 도래케 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되는 주요한 예언의 패턴인데,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악인의 패망과 의인의 궁극적 승리를 병렬시켜 쌍으로 제시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조되는 존재를 '의인' 또는 '겸손한 자'로 표현하지 않고,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로 표현하신다. 이것은 말라기 3장 16절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러한 표현은 말라기서 전반에 제시된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악인들이 죄를 고집하고 악을 자행하는 이유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심판의 대상인 악인들과 대조되어 하느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나오는 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하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악인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지만,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와 반대로 복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자레하 ~셰메쉬 체다카'(wezareha ~shemesh tsedakqah; but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는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두 가지 대표적인 견해가 공존하는데, 하나는 의로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공의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어떤 번역본은 여기의 '태양'(해)을 의미하는 '셰메쉬'(shemesh)를 대문자 'S'를 사용해 'Sun'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 태양을 그리스도로 본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움의 태양'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빛'으로 묘사하는 실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요한1,4.8.9; 8,12; 12,46).
이 사실을 감안하면, 본문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생(육화)과 재림의 양자의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둘 수 있지만, 후자에 보다 무게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치유'는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치유, 즉 영육간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재림하심으로 모든 의인들은 그 동안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치유받고, 영육간에 온전히 회복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의로움의 태양'이라는 표현에서 '태양'이 아닌 '의로움'에 초점을 맞춘 표현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의로움의 태양이 ~ 떠오르리라'는 표현은 모든 어두움과 슬픔, 부조리와 불법을 물러가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이 밝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어두움의 날, 고통의 날, 슬피울면서 이를 가는 날, 화덕(용광로) 속의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타버리는 날이 될 것이지만,
의로운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당성을 인정받는 날,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날, 모든 눈물이 씻겨지는 회복의 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의로움'이라는 표현을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지금 현재 보고 있는 패배와 굴욕의 날이 끝이 나고, 승리와 영광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날개에 치유를 싣고'에 해당하는 '우마르페 삐케나페하'(umarpe ikenapeha; with healing in its wings)는 '그 날개들 안에 있는 치유'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날개에'에 해당하는 '삐케나페하'(bikenapeha)는 직역하면, '그 날개들 안에'라는 뜻인데, 이것은 태양에 날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퍼져 나오는 광선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태양을 묘사할 때, 광선을 상징하는 여러 날개달린 원반 물체로 묘사했다.
특히 구약에서 '날개'를 뜻하는 '카나프'(kanap)는 끝이나 가장자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는 데(시편104,2; 호세4,19), 여기서도 태양의 가장자리에 있는 광선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루카 11,5-13)
어제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중심인 일용할 양식을, 하늘의 진리의 말씀으로 묵상했다. 말씀을 위에 양식, 꼭 필요한 양식으로 또 내일, 다가올 날의 차원이 다른 양식으로, 곧 하늘의 생명을 위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고 묵상했다.
오늘 그 양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로 시작하신다.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 빵 세 개만(트레스알토스-셋빵) ‘셋 이라는 빵’이다. 셋(3)이라는 성격의 빵인 것.
(1요한5,5-8)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일,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피, 그 말씀이 진리의 생명수, 물인 것이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일로 , 일차로 증언하시는 성령, 곧 셋을 하나의 뜻으로 알아듣는 것, 우리의 내일의 꼭 필요한 양식인 것이다.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 단식하며 계속 간청하는 기도, 그 의미와 다른 것이다. 줄곧 졸라대면(아나데이아- 수치, 체면을 버리고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기도하다.), 그러면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라 하시는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 *청하여라(아이테오- 빚 갚으세요) 먼저 주신다고 약속 하셨으니 주실 것이라는 것, 그 약속은 구약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요한16,23)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이름(쉠-분석된 말씀), 곧 하늘의 진리의 말씀으로~, 성경에서 이름을 말씀으로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찾아라(제테오-껍데기 속의 것) 성경의 율법과 말씀 그 문자 속에, 그리고 우주 만물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이다.
*두드려라(낙하-죽일 목적으로 치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 그분을 표징과 기적의 능력의 예수님이 아닌,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매 맞으시고 죽으시는 구원자로 보라는 것, 그러면 하늘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생명의 물이 나온다.
(요한19,34)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민수20,11 참조-같은 의미)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 *열리다(아노고이고- 위에 것으로 열리다) 하늘의 지혜로 알아듣게 된다는 것.
(1코린2,6-10)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면, 생명의 말씀을 죽음의 거짓된 법으로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참 양식)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거짓 양식)을 주겠느냐? 12 달걀(생명)을 청하는데 전갈(죽음)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위에 모든 말씀이 이해되어 믿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성령으로 아래의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된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1,5-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르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10)
루카 복음사가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11장 5~8절에서 '한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를 들고, 기도 응답에 대한 보다 분명한 확신을 주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세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받으며, 하느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된 11장 9~13절을 첨가한다.
11장 9절에 '청하여라'로 번역된 '아이테이테'(aiteite; ask)는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아이테오'(ai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인 하느님의 자녀가 위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 동사가 현재 명령법으로 사용되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청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으며, 또한 능동태로 사용되어 자신이 직접 청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단어가 '기도'와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루카10,13; 마태18,19; 마르11,24).
한편 '주실 것이다'로 번역된 '도테세타이'(dothesetai; it will be given)는 '주다'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희랍어 문법에서 미래 직설법은 미래에 반드시 발생할 어떤 사건에 대한 강한 확신을 뜻하므로, 여기서는 하느님께 청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강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찾아라'로 번역된 '제테이테'(zeteite; seek)는'발견하기 위해서 애써서 찾는 것'을 의미하는 '제테오'(ze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제테오'(zeteo)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15,8), 되찾은 양의 비유 (마태18,12)에도 사용되었고, 하느님을 찾는 데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신명2,29; 이사55,6; 65,1; 사도17,27), 천국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루카13,24).
따라서 '찾아라'는 것은 단지 성도 개인에게 필요한 것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찾으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된다.
한편 '얻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휴레세테'(hyuresete; you will find)는 미래 능동태로서 '너희들이 능동적으로 발견할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암시한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예레29,13~14ㄱ)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로 번역된 '크루에테'(kruete; knock)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는 안되게끔 열성을 다해 간절히 두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크루오'(kru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렇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가 구하는 실제 내용이 하느님께 상달되어 문제에 대한 해결의 문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확실하게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열릴 것이다'에 해당하는 '아노이케세타이'(anoigesetai; will be opened)는 '열다'를 뜻하는 '아노이고'(anoigo)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이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 주고, 또한 수동태로서 그 응답의 비결이 바로 하느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루카 복음 11장 9절의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점점 적극성을 띠는 자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이같은 집요함과 끈질긴 인내, 그리고 열성이 담긴 기도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루카 복음 11장 10절에서는 11장 9절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가르'(gar; for;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해준다.
11장 10절의 원문은 모두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기도의 응답이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일이라는 것을 생동감있고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