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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전장석
미군부대 철조망 사이 검붉은 넝쿨장미
담장을 누렇게 기웃거리는 통닭집 기름냄새
초저녁별 뜨면 중랑천변에 올라
가난한 사람들과 오래 머물고 싶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늘 만원이었던 그때
버려지는 일들 그토록 많았던가
하루에도 수없이 꿈을 허물다 짓고
막막한 사위가 별빛 몇 개로 환해질 때
사람의 집들 하나 둘씩 다시 정겨웠다
낄낄거리던 녀석들 어느덧 시내로 나가
술집을 차리거나 부대고기를 팔거나
친족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만가대에는 장독마다
버터냄새 바른 된장이며 고추장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위 둥근 달이
처녀애들 머리통만해지자 그들은 떠났다
오키나와로 갔는지 본토로 갔는지
그 후엔 아무런 소식도 없지만
톰이 살던 사랑방엔 누가 또 장롱을 들여 놓을까
그해 헬리콥터 소리가 사방에 퍼지고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탱크 행렬이 시내를 지나가면
여자아이들 치마가 자꾸 짧아지는 여름
중랑천변 얕은 물가에서 개구리를 잡다가
건져올린 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아이
탯줄을 감고 지그시 눈감고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옆집 사는 짐이라고 해도 되나
밤이면 붉은 창문의 비명소리
동네 아이들 한 움큼씩 쥔 돌멩이를 던진다
반바지 차림의 짐이 후다닥 뒤쫓아 올 때
잽싸게 집으로 숨어들어 간 아이들
식구들은 죄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론가 떠나고
폐수를 토하며 떠오르던 물고기떼
내 젊은 날 흐르다 머물던 중랑천처럼
그곳은 내 안에서 오래 정지된 시간들
미군부대 헬리콥터 요란했던 만가대에는
낮은 지붕들과 값싼 조명 지금도 반짝거릴까
밤이면 만취한 아버지가 작은 소란을 피우는 나라
선산 어깨 위로 변전소 고압전선이 윙윙거리고
플라스틱 공장터가 되어버린 고향마을
도회지 쪽 난 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천변의 풀들 젖은 몸을 콜록인다
부대찌개가 그리우면 가끔 찾아가는
그곳, 만가대
무계(無界)
동물들은 제 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뼈가 묻힐 땅의 지도
위를, 훨훨 날아 나비는 꽃의 촉수
나비는
봉우리가 미처 열리기 전에 감각적으로 탯줄을 끊고 나온 샴쌍둥이 향그러운 꽃에도 야생을 누비는 근육질의 헐떡임이, 욕망이 아니다, 활활 타오르는 그러다가 꺼지는 그런 게 아니다, 그 향기는 몸의 피톨을 일으켜 거품 물고 달리고 싶다 저 들판을
저 거짓의 지형도에
비가 내리더니 이 땅에는 새로운 질서가
꽃은 남자가 되어 나무로 무성하고
나무는 어느덧 근육질의 맹수로 벌판을 달리고
코끼리는 얌전한 난쟁이 수초였어요
여자인 나는 하마가 될래요
무성생식의 애초는 날마다 바뀌지요
너의 거친 목소리를 언제 들었던가
입 다물고 있으렴 외계의 신성(新星)들이 나타날 때까지
모국어를 잃어버린 지 오래
우리는 다종의 언어로 소수의 말들을 지껄인다
꽃의 언어로 나비의 언어로
기린과 하마와 암사자와 뿔 달린 남자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초원의 바람에 섞일 때
무어라고 얘기하는지 잘 들어 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뭇 생명 가진 자들의 에스페란토어이지요
다름이 아니오라 어제도
해가 뜨지요 우기와 건기가 울타리를 허물고요
이제부터 나는 꽃이 아니란다 변성기가 지난 남자애들은
여자로 변한 나무를 바위처럼 그리워한다
뭐가 그리 이상한가요 달은
후속편에 나와요
이번 놀이는 재미있었나요(정말?)
