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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표현해야 합니다. / 박조준 목사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의 과정을 살펴봄으로 신앙이란 것이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신 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땅에 들어가는 첫 번째 과정에서 두 인물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여호수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라합입니다.
이 두 인물은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여호수아는 남자이고, 라합은 여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쓰실 뿐 아니라 여자도 쓰십니다.
여호수아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대단히 지체가 높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한 민족을 이끄는 도덕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부도덕한 삶의 그늘에서 인생을 살아왔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 시점에서 다 같이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들의 삶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삶을 통해서 이 사람들의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로, 여호수아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의 백성을 이끌 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 1장 3절에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이제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향해서 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 자체가 순종입니다.
믿음은 이와같은 순종의 첫걸음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미숙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야 할 그 땅에 관해서도 사실 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과정을 생략하고 하나님의 메시지와 마지막 결과만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어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일에 과오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땅이 다 네 땅이 될 것이니 그 땅으로 들어가라“ 고 말씀하셨을 때, 여호수아가 용기백배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 마침내 그 땅을 정복했다고 이 사건을 단순히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여호수아 1장에서 본대로 여호수아가 이 말씀을 처음 받았을 때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한 사람에게 담대하라는 말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헌신하는 사람에게 더 힘내어 헌신하세요 하는 말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그 땅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서 전쟁에 임해야 했기 때문에 용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명하신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저했을 것입니다.
이런 초조와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발걸음을 옮긴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올 때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말씀을 듣고서도 불안해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초조해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은 형편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순종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조용히 기도할 때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성경을 펼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순종한 여호수아처럼 순종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여호수아의 믿음은 최선을 다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 우리가 다 이 약속을 받았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아무 준 비 없이 그 땅에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했습니다.
그냥 가도 될 텐데 양식은 무엇 때문에 예비합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긴 여정을 위해서, 또 전투를 위해서 양식을 예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현실에 대해서 무지하고 둔한 모습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장 1절을 보세요.
“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했으면 가면 될 터인데 정탐은 왜 보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우리는 아무것 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 최선을 다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필요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사실 모세가 그 땅에 정탐을 보낼 때 자신이 정탐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한 번 본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데도 왜 들어가라고 명령만 하지 않고 또 정탐을 보냈습니까?
과거에 한 번 다녀왔지만, 그 동안에 그 땅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현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라 하지만, 그저 아무렇게나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조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의 치밀한 계획 하에 두 사람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성에 정탐이 들어왔다는 정보가 새어나간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이나 두 정탐꾼이 파송된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두 정탐이 그 땅에 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그들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도 왜 이런 위기가 찾아옵니까? 그 것은 이런 위기를 통해서 백성들이 더 잘 훈련되어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 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말해, 진정한 믿음이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위기에 봉착한 두 정탐꾼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라합이라는 여자였습니다.하나님이 이 여인을 쓰신 것은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유명한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본래 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기생이란 말은 점잖은 번역이고, 원문대로 번역하면 창녀, 매춘부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왔을까요?
도움은 생각지 않은 데서,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옵니다.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는 놀라운 방법으로 주의 백성을 돕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안과 초조 가운데 그 말씀을 받았지만 마침내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엘리야에게 양식을 공급했습니까?
까마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까마귀를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멀리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는, 이 신기하 고 파격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보세요.
문제는 내가 순종하는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 삶의 길에 함께하신다는 표적을 주십니다.
엘리야더러 그릿 시냇가에서 다시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돕기 위해 준비된 사람은 가난하게 혼자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서 통에 조금 남아 있는 가루와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돕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삶을 살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지십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순종하고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둘째로, 라합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라합은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최고로 신뢰하는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그 행위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정탐꾼을 영접하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탐꾼을 숨긴 사실이 탄로나면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과감한 결단을 한 것은 그녀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났는지를 증언하고 그 다음으로 라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세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면서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믿음을 모험적인 행동으로 나타낸 사람의 예로 라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정탐꾼을 숨겨주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너무 안일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도전이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도 모슬렘이 국교를 이루고 있는 중동지역을 방문해 보면 그곳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희생을 필요로 하는 삶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라합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오늘 주신 말씀 2장 10절을 보세요.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 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 이라” 했습니다.
라합은 본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떠돌아다니는 소 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고 계시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행진시키고 계시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우주의 창조이신 한 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라합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주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들려온 소식을 통해서 라합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 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되었고,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자마자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에 관한 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모든 것을 다 알고서야 믿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알고야 믿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에 대해 정확하고 절대적인 대 답을 얻었기 때문에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가 전혀 알 지 못하게 해 놓으시고 그저 맹목적으로 믿음을 강요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계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한 줄기의 빛을 주십니다. 그 한 줄 기의 빛이 나에게 던져졌을 때 그것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 계시의 빛줄기를 붙들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언덕 위에 신앙에 관해 방황하는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인생은 무엇인가? 아무리 더듬어 찾아도 그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한 줄기의 빛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 빛이 언덕 위에 있던 이 사람에게 그가 걸어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한 줄기 빛으로 인해서 그 길을 발견한 순간,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자기에게 다 가온 한 줄기의 빛을 보고, 알지 못해서 방황하던 그 언덕에서부터 그 길을 향해서 자기의 몸을 던지듯 뛰어 내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의 결단이 참된 신앙의 경험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 이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 그 하나님께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빛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한 줄기의 빛을 가지 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삶 속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사실, 라합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 들어갔던 라합에 비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알고,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이웃들의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습 니다.
그리고 라합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단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어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 편에서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만일에 정탐꾼을 숨겨 두었다가 이 사 실이 발각되는 경우에 라합은 민족의 반역자로 규탄을 받을 것이고, 아마 그 성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자기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편에서 믿음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값비싼 대가를 각오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라합의 이 놀라운 믿음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일입니다.
만일 중동의 국가들처럼 예수를 믿으면 세금을 더 내야하고,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잃게 되고, 때로는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혹시 내가 자영업을 해도 장소의 제한을 받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라합과 같은 이런 시험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 신앙의 결단을 지키는 삶 속에서 제자의 값을 지불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믿음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여호수아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믿음으로 이삭은 이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라합은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라합이 보여준 신앙의 결단은 여호수아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던 라합이라는 여인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 믿음의 여인 을 보세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라합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라합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 전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여리고 성이 몰락해 버리고 마는 아수라장 속에서 라합의 가족 전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 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정탐꾼을 보낸 것은 단순히 가나안 땅을 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던 이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보셔서 그 심판에서 구원하시려는 뜻 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를 예비하시지 않았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당할 때 주님 을 신뢰하는 그의 백성을 건져내기 위해 아브라함을 통해 롯을 구출해 내지 않았습니까?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전 사랑하는 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리 정탐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세요. 뿐만 아닙니다.
라합에게 주어진 명예는 위로 이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 에서 라합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 이 여인이 피택된 놀라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합의 믿음은 신앙의 고백으로 나타냈습니다.
본문 2장 8∼9절을 보세요.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듣고, 믿음으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안다 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영생을 주신 것을 나는 압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내가 압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 날 때 주께서 나를 위해서 천국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내가 압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 그 것이 우리 신앙 표현의 전부입니까?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어떻게 그 믿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라합은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크게 믿는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단하는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참 신앙의 표현이 없는 내 삶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주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눈앞의 이익 때문에 신앙의 가치를 쉽게 포기하는 어리석음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