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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정의를 기다리며
에스겔서 34장 11-16절, 히브리서 13장 7-15절, 20-21절
오늘 읽은 본문인 에스겔 서와 히브리 서는 모두 양들을 모으시면서 결국 정의와 평화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자에 대한 전망과 또한 그 전망에 따른 그의 양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다루어집니다. 사실 본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에스겔서와 히브리서 모두 신앙 자체의 지속가능성, 즉 지금 우리가 견지하는 신앙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역사 안에서의 고난과 환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고난과 환난 속에서 그럼에도 믿는 바와 그 믿는 바가 제시하는 약속을 믿고 견디는 마음의 자세 역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단이 정한 4/19 기념 주일이며 또한 총선을 마친 상황입니다. 물론 작은 성취일 수도 있고 또한 동시에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역사를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는 역사를 살아가며 얻어지는 작은 성취들, 즉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한 발짝이나마 구현되는 그 성취의 순간에, 그것이 크게는 정치적 혁명과 격변에서부터 작게는 선거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기뻐하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정의의 실현은 언제나 더 큰 불의를 못보게 하고 그 작은 정의의 성취는 더 큰 반작용에 의해서 사로잡힙니다. 물론 비상식적인 퇴행과 통치 자체의 실패를 드러낸 정권의 폭주에 제갈이 물려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물려진 제갈이 과연 고착화된 양당제적 상황과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과연 어느 정도 전혀 다른 근본적인 정치 사회적 질서를 지향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듭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일반 대중들 대다수가 그것을 원하는가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냉전으로 고착화되어가는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치 질서의 틀과 또한 국제 무역과 산업 발전의 방향이 우리 나라 정치 공동체의 선택에 있어서 얼마나의 운신의 폭을 허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 속에서 잠깐 빛을 드러낸 정의는 역시 그 더 큰 불의와 더 큰 반작용에 의해서 완전히 파묻히는 듯 보이며 정의에 대한 믿음은 냉소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4.19는 결국 5.16으로, 5.18은 결국 제 5공화국 성립으로, 6월 항쟁은 결국 제6공화국으로 그렇게 더 큰 불의와 더 큰 반작용에 의해서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느리게 또 예기치 않게 그 불의와 반작용이 가진 힘이 잦아들 때 즈음에, 여러 우연과 설명할 수 없는 계기들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빛과 작은 정의가 천천히 실현되어가며 그 과정에서 그 작은 정의가 세계에 정착되며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더 넓은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멸망 후 남 유대 역시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기원전 597년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곧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며 오늘의 본문을 썼습니다. 에스겔은 바빌론 침공 이전에는 유대와 예루살렘의 확실한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유대는 자기를 둘러싼 초강대국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의 줄타기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국가와 지배층이 가난한 자를 억압하면서 성전에서 그 국가의 안녕을 바라고 죄를 씻는 제사를 드리는 위선으로 인해서, 유대는 진노를 사고 따라서 결국 유대 역시 이스라엘을 따라서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기원전 597년에 1차 침공이 그리고 기원전 589년에서 587년에 2차 침공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약 75000명 정도가 살았던 예루살렘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150년간 폐허의 상태로 남게 됩니다. 물론 예루살렘이 파멸되면서 그 난민들은 이웃인 에돔과 시리아 그리고 에집트로 까지 도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70년 후에 포로된 자들을 되돌려 보내는 페르시아의 통합 정책으로 인해서 몇몇은 돌아올 수 있게 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바빌론에 계속 눌러 살던지 혹은 더 북쪽인 그루지아나 더 서쪽인 페르시아 까지 유랑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에스겔은 그 목자가 그 양때를 모을 것이라는 것은 예언합니다. 그 앞날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완전히 뿔뿔히 흩어진 상황 속에서, 에스겔은 불가능한 것을 예언합니다.