몇 번의 예행연습 뒤에도
우리의 무대는 늘 낯설지요 그게 다예요
더 보고 싶으면 꼬리를 흔드세요 혀끝으로
박수치세요 물구나무 설 때까지
낮잠
밖은 궁금하지 않았다
먼 길 걸어 집에 촛불 켜는 날
자꾸 잠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말을 시켰다 허기였다
선잠결에 잠깐 스쳐간 빛의 무늬
그 이후로 내가 본건
어둠도 대낮도 아닌
커튼 깃에 스며든 투명한 어둠
얕은 물가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그저 막막한 쪽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가는 느낌이랄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양에게
모유를 먹이듯
꿈결 밖으로 길게 젖을 물렸다
어둠만큼 촛불이 사위를
밀어놓는 저녁
마음과 몸의 경계가
저렇듯 흔들리는 마을입구에서
토할 것 같은 생각들
뒤따라 온 형색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붉은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얼른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눈을 감았다
잠시 어둠은 더욱 또렷해지고
희미해져가는 쪽은
바깥이 아니라 자꾸만 안이었다
접경지역의 얕은 물가를 어른거리는
물풀들의 그림자처럼 오랫동안 나는
서성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꿈속에서 또 얼마나 걸었을까
발이 저려왔다 어둠이 집집마다
점호를 하고
초저녁별이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촛불 대신 알전구를 켰다
우선 눅눅한 방안을 뎁히고
꿈결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이끼
같은 빵조각을 뜯어먹었다
꿈은 왜 자꾸 시려오는가
내 귀는 아직도 물속에 잠겨 있는지
뒤돌아보면
물안개 자욱한 마을
그 순간 누군가 문고리를 흔든다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인가 아닌가
나는 짧게 얘기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그의 이면을 살피는 건 그림자뿐
마음의 문이 다시 닫히자
더 많은 어둠이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술안주로 티브이를 보며
커튼 사이 새벽이 젖어들기까지
그들은 오랫동안 친구처럼
나와 마주했다
어둠의 뒤꽁무니가 보일 때까지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시 당선소감
다시 만나는 시, 절 한 채 짓고 싶다
도시에서의 삶은 풍요롭다. 때때로 청계천변 혹은 을지로를 걷는다. 빌딩과 자동차들과 그 속에 얽힌 소요와 허둥대는 사람들. 이젠 모두가 자연스럽다. 도시에서도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 지고 눈이 오는 모습이 시골풍경 만큼이나 익숙하다. 이럴 땐 도시도 자연의 일부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내몰려 산다 하더라도 자세히, 꼼꼼하게 관찰해보면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이제부터 나는 그 틈새에다 나만의 절 한 채 짓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밀실에서 광장으로 무대가 옮겨진 것일 뿐 나름대로 시인의 눈으로 살아왔다. 밀실에서의 삶은 굶주렸지만 늘 행복했고 설렘이 있었다. 광장에서는 타인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밀실에서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총열을 가다듬어야 하리라. 나는 이미 방아쇠를 당겼고 나를 보는 과녁의 눈은 나보다도 더 매서워질 것이다.
20대 때 나는 시와 열렬히 연애했다. 전부를 바쳤다. 하지만 그는 떠났다. 30대의 나는 버림받은 사람처럼 동가숙서가식하며 살았다. 시가 떠난 빈자리에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허망하게 가득찼다. 40대의 어느 날 나는 옛 애인처럼 다시 시가 그리워졌다.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그와 다시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커져갔다. 그 그리움과 열망만으로, 비로소 나는 그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이다. 주례를 서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전장석
경기도 의정부 출생. 세종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현재 한국경제신문사 편집국 근무.
