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6.대림 제3주간 목요일>
<루카7,24-30>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5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26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요한에게서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하느님 뜻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뜻 물리친 것이다.
어떻게 회개하지 않는가?
그 바닥에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 앞에서,
인간적인 영합,
중동에 빠짐,
무기력하게 나타하게 있음,
시기 질투나 분노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지금까지 삶에서 되돌아 서는 것.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왜 고통에 마주하느냐?
내가 주인이다 하면서,
더 소유하기를, 더 사랑 받기를, 더 성취하기를 바라면서
나의 탐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결과로 원죄가 씼어졌지만 원죄로 인한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요?
기도와 정화입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30초가 넘지 않게 자신을 사라지게 합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순간 밖에 없으니,
순간과 순간 사이가 30초가 넘지 않게 다 봉헌합니다.
삼위일체 복녀 엘리사벳은 재능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끊임없이 마음으로(영spirit으로) 흠숭의 예를 드립니다.
그러자 외적인 침묵이 생기고,
내적인 침묵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무의식 차원이 올라오고 정화되어,
신적인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대림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선물로 오실 예수님을 위해 침묵으로 비워내는 것입니다.
방법은?
순간 순간을 의식하며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Luke7,24-30>
24 When the messengers of John had left,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s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to the desert to see - a reed swayed by the wind?
25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Someone dressed in fine garments? Those who dress luxuriously and live sumptuously are found in royal palaces.
26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27 This is the one about whom scripture says: 'Behold,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he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28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no one is greater than John; yet the least in the kingdom of God is greater than he."
29 All the people who listened, including the tax collectors, and who wer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John, acknowledged the righteousness of God;
30 but the Pharisees and scholars of the law, who were not baptized by him, rejected the plan of God for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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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Part05
불황에도 끄덕없는
‘창재’로 거듭나라
창재는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
이들이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은 회사가 위기 상황에 빠질 때다.
이들의 능력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4)
천재보다 환영받는 이름,
창재
천재의 기준은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다. 선천적이며 독창성이 있다.
창재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창조적이면서 성공한, 유능한 사람들을 말하며, 후천적이며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하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7-229)
창조력은
생존의 문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창조적 학습이 진행 중이다. 대입 논술 고사가 그 좋은 예이다. 요즈음 입시 문제는 수학, 과학, 사회 등이 뒤엉켜 있어 어느 과목의 문제인지도 알 수 없다. 학생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회사 입사 시험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입시와 승진도 창조성이 좌우한다. 회사도 새로운 변신과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면 서서히 기울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음식점들은 계속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손님들이 먹어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만든다. 창조성 교육을 따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재나 영재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주인 의식, 변/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창조의 계기가 되고, 바탕이 되었다.
현대인은 낡은 것에 쉽게 식상해하는 습성이 있다. 새것에 대한 거의 병적 강박증이다. 이제 창조는 생존의 전략이다. 문제는 창조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 다시 강조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 해도 넓게, 깊게,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창조는 시간 싸움이다. 한발만 늦어도 허탕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0-232)
최고의 창재,
빌 게이츠의 비밀
매킨토시 컴퓨터인 애플의 OS 를 개발한 스티브 잡스가 독창적인 천재라면, 빌 게이츠는 탁월한 비즈니스맨이자 아이디어맨이며, 창재다. 그는 19세 때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설립했다. 10대부터 컴퓨터에 몰두해 초인적 에너지와 기발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부호가 된 것이다.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윈도 95를 심야 0시에 첫 발매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지금 안 사면 놓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소비자들이 점포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한 언제나 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긴장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그의 오늘은 이러한 ‘불안의 힘’ 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자에 앉으면 몸을 앞뒤로 흔드는 그의 습관도 어쩌면 불안을 털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 몸을 리듬감 있게 움직일 때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되어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는 쓸데없는 데 정력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철저한 비즈니스맨이다.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하버드 대를 중퇴한 것반 봐도 그렇다. 그는 세상 어떤 것보다 실익을 앞세운다./
그리고 그의 성공 요인 중 또 하나는 높은 임큐(EQ)다. 그것이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얻게 했고, 세계적 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전적 의미의 천재라기보다는 성공적 비즈니스맨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한 현대판 창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업가 기질을 보여 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이기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못 이기는 인간의 변명일 뿐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3-235)
누구에게나.
감정 지능이 있다.
