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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제자수양회 주제1강 (김안드레)
내 안에 거하라
말씀 / 요한복음 15:1-17
요절 / 요한복음 15장 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매우 은혜롭고 복된 말씀입니다. 15장은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유월절 만찬 후 자리를 옮겨 말씀하는 첫번째 말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나와 감람산으로 기도하시러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고별 설교를 하십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본문은 매 구절이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강조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거한다’가 자주 많이 나옵니다. 또 ‘열매’가 많이 나옵니다. 또 기도, 계명, 사랑이 강조됩니다. 오늘 이 말씀의 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 신적 선포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인데 특별히 ‘참’을 붙여 ‘참 포도나무’라 말씀하십니다. 비교하는 대상이 있는 것인데 무엇과 대조해 ‘참’이라고 하셨을까요?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주께서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심은 포도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 정성으로 돌보셨는데, 그들은 불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열매 맺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내가 바로 참 포도나무, 참 이스라엘이다.’고 그리고 ‘너희는 포도나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붙은 가지다.’고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새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로 대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나무 되신 예수님에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아야, 그래야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1). 농부가 농사짓는 것은 취미 삼아 하는 일이 아니라,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십니다(2).’ 열매, 열매 맺는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신다.’ 이 말씀을 6절 말씀과 함께 보면 ‘제거해 버린다’는 것은 심판하여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제거해 버린다’의 헬라어 원어는 ‘들어올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뜻으로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유대 농부들이 땅에 닿은 포도나무 가지를 들어올려 돌로 괴어 받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흐름에서 보면, 열매를 못 맺는 가지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들어 올려서 햇빛을 보게 해서 열매를 맺게 도우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 더 적절할까요? 기본적으로 성경 다른 곳에 나온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에 모두 합당합니다. 15장 말씀은 제자들에게, 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도망하고 흩어질 제자들에게, 너희 그러면 구원에서 짤라버리겠다고 하시는 경고나 압박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연약한 제자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험한 태풍이 부니까 내 옆에 꼭 붙어있어야해’ 하는 것입니다. 제거해 버리든 들어올리든, 하나님께서 참포도나무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거기에 붙은 가지를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기르십니다. 농부는 열매가 잘 맺을 수 있도록 책임을 다 하십니다. 그래서 거름을 주어 영양분을 공급하고, 햇빛을 보게 하며, 돌보십니다. 주의할 것은 열매를 잘 맺는 가지에도 수고의 작업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는 가지에도 잘라내는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는 전정 작업을 말하는데, 불필요한 가지, 영양분을 분산하여 소모시키는 잔가지를 잘라서 정리하여, 보다 알찬 열매를 잘 맺도록 하십니다.
포도나무를 보살피는 과정은 하나님이 인간 생활을 돌보시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무익한 것들을 쫓아 살다가 열매 맺지 못하고, 삶에 지쳐 축 늘어져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올려주십니다. 우리 안에도 깨끗해져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음란, 정욕, 미움, 분노, 탐욕, 인간적인 욕망 같은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열매 맺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잘라내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는 신자의 삶의 과정, 성화 속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수단이 고난일 수도 있고, 징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가지를 제하시고, 믿는 성도의 삶과 생활을 훈련시키셔서, 그들이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힙니다. 불경건하고 불의한 진흙탕 같은 이 세상에서도 꼭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하나님이시고, 나무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열매를 맺으라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꼭 붙어있으라 명령하십니다. 그 분께 꼭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맺으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정결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말씀으로 인하여, 말씀 때문에 이미 깨끗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 ‘목욕하였다.’(13:10)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또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고, 발만 씻으면 되는 것처럼, 마치 가지를 쳐내는 작업을 통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도 더욱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본문은 현재형입니다. ‘머물러 있다’ ‘계속 있다.’ ‘오래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며, 함께 머무는 상태가 지속되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룹니다. 우리는 가지에 불과한데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해도, 많은 것을 이루어도, 거기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얻지는 못합니다. 많은 돈이 편리함은 주지만, 내면의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스트레스 요인이 없으면 좋지만, 저절로 행복으로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생명을 구원받고,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복 주시되, 참 생명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의 영광을 맛보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4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 안에’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뒷문장 ‘거하리라’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는 말씀이고, 또 ‘내 안에 거하여,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상호 머무는 것인데,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초청하실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님을 모시기를 원하고 안에 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거하라’ 부드럽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전체 질서 속에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비집고 들어가는, 격렬함이 있습니다. 데면데면하게 마주 서있는 것은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여러분을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정도라면, 별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문의 거한다는 것은 간절한 소망으로, 마음이 역동하여, 두 인격의 생명과 삶이 엉키며, 치열한 교제됩니다. 그냥 위에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을 수 없는 연합입니다. 