그 불가능한 예언은 곧 하나님 스스로가 목자가 되어서 각 나라들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며 이스라엘 땅에서 풍요롭게 그 양을 먹이며 공평하게 혹은 히브리어로 베 미슈파트,즉 정의 안에서 혹은 현명한 심판을 하며 그 양들을 먹인다고 예언합니다. 정복을 마치고 그 위세를 드러내는 바빌론의 전성기에 그들이 돌아와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며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을 수 없는 약속 혹은 불가능한 것의 예언은 또한 거꾸로 보면 기존의 통치 자체, 즉 목자로 상징되는 기존의 통치 체계의 운영 자체가 완전한 파탄해버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고대적 상황에서 목자와 양이라는 상징은 성서 뿐 아니라 왕권을 정당화하는 여러 고대 근동 문서들에서 흔하게 드러나는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앞선 구절인 1절에서 6절까지 드러나는 것 처럼 목자들은 양을 잡아 그 살과 기름을 먹고 털을 덮되 상한 자를 포악하게 괴롭힙니다. 목자의 부재와 양을 착취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결국 그 통치 체제의 운영이 그 수혜자들을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영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작동해 온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목자로 상징되는 통치 체제는 이제 실패하고, 소수에게 혜택을 가져오도록 왜곡된 통치 체제는 살찌고 강한자로 상징되는 소수의 유익을 주는 부정의한 현실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 불의를 일삼는 통치체계가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달래려 하는 중앙 성전 체제 자체와 결합해서 거대한 종교적 위선과 정치적 부정의의 복합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 관계와 경제적 번영을 얻기 위한 상업 관계를 통해서 여러 이방 신들에 대한 제사와 관습들이 수입되고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야합에 은근 슬쩍 결합됩니다. 대형 교회 목사님들과 대통령이 서로 그 종교적 신성함과 정치적인 권력을 서로 맞바꾸는 일은 우리가 흔히 보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 대통령은 나름의 정치 철학이나 전문가들의 식견에 의존하기 보다는 주술사의 미신적인 조언에 기대어 판단의 짐을 내팽개치는 모습 역시 우리가 흔히 보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스스로 목자가 되어서 곧 양들을 직접 다스리며 병든 자를 고치며 동시에 살지고 강한자를 없애겠다는 것은 사실 꽤 급진적인 정치적 비전입니다. 목자를 자처하는 권력을 쥔 계급들이나 혹은 그들을 신성화하는 사제들 혹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존재이신 그 선하며 지성적인 힘이 어떠한 시스템이나 통치 체제 없이 양들 무리에 직접 임하여서 정의와 생명의 번성을 이루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정의의 실현이 지향하는 것은 상한 자를 싸매며 병든자를 강하게 하고, 살진자와 강한 자를 없애는 것입니다. 사회의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이 통치 체제를 가지며 운영할 때 결국 그 속에서는 더 강한 자들이 권력을 가지며, 그 권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규칙들과 논리들, 그리고 그 논리들 속에서 결국 피해를 보는 약자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예언에서는 목자를 자처하는 시스템의 운영자들 없이 오로지 하나님 만이 목자가 되어 모든 권력의 기울어짐을 없애고 약한 자를 돌보고 강자를 누르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에스겔이 예언한 그 예언은 우리가 사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어쨋건 바빌론에서 몇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이들이 그럭저럭 다시 예루살렘에 눌러 앉아 사는 방식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도, 그 이후 하스모니아 왕가나, 헤롯 왕가나 로마 직할지나, 유대 반란기나, 언제나 권력자들이 있었고 성직자들이 이를 신성화했고, 그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약한 자들이 있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힘이 이루어져서 모든 약한 자들을 돌보며 권력과 힘을 참칭하는 이들을 멸한다는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보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듯 보입니다.
본명 세속의 역사의 시점에서 볼 때, 에스겔의 예언은 들어볼 만하게 아름답고 좋은 말이지만, 허황되고 이루어지지 않을 말로 여겨질 지 모릅니다. 사실 그 완전한 정의, 모든 사람이 정의롭게 대접받고 또한 약자에 대한 억압이 해소되며 그 아픔이 고쳐지고 위로받고 포용되는 그런 정의는 언제나 역사의 저편에 꿈같은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연결해서 읽어볼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 드러나듯이, 성경은 그 완전한 정의를 이루시는 그 유일한 목자가 바로 예수이며 그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의 피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그 꿈같은 완전한 정의가 이미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사실 오늘의 이 히브리서 본문은 직접적으로 정의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선 12장 28절에 이야기되어지는 바 우리가 받을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개념이나 혹은 14절에 우리가 찾고 있는 "장차 올 도시"의 개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시는 어떠한 통치의 권역에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나라를 의미하는 바실레이아나 혹은 장차 올 도시의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는, 단순히 지역이나 거주 권역의 개념이 아닙니다. 저희 나라가 대한 민국입니다라고 할 때 단지 동아시아 어떤 나라입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국적과 통치권, 즉 그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통치받게 되는 법을 함께 참여하며 세우며 공동의 통치권에 들어간다는 정치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특히 14절에서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가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이 구절은 이 지상의 삶에서 우리의 삶과 가치를 주관하는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정치 체제가 없고 우리는 그에 반해서 앞으로 우리에게 올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정치체제를 추구한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 이 구절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명한 개념인 두 도성론에 영감을 준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 꿈과 같은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결국 그리스도 그 자신에게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종말에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하기에 우리는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에게 앞으로 더더욱 시간이 갈수록 선명하게 올 그 다스림을 아직 기다리며 바라는 동시에, 또한 그 다스림을 우리가 바라고 찾을 때, 이미 그 다스림이 어느 정도 우리의 삶에 빛을 드리우며 우리에게 와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 세상의 정치질서에서 볼 때 허황된 것이며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때로는 애매하고 희미한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 안에서의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다스림은, 그것이 우리 당파의 지배에 소용되는 한에서, 어느 정도 존중할 만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헛소리와 망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먼저 경제 성장을 