전등사에서 보다
김영애
전등사 불전을 짓는 공사판의 도편수 사내는
사하촌, 눈이 큰 주모와 눈이 맞았네
진종일 비가 내려 일손 놓았던 어느 날
파전 내 질퍽한 주막방에서 붉어진 술상을 서둘러 밀쳐놓고
둘은 다리를 걸어 가시버시가 되었다네
전등사 내력 같은 섧도록 씁쓸한 사랑 이야기 하나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네
절 일이 끝나갈 무렵
사내는 그간 모아 두었던 전대를 풀어 주모에게 건넸다네
이를테면 그 여편네를 반려로 삼을 생각이었던 게지
그러나 여자는 우직한 사내의 애정을 횡재로나 여겼던지
정짓간도 내팽개치고 밤 봇짐을 쌌더라네
도편수가 나무를 깎아 만든 벌거벗은 여인의 추한 형상은
꿈에서도 자주 어른거리는, 그 여자
오늘도 겁보다 무거운 대웅전 처마 귀퉁이를 온몸으로 받치고 있다네
전등사 옛 사랑의 상처 아래엔 가슴의 금이 배 쪽까지 이어져서
사람들이 가끔 와서
제 안의 마음들을 들여다보며
누구는 도편수더러 너무했다고도 하고
누구는 나부상더러 업장이라고 떠든다는데
전등사 처마 아래 서서 한참을 치켜다 보았네
일구월심(日久月深), 누군가의 애증의 흔적
처마처럼 공중에 떠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네
식은 커피를 마시다
젊은 날의 고투와 맞바꾼 원룸 한 동과 퇴직금을 털어 마련한 3층 상가를 소유한 공 씨는, 이 골목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사장님이다. 그의 살림집 모퉁이는 아직 김 씨네로 불리는 우리집 마트 건너편이어서, 식솔들이 가끔 들러 자잘한 생필품들을 사가기도 한다. 좋은 옷만 차려입고 치장하기에 바쁜 그의 아내 별명은 팔색조. 시추와 푸들을 끼고 그녀가 매장에 붉은 입술로 나타나는 날이면, 김 씨네는 서둘러 반색을 한다.
잔돈을 바꾸러 온 택시기사의 입에서, 공 씨네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김 씨네는 어느 사이 두 귀를 쫑긋한다. 공 사장이 드디어 한 건을 터뜨렸다는 특종 중의 특종, 처음엔 시간이나 때우러 나왔다며 심드렁하던 공 씨가, 그만 동사무소 요가교실에서 첫 사랑 순이 빼닮은 한 노인네와 정분이 났는데, 결국 꼬리가 잡혀 팔색조가 길길이 날아오르다 못해 공 씨의 팔뚝에 앞발톱자국을 내었다는 것이다.
상가의 절반을 내어놓고 평생의 미조(美鳥) 곁을 떠나야 할 처지에 몰려 있던 우리의 공 사장님. 요 며칠 김 씨네 마트는 공 사장네 식구들을 구경할 수 없다. 구매와 납품이 끝난 늦은 오후에야 김 씨는 모처럼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허리를 편다. 재방송 같은 창 밖의 풍경이지만 그래도 잠시 눈길을 준다.
아니 벌써, 그 사이에 공 사장의 상가 건물이 층으로 경계를 지어 푸른색과 살구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 씨는 하마터면 커피 잔을 놓칠 뻔 했다. 반신반의 흘려들었던 소문이 사실로 굳어지는가 보았다. 바깥의 소리를 물어와 제 안에 전하기만 하는 귓속도 시나브로 순해져 가려듣게 된다는 이순의 고개, 그래도 늦사랑의 로망 하나 가슴에 담고 있었던 김 씨는, 문득 잔속에 남아 있는 커피 한 모금을 숭늉이라도 들이키듯 훌쩍 털어 넣는다.