우리는 천재라고 하면 IQ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가드너는 IQ 한 가지로 모든 분야의 천재성을 가늠할 수 없고 사람마다 특정 분야에 ‘강점 지능’ 이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단순한 IQ와는 달리 다원적 지능(Multiple Intelligence)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드너의 다원적 지능
다중 지능 -> 능력 정의
1.신체 운동 지능 ->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능력과 대상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능력
2.인간 친화 지능 -> 타인의 기분, 동기, 의도 등을 지각하고 구분할 수 있는 능력
3.자기 성찰 지능 -> 자신에 대한 정확한ㄴ 이해와 조절.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 관리 능력
4.논리 수학 지능 -> 논리적, 수리적 유형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추론하는 능력
5.언어 지능 -> 언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능력. 언어 예술에서의 단어 선택과 창의적인 언어 사용 능력
6.공간 지능 -> 시간적, 공간적 세계를 정확하게 지각하고 변형하며, 구체적, 물리적 자극 없이도 시각적 경험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
7.음악 지능 -> 음악적 표현 형식을 지각하고 변별하며 표현하거나 창조하는 능력.
8.자연 친화 지능 -> 다양한 생물체와 주위 대상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구별하는 능력. 동식물을 돌보고 기르는 능력. 유기체와 민감하고 상호 작용하는 능력
다원적 지능의 각 영역은 독립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나의 강점 지능은 무엇인가’ 에서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인 공부의 첫걸음이다. 잠시 멈추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관심을 끄는 것, 재미가 있는 것, 해 보니 다른 것보다 쉬운 것,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은 일단 시작만 하면 어느샌가 절로 몰입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록 가드너의 천재 명단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모차르트는 자신의 강점 지능을 100% 살린 행운아였다. 그는 음악적 재능을 일찍 발견했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음악을 생업으로 삼았다. 발견, 훈련, 지속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 그의 강점 지능이 위대한 음악이라는 꽃을 피운 것이다.
모차르트처럼 거장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강점 지능은 분명히 있다. 관건은 그것을 빨리 찾아 개발하고 열심히 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즐겁게 공부하기의 포인트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6-239)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뇌의 힘
인간의 뇌는 좌우 양반구(兩半球)로 나뉘어 있으며 그 기능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로저 스페리의 연구로 밝혀졌다. 인간의 양 뇌, 즉 좌뇌와 우뇌는 각각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그는 노밸의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뇌는 이미지적 사고, 감성적, 직감적인 반면, 합리성과 과학성은 다소 약하다. 한편 좌뇌는 지성, 이성, 논리성, 객관성, 합리성이 강하다. 물론 뇌의 복잡한 기능을 두부 자르듯 엄격히 구분할 순 없다. 그러나 특징적 경향성을 염두에 두면 인간 심리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은 어느 쪽이 우세할까? 대체로 우뇌 우위형이 많다는 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다. 우리는 사물을 판단하는/데, 우뇌가 먼저다.
*좌뇌와 우뇌의 전혀 다른 기능
*좌뇌의 역할 / *우뇌의 역할
언어적 사고, 판단 시각적, 이미지적 사고 판단
많은 정보에서 체계적 추리. 하나의 정보로 전체를 파악
이성, 지성 감성
논리적 직감적, 감각적
분석적 공간적, 도형적
합리성 비합리성, 신비성
규범, 억압 무규범, 자유
유교적 무속적, 무교적
의식 무의식
‘저 여자 참 근사하다!’
길에서 만난 여자, 이름도 성도 모르는데 그저 인상으로, 직감으로 좋다는 것! 이것이 우뇌의 작용이다. 그런데 사귀다 보니 성격이 아주 까다롭고, 사치스럽다. 이때부터 좌뇌의 분석적이고 지적인 판단이 작동된다.
우리가 어림짐작으로 대충 하는 버릇도 우뇌에서 비롯된다. 치밀한 분석이나 사전 계획도 없이 감만 잡히면 덤빈다. 일하는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기막힌 유연성과 융통성을 발휘해 기민하게 대처한다. 그래서 우린 겁이 없다. 무슨 일에든 과감하다. 안전사고가 많은 것도, 수많은 실패를 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그만큼 역동적이다. 이게 그 짧은 시일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힘의 원천이다.
이런 사고 형태는 객관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좌뇌형의 20세기 산업 사회와는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유교적 이성, 즉 좌뇌형 학습을 해 왔다. 그리고 20세기 전반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 교육의 모델은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좌뇌형 서구 사회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식 좌뇌형 교욱을 받았으니 한국은 지난 100년간 20세기 산업 사회의 삼극 체제를 이룬 선진국, 즉 유럽의 서구, 미주의 미국, 아시아의 일본 등으로부터 전형적인 좌뇌형 교육을 받아 온 것이다. 굴욕적이고 가슴 아픈 역사이긴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본 사실은 그렇다.