챙기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효율적 행정과 경찰 치안을 강화하고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동참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혹은 정치적 책략과 대중 동원을 통해서 지배층을 교체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세우고 기존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대안적 국제질서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은 그저 원론적으로 옳지만 아무 의미 없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다스림과 그것이 가진 완전한 정의는 역시 애매하고 희미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며 여하의 통치체계나 강자 없이 약자가 보살펴지는 완전한 정의의 나라를 바라며 살지만, 우리 개개인은 여전히 강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공동체의 정의를 왜곡하며 통치 체계를 교란시키며 이를 운영하는 미진하고 불완전한 통치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게 되는 완전한 정의의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정치 지형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무력해지기도 하며,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정반대로 현실적 정치적 당파성을 완전한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라며 치장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이 점에서 오늘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지상적인 정치적 삶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가 목자되시면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정의와 평화, 사랑의 나라를 바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완전한 정의의 이상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속에서 자신의 것을 버리며 실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면서 전혀 다른 공동체의 질서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살아내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의 이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고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고 믿음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일전에 독일에서 공부할 때, 슐라이어마허라는 유명한 독일 신학자의 묘소에 간 적이 있습니다. 3미터나 더 되는 비석에 금박으로 이 구절이 새겨져 있어서 적잖이 실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신학자는 자기가 그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그 지도자이니 사람들이 죽어서도 나를 기념하라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남긴 것인가라고 오해했던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히브리서 13장 7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 행실의 결말을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고한 그 인도하던 자들은 11장과 12장에 등장하는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 즉 아벨과 에녹, 아브라함, 사라, 모세, 기드온, 다윗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예수까지 향하는 그 믿음의 선조들을 의미합니다. 즉 슐라이어마허 역시 그 구절이 자신의 삶의 좌우명으로서 자신 역시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신앙의 선조들을 기념하고 본받으려 했기에 그 구절을 비문으로 쓴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지점은 행실의 결말이라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본 새번역에서는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 보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개역 개정에서는 이 부분을 행실의 결말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원어에서 결말, 즉 엑바시스(ekbasis)라는 단어는 단순히 최후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진행 과정의 결과 혹은 산출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행실로 번역된 아나스트로페(anastrophe)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다시-돈다 혹은 돌고 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곧 특정 공동체 안에서 계속 돌고 도는 반복적인 것으로 곧 삶의 방식 혹은 습속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반 사람들이 도는 방식과 거슬러서 한번 더 도는 것으로 전복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라는 구절이나 혹은 행실의 결말이라는 구절은 결국 원어적 의미에서는 그 믿음의 선조들의 고유한 행동 방식이 자아낸 결과들의 문제를 의미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유한 행동 방식이 역시 기존의 지배적인 행동 방식과 전혀 다른 전복적인 혹은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인이라는 의미 역시 깔려있기도 합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전복적인 삶의 방식이 가지는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결국 보이지 않더라도 모두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나라들을 이기고 정의를 이루고 불의를 멸망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를 위해서 채찍질과 투옥 그리고 참수와 유리와 환난 궁핍 등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는 인내 속에서 그의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사시면서 그 믿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의 나라가 가지는 전복적인 삶의 가치와 비전은, 그것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는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 자신의 삶을 거는 모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모험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매우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짋어지는 고통과 시련 역시 있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저 한 세상 지나가는 삶의 평안과 안락함을 위해서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일신과 안녕을 위협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 무모함이나 혹은 일신과 안녕을 위해 갖춰놓은 시스템 속에서 가지는 종교적인 낙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평화 사랑의 나라로 온전히 향하면 향할 수록,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기이하게 드러나며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 능력은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 역시 어쩌면 고난과 시련임에도 그 자체로 고통을 느끼지 않게하는 힘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그 믿음의 모범으로서 지나간 과거의 모범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에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범의 핵심은 바로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해서 대제세장의 역할을 하며 속죄하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진 신비한 역할, 즉 하나님에게 인간의 대표로서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리하며 그들의 죄의 용서를 