나에게도 고유번호가 있다
가게의 간판 불을 끄고
환승역 같은 금고를 열면 탑처럼 쌓아올린 하루의 흔적들이 포개져 있다
튀김집에서 시장기와 바꾼 기름 먹어 번들거리는 지전과
손등에 검버섯이 핀 눅눅한 지폐,
어쩔 땐 세탁통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색 바랜 놈도 있다
따로 골라내어 갱생을 시켜주어야만 될
풀리지 못한 건달 같은 놈도 몇은 끼어 있다
마음이 한 잎의 지전 같은 날들도 있다
전생의 빚을 갚기라도 하듯이 낡아가는 팔다리를 놀려서
하루를 닫는 날들이 그렇게 있다
지폐도 고유번호가 있다
지갑 속에 간직한 한 줄의 번호표를 꺼내 들어야 하는 날에
나는 어느 환승역에서 발을 내리는
어떤 빛깔의 모습으로 메말라 있었거나
습기 눅눅한 한 잎의 존재로 비쳐질 수 있었을까
∥시 당선소감
접었던 시를 다시 꺼내어들 때 할[喝]
장마가 걷힌 해맑은 아침 당선 소식을 듣습니다
기쁘고 또한 두렵습니다
(아내, 며느리, 어머니…)
다양한 호칭에 익숙한 몸짓으로 답하는
나는 한 마리의 카멜레온 같았습니다
문득, 꽃 지는 나이 마흔에야
산에 올라 절집 종루에 서니
매양 염불인 양 노래인 양
산전수전 다 겪은
목어 한 마리가 할[喝]하고 외치더군요
하여,
접었던 시를 다시 곁에 둔 지 수 년이 지났습니다
내놓기 부끄러운 글에 탑을 쌓게 해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신병은 교수님, 김진수 시인, 정윤천 시인을 비롯하여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민하는 글쓰기로 보답하겠습니다
김영애
전남 여수 출생.
산은 산, 물은 물
김금희
치악산 산기슭
바람도 물도 고르고 골라
맑기만 하다
농익은 여름 무색해져 버린
계곡은 물, 소리에 젖어 가고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넉넉한 그늘이
긴 하루를 싫다 하지 않는다
밤은 풀벌레소리에 깊어가고
달은 하늘을 가르는 시간의 품속으로 이울어
노곤한 몸 아침에 섰다
골마다 가득 찬 구름
쫓기듯 달아난 자리
무성했던 물푸레 느티
밤새 도둑이 들었나?
계곡이 허전하다 물!
고개 숙이니 아! 대벌레,
물속에, 돌 틈에, 풀 섶에
그 빼빼마른 가느단 몸
욕심 없는 푸른 선비
돌 틈에, 흐르는 물에,
생의 한자락 놓아버린
인생이란 뭘까에 골몰하다
놓쳐버린 나의 나뭇잎 한 장,
이 강가에 이르러
한마디 하신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
나도 나뭇잎 한 장, 대벌레도 나뭇잎 한 장
떨어져야 깨닫는 사바의 뜰 보다
올라와서야 깨닫는 화악산 아침
로맹가리를 위한 리포트
소설이 말아 쥔 두루마리 시간
구름이 낮은 비행기를 타고
소설 속으로 잠입했지
파도가 사람의 땅을 바꿀 때
태양은 낯선 이방인을 개조하는데
골몰하더군
해의 길이를 재고
파도의 너울을 세고
바람의 방향을 추적하는 건
담배 한 대로도 가능할 때가 있지
들숨과 날숨이 성호가 되더군
지붕 없는 별들은 질문이 많지
암호화된 애인이 있는지
진주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신발 벗은 맨발에게 묻더군
그의 애인은 모래 벽화에 있다고
그의 새들은 박물관에 있다고
찢어진 브라에 얼굴을 묻은 사내가
두 개째 담배를 물며 말했어
땅을 파 본 적이 없는 동물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동물의 본능은 먹이를 찾는 것일 뿐
해안이 제 본능에 말려들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지
늙은이나 젊은이나
먹이 사냥에 육감적인 몸을 날릴 뿐
새의 부리는 무딜 대로 무뎌져
날조된 도장을 꾹꾹 누르며 날더군
퇴화된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호들갑스럽게 테마파크로 기울기 하며
벌건 불빛을 찾아 잠행하는
로맹가리 해안의 변이된 새들
새들은 더 이상 페루를 찾지 않지만
페루는 언제나 페루인 거지
섬 여자
섬에 사니 좋겠다고 말했더니
깽깽이풀꽃 뜯다가
축축이 젖어가는 그녀의 말
겹겹이 물인데요 뭘
하긴, 사방을 둘러봐도 바다밖에 없으니
소금에 절은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일까
서른 중반의 진달래 빛 눈망울을 가진 여자
깽깽이처럼 몸이 유독 가냘픈 여자
출렁이는 자궁을 바다에 비웠는지
발끝이 축축해지며 연신 뒤돌아보는 여자
산수유 꽃그늘이 수척해지는 봄,
바람꽃 한 줄기 아찔하게 휘청이는데
발밑 복수초 꽃자리 불편해지는데
아름다운 섬을 노래부르다 온 상춘객인 내가
섬 하나를 함부로 흐리게 한다
저 돌아보는 눈빛이 울음인 것을
∥시 당선소감
시의 정원을 가꾸는 아름다운 걸음
“백년 후에 내 시를 읽는 독자여/당신은 누구입니까?//지금 이 화려한 봄날 아침/내 정원에 만발한 꽃 한 송이도/그대에게 전해 줄 순 없습니다./저기 구름 사이에 비춰 나오는/눈부신 황금 햇살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그러나 당신은 창문을 열고/창밖의 정원을 내다보세요!/바로 당신의 꽃 피는 정원에서/백 년 전에 사라진 이 꽃향기의/흔적을 찾아보세요.”