굳세고 치열한 지속적인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과 성도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기에 따라오는, 내적 영적 신앙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열매 맺는, 우리 인생들이 소원하는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한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포괄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러 가지 것들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는 것들, 인정받을 만한 성과들을 열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거나 외적 성공이나, 유명해지고 보여지는 것 같은,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성경은 열매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열매라는 말이 들어가는 여러 열매가 나옵니다.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우선 세례 요한의 말처럼,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도 있고, 의의 평강한 열매도 있습니다. 삶에서 맺히는 열매로,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처럼,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우리 삶으로, 우리 안에 인격적 삶을 드러내는 것이 열매입니다. 뒤에 보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 누군가가 예수님을 알고 그 영혼을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그것도 열매입니다. 주님 편에서 보면, 이미 우리 자체도 주님의 귀한 열매입니다. 다만, 더 예쁜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하시는 중입니다. 정리하면, 삶과 인격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 많아져, 그리스도의 모습이 널리 퍼져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열매일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가지가 나무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함으로, 시간이 지나면 말라 비틀어집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이들은 밖에 버려져 말라서,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살라버립니다. 거짓 포도나무 이스라엘도 그렇지만, 인생은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에서 떨어져서 말라비틀어진 가지임은 분명한데, 한편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원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의 모든 가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룟 유다는 마음이 변한 걸까요? 처음부터 붙은 척만 했던 걸까요? 그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이적을 보고 행하기도 했지만, 결국 배신했습니다. 그의 사정을 알 수 없고, 그런다 치고, 우리는 내가 예수께 정말 붙어있는지, 정말 붙어있는 곳이 예수인가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을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그것은 신앙인이 아니라,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경고보다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시며, 격려하며 힘을 실어주는 말씀입니다. 폭풍이 다가올 때, ‘내 손 꼭잡고 있어 그래야 살아’하는 말은 생명을 위한 말이지만, 놓치면 죽는 것도 엄정한 사실입니다. 불안해하고 떨 필요는 없지만, 분명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하라’는 것은 어떤 뭔가를 행하는 조건에 따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아니라, 관계로, 주님과 깊게 교제하는, 인격적 사귐에 기초한 관계성입니다. 그런다고 할 때, 제자는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삽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삽니다. 매우 구체적인 말입니다. 붙었는지 붙은 척했는지, 믿는 자들 스스로에게는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도구로만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힘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주님 자체를 바라보고 나아가는지, 스스로는 잘 압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다면 그저 말만 있다면,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7-17절 앞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더 구체적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판 날에 인정받을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세상에 맞설 수는 없습니다. 경건하지 않고 불의하기까지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기도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가지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험한 이 세상에서 스스로 열매 맺을 능력이 없는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능력에 상관 없이, 오히려 능력이 없을 때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매를 이야기하시고 바로 다음으로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모든 소원과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며 사귀기를 열망하시고, 또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조건 기도 들어준다는 말이 아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정성들이면 다 주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 하나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만, 본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이어서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기도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의 말을 하지, 어른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기도를 바르게 잘 할까 생각해야 하지만, 그래서 안하는 것보다는 기도는 무조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인식이 한계적이어서 열매 맺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에 하나가 되면, 하나님의 선한 뜻에 맞게 따라 구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즐거워하심으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힘을 얻기도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를 용서할 힘도 없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여 열매를 맺고,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8).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그로 인해 제자로 입증됩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9). 먼저 주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매우 은혜로운 데, 특별히 풍성하게 하는 우리를 압도하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9절 앞부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하나님도 예수님도 완전하신 분입니다. 완전하신 분이 완전하신 분을 완전한 사랑을 하십니다. 반면에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과 상황을 따라갑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합니다. 변덕스러워서, 우리끼리도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우리를, 그 수준에 맞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이고 존재이며, 완전한 교통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이에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취미 생활하는 사랑과 애정이 아니라, 내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사랑하신 것처럼, 너를 사랑하겠다고 하십니다. 때로 가지 치기도 하시지만, 사랑으로 우리를 소중하게 가꾸십니다. 그러니 반드시 열매가 맺어집니다.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사랑으로, 두 팔 가득하게 안아주시고, 축복하며 사랑해주십니다.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주고, 예수 안에서 그 사랑을 누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고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었을까요? 