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 배영주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소녀를 피하려다 급하게 좌회전을 했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주차된 빨간색 새 차를 퍽 들이받았다. 상대방 차의 헤드라이트가 부서져 땅바닥에 널브러지고 보닛 뚜껑이 떡하니 반쯤 입을 벌린 채 찌그려졌다. 내 차는 크게 부서진 곳이 없었지만 가슴이 벌렁대고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몇 분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차주에게 연락하여 보험처리를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간이 콩알만 해져 차 운전을 접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그땐 짬 없던 시간의 연속이었다. 차르륵 동전 소리, 샥샥샥 지폐 세는 소리가 아이들의 태교를 대신했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달려와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잡다한 집안일을 하느라 지칠 겨를조차 없었다. 눈만 마주치면 방글방글 잘 웃어주는 첫째 아이, 그리고 한참 터울로 태어난 둘째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하도 이뻐 아이들을 쳐다보는 순간 낮 동안 직장에서의 지친 피곤함이 저절로 잊혀졌다.
봉급생활자에 익숙했던 내게도 어느 날 변화가 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이후 몇 달 가량 여유를 가진 적이 있다. 드디어 내 삶의 공간에 시간의 여백이 생긴 것이다. 둘째 아이를 옆 좌석에 태워 차를 몰고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다녀도 보았다. 그런데 그 날 차 사고가 내게 호된 한 방의 펀치를 날린 것이다.
'차랑 너랑은 궁합이 맞지 않아!' 그 날 이후부터 나는 여태껏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사람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습관이다. 오랜 세월 차를 운전하던 습관이 있는 사람에겐 차 없는 행차가 상당히 불편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운전을 포기했기 때문에 별 불편함을 못 느낀다. 하지만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일을 하러 갈 때,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 날엔 쌩쌩 질주하는 차가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한때 내게도 소속이 있었고 명함이 있었다. 빈틈없이 돌아가는 소속에서 벗어난 나의 제2의 직업은 '자유인'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소속도 명함도 없다. 자유인은 속박의 의무가 없기에 언제 일자리를 잃어버릴까, 라는 염려가 고정된 직장인보다 덜하다. 일을 하려고 작정을 하면 할 수 있는 게 자유인의 장점이다. 그렇다고 자유인이 욕심이 과하여 여유를 갖지 않으면 탈이 난다.
지구도 열 받아 몸살을 하면 들썩 들썩 여기저기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이 터진다. 내 몸도 과부하를 당하고 말았다. 어느 날 실룩거리기 시작하던 얼굴 근육이 급기야 굳어버렸다. 양치질을 하려는데 한쪽으로 물이 퐁퐁 새기에 거울을 보니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 쪽 입술이 씨~익 올라가 있다. '앗, 찌그러진 앵두, 입으로 일을 해야 하는 내게 하필이면 비뚤어진 입술이라니!' 배배꼬인 내 몸속 신경 세포들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지난여름 꼬박 두 달 넘게 아침마다 신경과 계통의 한방 양방 치료를 겸한 치료를 하여 서서히 완치 되었다. 병원을 다니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이 '항상 긴장 상태' 라는 사실이다. 수십 개의 바늘로 침을 맞을 때 느긋하게 있지 못하고 내 몸이 너무 긴장한 탓에 바늘 하나하나가 튕기듯 하여 더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 위해 일요일마다 틈을 마련한다. 부산 인근 해변 도로나 둘레길을 아무런 생각 없이 멍 때리며 걷는다. 예전에 혼자 종종 타고 다니던 완행열차의 느릿한 멋만큼은 덜해도 경전철이 생겨 부산 근교 야외로 쉬이 다녀올 수 있다. 이런 때에도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왕복 몇 십분은 걸어 다녀야 한다.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장점이 적지 않다. 어느 정도 건강에 도움이 되며, 생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먼저 체험할 수 있다. 지하철 속 서민들의 옷차림에서, 나무와 꽃이 지고 피는 미묘한 단계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버스를 기다리며 보게 되는 여린 잡풀도 눈에 띈다.
이들은 도로 어디든 틈만 있으면 돋아나 생명력을 과시한다.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을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던가. 더러는 갈라진 시멘트벽 틈새로 소복이 돋아난 노란 괭이 풀꽃도 관찰할 수 있다. 햇볕 받으며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 모양이 소박하다. 소복이 돋아난 노란 괭이 풀꽃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길거리 사람들을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빼꼼히 쳐다본다.
좁은 틈새로 피어 있는 저 작은 풀꽃들은 다만 자연의 순리에 따라 피고 질뿐 사람들처럼 허둥대지 않는다. 대부분 식물이 땅의 틈을 통해 싹을 틔워 숨 쉬듯, 사람의 마음에도 쉴 여유를 주어야 숨통이 트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