―Rabindranath Tagore, 「정원사 85」 Rabindranath Tagore
시 앞에 서면 언제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시가 위의 타고르의 시였다. 그것은 내게 시적 용기를 주었다가, 낙담을 하게 했다가, 다시 다잡게 하기를 반복하며 나를 휘어잡았다. 분명 아름다운 시임에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시가 내게 온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자신의 반성만 일삼을 뿐, 시로 일보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의 정원을 가꾸며 늦은 걸음으로 예까지 오게 되었다.
시적 자양분이신 나의 어머니, 문학의 길을 걷게 해 준 남편과 두 아이들, 무엇보다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부족한 나를 한없이 보듬어 주신 선생님, 『시에』와의 귀한 인연의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금희
전남 여수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 수료.
∥2011년 시에 시 신인상 심사평
시로 만나는 신예들의 시
100여 명의 응모자들 중에서 최종심에 올라온 것은 아홉이었다. 그 중 심사위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최종으로 합의를 본 당선자는 전장석, 김영애, 김금희 씨이다. 무엇보다도 당선을 축하한다.
신인 등단 심사를 하다 보면 가장 힘든 게 심사위원들 사이의 경향 차이이다. 그러나 시를 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 어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은 거의 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좋은 작품은 누구에게나 좋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인의 작품은 그 완성도가 들쭉날쭉인 경우가 많아 심사위원들 사이에 견해차가 나타난다.
먼저 전장석의 시들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의정부」는 다른 시들과는 다르게 기존의 리얼한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무계」, 「낮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볼 수 있는 몽유병적인 상상력으로 잡아낸 시들이다. 이들은 경계 허물기, 혹은 경계 지우기로서 시가 단순히 노래조가 아니라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개척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영애 씨의 경우, 구수한 서정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먼 데서 온 방물장수가 골목을 누비며 먼 나라의 전설이나 민담을 노래해 주는 시들이다. 「전등사에서 보다」의 도편수의 사랑이나 「식은 커피를 마시다」의 공 씨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서민들의 삶에서 건져 올린 구수한 서정이다. 「나에게 고유번호가 있다」 또한 그에 버금가는 지폐의 애환이다.
위 두 사람과는 달리 김금희 씨는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전통 서정에 맞닿아 있다. 시란 거창한 상상이나 신기한 소재에서 찾아내는 게 아니라 자아의 혼을 단련시키고 깎고 다듬어 한 점의 응결된 형태를 낳아야 한다는 걸 「산은 산, 물은 물」, 「로맹가리를 위한 리포트」, 「섬 여자」 등에서 잘 보여준다. 내 영혼을 잘 다듬어야 한 줄의 문장을 얻는다는 전통적 시작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 사람은 서로 그 경향이 아주 달라 심사위원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과정에서 가장 애석한 경우가 이남우 씨이다. 이남우 씨는 시가 지녀야 할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리고 시적 여정도 깊어 보였다. 그에게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다음 기회로 미룬 건지도 모른다.
심사위원/전기철(시인·숭의대 교수)
공광규(시인)
양문규(시인·본지 주간)
─『시에』 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