우리와 다를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도 계명을 지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다’고 하십니다(10). 우리도 같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킬 때,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계명을 묵상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이기적이고 죄인인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들의 글쓰기의 방식 중에 교차대조법이 있는데, 교차대조법의 구조에서는 가장 중요한 말이 가장 중심부에 놓입니다. 이 방식으로 보면, 한 단락인 07-17절 말씀을 보면, 11절 말씀이 가장 중심에 두고, 앞뒤로 같은 내용이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는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 11절에서도 깨알 같은 중요한 강조점이 하나 있는데, 무엇일까요? “내 기쁨”입니다. 일이 잘 풀리고 시험 잘 보고 그냥 기쁘고 좋은, 그런 기쁨이 아니라, ‘내’ 기쁨입니다. 지금 분위기 좋으니까 너희도 같이 즐거워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위기 보면, 당시 예수님은 힘든 상황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고, 체포되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산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1). 아이 낳는 임신의 기쁨이 가득해도, 애 낳을 때는 산통은 고통입니다. 그런다고 해도 아이를 낳으면 고통은 더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과 처지가 넘볼 수 없는 기쁨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기쁨을 충만히 누리십니다. 주님의 기쁨은 항상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누리는 본질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들 수 있지만, 세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평안, 큰 산의 장엄한, 고요하고 평화로운, 평강한 기쁨이 주님께 있습니다. 저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너무 아파서 주께 갔을 때, 주께서 제게 주신 평화의 기쁨이 임했을 때, 이전의 눈물과 아픔이 사라지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기쁨은 하늘에서 누렸던 기쁨과 같습니다. 전혀 다른 기쁨이 아니라, 원래 그 기쁨입니다. 너희가 내 기쁨이 충만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면, 계명을 사랑합니다. 10절에서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12절은 ‘내 계명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2번 나오는데, 앞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고, 뒤의 사랑은 그런 사랑은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서로 간의 사랑입니다. 처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주님은 보이셨습니다. 자신을 증명하셨습니다. 본문은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 너희 죄짐을 지고 너희 인생의 문제를 완전히 풀러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 일상은 진행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 이 일상으로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젊을 때는 죽음이 멀게 느껴지지만, 누구나 결국 죽습니다. 그 후에는 열매 맺지 못한 가지가 불살라지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손해 안보고, 고생 안하려 했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으셨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 그 고통에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친구를 위해 죽는다고 하셨지만, 사실 우리가 주님의 친구였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내 생명을 다해 너희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 에덴 동산을 허락하시고, 이제 ‘너희는 내 친구야’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친구라(14)” 이것은 당시 문화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신과 사람이 친구라고, 감히 말로 꺼낼 수 없는 말입니다. 임금이 백성 중 한 명에게 너는 내 친구야라고 말하면, 요즘 사극을 보면, 감격할 것 같지만, 실제 왕조 시대에는 몸 둘바를 몰라 불편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친구라고 한다고 해서, 감히 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인 위치가 다릅니다. 친구라고 하고, 내 안에 거하라고 하고, 나는 참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라는, 깊은 유대감과 인격적 관계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습니다. 이는 종교적으로도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적극적으로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원치 않습니다. 기계적으로 고개숙이는 관계를 원치 않으십니다. 종인 우리를 친구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 파격적으로 자신을 낮추실 뿐 아니라, 파격적으로 우리를 높이십니다. 친구들 사이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아버지의 일을 알게 하겠다(15).’ 종과 친구의 차이는 신뢰의 차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은 친구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신하에게 황제가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은 큰 영광이고, 특권이 따릅니다. 우리가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행동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행할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먼저 오셔서, 우리를 택하여 들어 세워주시고, 열매 맺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으로 가도록 이끄셨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이런 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말씀은 억지로 사랑해야 그래야 나무에 붙어있을 것이다는, 겁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복을 누리기 위해 주신 무기가 무엇입니까? 앞에서도 나왔는데, 16절 말씀에서 또 반복되어 나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열매 맺는 것의 처음과 끝이 기도입니다. 시간을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이 무슨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겠습니까. 내 안에 계시는 분과 말 한마디가 없다면, 정말 함께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을 경험하겠습니까?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열매 맺게 하기 위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맺으려면, 주님 안에 거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열매가 없다면, 내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위성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열매를 맺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열매가 있는가? 열매가 없다면, 다음 중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고르시오. 1. 기도한다. 2. 전도를 나간다. 3. 헌금 액수를 늘린다. 4. 일대일을 더 한다. 5. 이웃을 섬긴다.
다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먼저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고자 할 때는,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방향은 포도나무에 잘 붙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과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고자 하고, 열망해야 합니다. 내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살기 싶다고 열망한다면,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세상을 견딜 힘을 얻고, 맷집도 강해집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하라. 사랑할 힘이 없을지라도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필요를 구하라. 우리 함께 이 세상을 이기고 열매를 맺자라고 축복하십니다.
마무리 입니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우리 인생이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의 사랑을 많이 누리고 말씀대로 살며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