전통적으로 우뇌적 성향을 가진 우리 민족이 지난 500년간 그리고 이후 100년간 좌뇌형 교육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로 우리는 양 뇌형이다. 우뇌적인 폭발성, 과감성, 겁 없는 도전 정신, 직관력, 기민성, 이미지적 사고에 좌뇌적인 치밀함, 합리성, 객관성을 겸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양 칼잡이다. 한국인이 그냥 우수한 게 아니다.
근래 들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우리 학교는 좌뇌형 교육 위주다. 아이들의 개성보다는 틀에 박힌 획일적인 대량 교육 체제다. 감성보다 지성을 중시하고 지식 교육에만 편중되어 있으니 딱딱하고 재미없다. 많은 아이가 공부라면 싫고 심지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시험공부는 더하다. 종이로 치르는 시험은 모두 딱딱한 지적 좌뇌적 공부를 요구한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는 지성만큼 감성적 측면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좌뇌만큼 우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홍사종 씨의 글은 시사적이다. 녹음테이프는 1000원도 안 되지만 그 테이프에 조수미의 노래가 실리면 당장 5000원으로 가격이 껑충 뛴다. 녹음 테이프는 과학적, 좌뇌적, 기술 없이는 못만든다. 하지만 이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뇌의 감성이 담겨야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요즘은 우뇌적 감성, 감동 바람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일고 있다. 그간 억압된 우뇌적 기질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뇌형 교육’ 이란 말도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우뇌형으로 타고났기에 이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지나친 좌뇌 편중을 지양하고 적절한 균형만 잡아 주면 된다.
미술관의 추상화를 보면서 ‘이게 뭘까?’ 고민하지도, 해석하려고 애쓰지도 말자. 그냥 보고 느끼면 될 일! 왜 거기에 좌뇌를 동원해 해석하려 드는가! 우린 지금 좌뇌를 혹사시키고 있다.
메마른 좌뇌적 지성을 우뇌적 감성으로 부드럽게 하자. 딱딱한 지적 공부에 부드러운 감성적 요소를 가미하자. 그래야 공부가 즐겁다.
그리고 기억하라! 좌뇌가 의식적인 영역이라면, 우뇌는 잠재의식 영역이다. 여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우뇌가 감성과 창조성, 잠재 능력의 보고인 것은 이에서 비롯된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4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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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알아서는 안 된다.”(호세13,4)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관련된 말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금해야 합니다.
*다른 신이나 우상ㄹ을 섬기거나 돈과 권력, 성공, 아름다움, 젊음과 같은 현세적 숭배 대상을 받들고, 재산 증식에 몰두하는 일.
*하느님의 권능과 인도와 축복을 믿는 대신, 미신을 믿거나 밀교적, 마술적, 신비적 처방에 매달리거나 점이나 심령론과 관련을 맺는 일.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
*신성 모독을 범하는 것.
*매수를 통해 영적인 힘을 얻거나,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파는 등 거래를 통해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2110-2128, 2138-2140]
집요한 개종 활동(proselytism, ‘가입하다’라는 뜻의 그리스더 ‘프로세이prosercho-mai에서 유래)
다른 사람을 자신이 믿는 신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대방의 지적 결핍이나 신체적 결핍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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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2110 첫째 계명은 자신을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신 유일하신 주님 외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는 것을 금한다. 첫째 계명은 미신과 불경(不敬)을 금한다. 어느 면에서 미신은 정도(正道)를(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8)/
벗어난 경신을 말하는 것이며, 경외심이 부족하여 생기는 불경은 경신덕과 상반되는 악이다.
미 신
->2111 미신은 종교심과 종교심이 요구하는 실천에서 빗나가는 이탈이다. 미신은 또한 우리가 참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의 형태로 치장될 수 있다. 예컨데, 본래는 정당하거나 필요한 종교적 실천 행위에다 일종의 마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기도나 성사들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을 경시하면서 그 외적인 요소들에만 효력을 부여하는 일도 미신에 빠지는 것이다.(마태23,16-22 참조)
우상 숭배
->2112 첫째 계명은 다신교를 단죄한다. 첫째 계명은 인간에게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 것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밖에 다른 신들을 공경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성서는 우상들에 대해 이렇게 거부할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들의 우상들은 금이며 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 낸 것이니이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은 있어도 보지를 못하나이다”(시편113[115],4-5). 이러한 헛된 우상들은 인간을 공허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상을 만드는 자도, 그를 의지하는 자도, 모두 그와 같으리이다”(시편113[115],8)(이사44,9-20; 예레10,1-16; 다니14,1-30; 바룩6장; 지혜13,1-15,19 참조). 이와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살게 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여호3,10)이시다(시편41,4(42,3) 참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9)/
->2113 우상 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우상 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된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순교자들이 “짐승”을(묵시13-14장 참조) 섬기지 않으려고, 짐승을 예배하는 것을 흉내내는 것까지도 거부하여 죽어 갔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양립될 수 없다(갈라5,20; 에페5,5 참조).