간구하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으로서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며 고난을 감수하는 이중적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바로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 각자가 그를 믿음으로써 그의 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 안에 모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12절에 이야기하는 것 처럼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자신을 바치고 고난을 겪은 것 처럼, 우리 각자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자 작은 그리스도로서 우리가 섬기는 이웃들을 위해서 제사장으로 서며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대의는 어쩌면 정치라는 삶 속에서 추상적으로 느껴질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의는 삶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며 급진적으로 정치를 벗어나는 동시에 정치를 거쳐가면서 정치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다시 우리의 원래의 문제, 즉 지상의 정치적 지형과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의 이상, 즉 어떠한 위계나 불평등 없이 모든 상처입은 생명을 어루만지며 보듬고 감싸는 완전한 정의를 구현해내는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정의의 이상을 실현해 갈 때, 이 길은 현실 정치에서 작동하는 당파성과 혹은 정의에 대한 현실적 힘의 논리 모두를 넘어서서 주어진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강한 자와 살찐 자에 도전하며 약한 자와 상한 자를 돌보는 근원적인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가 목자되신 완전한 정의의 길은 특정 파당이 주장하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비전을 철저한 기독교적 가치의 실현이라고 성급하게 긍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여러 힘들의 충돌과 경합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 힘들의 평형상태나 타협 혹은 야합을 하나님 나라의 평화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지상의 정치적 흐름들과 정치 운동에서 우리가 머리를 둘만한 도성, 즉 지속적으로 우리가 헌신하고 마음을 둘 정치 공동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분명히 세속적 정치 공동체의 한복판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속 공동체에서 세속적인 관점에 따라서 정의와 평화가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자신의 양심과 판단력에 따라서 분별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특정 당파적 정치 공동체의 존재나 그것의 대의가 우리의 삶의 헌신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좀 더 완전한 정의만을 바라며 그 바람 속에서 그 하나님의 도성의 정의를 우리 안에서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로지 앞으로 올 나라를 기대하며 마치 이미 온 듯인 양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주어진 체제 안의 강한자와 살찐 자에 도전하고, 또한 약한자와 상한자를 돌보는 근원적인 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합니다. 물론 이 두 작업은 함께 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한자와 살찐 자를 멸하는 것은 궁극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일이고 또한 잠정적인 관점에서도 세상의 힘의 논리이며 이후 어떤 특정한 때에나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약한자와 상한 자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대안적인 국가로서 대안적인 정치 공동체로서 우리가 모두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을 위해서 때때로 다양한 방식으로 강한 자와 살찐 자를 멸하지 못해도 도전하는 것은 현실의 정치 체제가 담아내지 못하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 한 복판에서 특정한 당파에 기대는 소속감이나 안정감이나 혹은 그에 따라 자기 당파의 현실 논리에 따라서 그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 한 복판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외곽과 주변부와 변두리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가지는 관계망들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안적인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반짝이는 정의의 작은 별빛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할 때 교회는 존재 자체로 지상의 정치 공동체를 흔드는 비판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대안적인 새로운 정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21절에서 이야기 된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접하는 삶의 다양한 현장들에서 우리가 이웃을 접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자체가 선한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정의가 이루어지게끔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온전케하다로 번역된 카타르티조(katartizo)라는 원어는 단순히 완성시키다가 아니라 능력을 갖추게 하다 혹은 완전한 기능을 하게끔 그 틀을 맞추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를 우리의 힘으로 혹은 우리의 의지로는 우리 삶에 구현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완전한 정의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겪으며 약하고 상처입은 이웃을 살리고 돌보며 전혀 다른 공동체의 질서를 보이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우리의 삶의 틀을 그에 걸맞게 맞춰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세세 무궁토록 있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회 여러분.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과 그것이 드러내는 여러 부침들은 우리로 하여금 얄팍한 승리감에 도취되게 하기도 하고 또한 우울한 낙담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정의의 이상을 품고 각자의 위치에서 이를 살아내려 노력을 해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온전한 정의의 이상은 정치의 영역이 담기에는 그 근본적인 가치로 인해서 너무나 깊고 또한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기에 너무나 넓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상처입은 생명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서 모든 고난을 함께하며 그 깊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의 바다에 뛰어들 때, 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이고 그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의 비전을 보여주시고 또한 그것을 살아내도록 부르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에 우리를 접붙여주시고 그를 통해서 우리 역시 이웃과 그 온전한 정의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바치게 해주신 것 역시 두려움 속에서 감사를 드립니다. 미미하지만 저희의 삶이 당신의 정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저희를 갖추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의 의지를 당신의 나라를 향해 온전히 돌이킬 수 있도록 하시고 저희의 무지에 지혜를 주시어서 이웃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와 주시고 그로 인해서 미약하나마 당신의 정의의 영광을 비추는 일을 감당하게끔 당신의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