->2114 인간의 삶은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대한 흠숭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유일하신 주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은 인간을 단순하게 하고 끝없는 분열에서 구한다. 우상 숭배는 인간 본성인 종교심의 타락이다. 우상 숭배자는 “하느님보다는 다른 어떤 것에 하느님이라는 불멸의 개념을 부여하는”(오리게네스, ‘첼수스 논박’, 2, 40: SC 132, 378(PG 11, 861)) 자이다.
점과 마술
->211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이나 다른 성인들에게 미래를 계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 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일은 무책임한 과오가 될 수 있다.
->2116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0)/
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 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신명18,10; 예레29,8 참조).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현상, 점쟁이(무당)에게 물어 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2117 신비로운 능력들을 복종시켜 뜻대로 사용하고, 이웃에게-비록 이웃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고 할지라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술이나 요술 행위는 경신덕에 크게 위배되는 행돋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향을 지녔거나 마귀의 개입을 청하는 것이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다. 강신술에는 흔히 점이나 마술 행위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멀리하도록 가르친다. 민간 요법이라고 일컫는 치료법을 쓰면서 악한 능력의 힘을 비는 일이나 다른 이들의 잘못된 믿음을 악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불 경
->2118 하느님의 첫째 계명은 불경의 주요한 죄들을 단죄한다.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죄와 성직 매매(simonia)가 그러한 죄들이다.
->2119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말이나 행실로써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예수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1)/
을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도록 시험하여 하느님께 행동을 강요했다(루카4,9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의 주 하느님을 시험하지 못한다.”(신명6,16)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론을 펴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데 포함되는 도전은 우리의 창조주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는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섭리와 권능을 의심하는 것이 늘 포함되어 있다(1코린10,9; 출애17,2-7; 시편94(95),9 참조).
->2120 신성 모독은 성사와 전례 행위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과 물건과 장소를 모독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 성체께 신성 모독을 범했을 때에는 중죄가 된다. 그것은 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실체적으로 현존해 계시기 때문이다(교회법 제1367조, 제1376조 참조).
->2121 성직 매매는(사도8,9-24) 영적인 것을 사거나 파는 행위이다.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보고서 이를 사들이려고 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작정이요?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8,20). 이로써 베드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이사55,1 참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 영적인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삼거나, 그에 대한 소유자나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 영적 재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을 수밖에 없다.
->2122 “성직자는 성사 집전을 위하여 관할권자가 정한 봉헌금 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 때문에 성사의 도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2)/
이 박탈되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교회법 제848조). 관할권자는 이 ‘헌금’ 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직자들의 생계를 보조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정한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태10,10)
무신론
->2123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하고 더욱더 치밀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사목 헌장, 19항)
->2124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 현상들을 얼컫는 말이다. 무신론의 흔한 형태의 하나는 자신의 필요와 갈망을 공간과 시간에 한정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 고유한 자기 역사의 유일한 창조자요 형성자”(사목 헌장, 20항) 라는 그릇된 주장을 펼친다. 현대 무신론의 또 다른 형태의 하나는 단지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해방을 통한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은 “종교는 본질상 이러한 인간 해방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허황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지상 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사목 헌장 20항)
->2125 하느님의 존재를 배격하거나 거부한다는 면에서 무신론은 경신덕을 거스르는 죄이다(로마1,18 참조). 이 죄에 대한 책임을 의향과 정황에 따라 상당히 덜어질 수 있다. 무신론이 생겨나고 확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3)/
되는 데는 믿은 이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믿는 이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사목 헌장, 19항)
->2126 흔히 무신론은 하느님께 대한 일체의 종속을 거부하기 까지 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그릇된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사목 현장, 20항 참조).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사목 헌장, 21항).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사목 헌장, 21항)
불가지론
->2127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경우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계시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가정한다. 또 다른 경우에 불가지론자들은,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하여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2128 불가지론은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과심주의, 존재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회피, 윤리적 양심의 게으름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불가지론은 흔히 실천적 무신론과 같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4)/
간추림
->2138 미신은 우리가 참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신은 우상 숭배, 그리고 점이나 마술 등의 여러 형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139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 신성 모독, 성직 매매 등은 첫째 계명으로 금지된 불경죄이다.
->2140 하느님의 존재를 배척하거나 거부하는 무신론은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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