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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61
5월15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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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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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OgAm5EQR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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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호흡은 지극히 잦고 짧은데 비해, 하느님의 호흡은 길고도 느립니다!>
지난 2013년 2월 가톨릭교회 역사상 초유의 대사건이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교회 역사상 유래없이, 자유의지를 통해 교황직에서 물러나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용기있는 결단을 통해 우리 교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 교황님의 결단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선출이라는 의미있는 결실을 맺게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출 직후, 바티칸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따뜻하고 친근한 저녁 인사를 건넨 교황님께서는 광장에 모인 신자들과 전 세계 형제자매들에게 첫강복을 주시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기도가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계십니다. 기도가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고 확신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기도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동시에 실제적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에게 하듯이, 하느님께 곧바로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 말씀드리는 기도를 하면 더 깊은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말이 하느님 보시기에 하찮거나 부적절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기꺼이 듣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기꺼이 나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초대하는 이달의 묵상 기도, 가톨릭출판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거듭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특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3~24절)
그러나 구체적인 기도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보면 어떻습니까? 백번 천번, 만번 청했는데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한 가지 기도 주제를 두고 간절히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모른체 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에 대한 성숙도를 먼저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나’ 위주의 기도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유아기적인 기도는 아니었는지 되짚어봐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호흡은 지극히 잦고 짧은데 비해, 하느님의 호흡은 길고도 느립니다. 인간의 시계 바늘은 째깍째깍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데 비해, 하느님의 시계 바늘은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우리는 초스피드 응답을 바라는데 비해, 하느님께서는 아주 더디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한 바에 대한 응답을 즉시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얻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 우리가 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호의를 하느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사실 청원기도도 좋지만, 기도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깊고 충만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원기도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 덕행과 영적 지식을 추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타 다른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흘러넘치도록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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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6EC2TXGPp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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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더 사랑받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시고,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모두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청하는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사랑받는 가장 완전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이 더는 ‘비유’로 말할 필요가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이름’은 곧 ‘본성’을 의미합니다. 태어날 때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또한 동시에 ‘본성’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기가 장난감 자동차를 끌고 길가로 나왔다가 경찰에게 잡힌 사진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 어린 아기가 큰 자동차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청한다면 부모는 들어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 더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모와 같은 본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겐 아직 ‘비유’가 더 필요합니다.
비유란 ‘표징’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신처럼 아이를 끌어올리기 위한 사랑의 표징이 바로 비유인 것입니다.
제가 며칠을 라면만 먹다가 물려서 어머니께 불평했을 때 어머니는 먹기 싫으면 젓가락을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서운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손에 고생해서 생긴 굳은살을 보고, 거칠어지고 비틀어진 손과 발을 보니 그제야 그 라면도 부모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성장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렇게 더 높은 본성을 지닌 이들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굳은살이 곧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비유이고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사랑의 표징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청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은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그 표징을 먹고 마셔서 우리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더는 표징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때 기쁨에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미국의 유명 여배우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다.”
이 말 안에 숨긴 뜻은 무엇일까요? 여자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사랑스럽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만약 여자가 끊임없이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표징을 요구한다면 남자는 점점 지쳐갈 것입니다.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없어서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믿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표징만 요구하고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그 상대에게 지쳐갑니다.이 지침은 또한 이별을 전제하고 있기에, 곧 이별하게 될 사람에게 청하는 모든 것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진 자가 더 받게 마련입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 사랑받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한 여성을 인도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 여성도 인도에 여행을 온 여행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비윤리적인 모습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주로 릭샤 비용이나 물건값을 속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인도인들 때문에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인디어 욕설’이었습니다. 그들이 욕을 할 때 먼저 알아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지인들끼리 주고받는 말 속에 섞인 욕을 듣고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현지인들이 매우 놀랐고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 졌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이제는 그녀를 슬슬 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 주인은 식자재가 떨어졌다며 그녀를 거부했고, 알리바바 바지를 다른 가게보다 10루피(200원) 더 받으려고 했다고 심한 욕설을 들은 주인은 그녀가 다가오면 서둘러 문을 닫았습니다. 심지어 골목에서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도 그녀만 나타나면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인도 여행 중 얻게 된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몇 번 노천카페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언제나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욕설에 상처 입은 사람은 결국 그녀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인도 여행 중 그녀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군고구마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적어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성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께도 사랑받음을 믿기 때문에 더는 다른 비유나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좋은 이유가 있어서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레이스’란 아이는 어렸을 때 천연두가 걸려 얼굴에 심한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흉터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부부가 모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고 믿을 때 가장 사랑받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더는 비유나 표징이 필요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얻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고 항상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본성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가 다다르기를 원하는 참행복의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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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3-28 :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베푸시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구원과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라고 하신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기쁨 말고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줄 때가 온다.”(2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때’는 우리가 그분을 마주 뵙게 될 미래의 삶을 의미한다.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본다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비유’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같은 곳) 같은 말이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라는 것은 아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즉,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26절)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나라에서 살 미래의 세상에서 좋은 것들로 이미 우리의 소망이 다 이루어질 텐데 우리가 청할 것이 있을까?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육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이 아들이 아버지께 청하시지 않고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으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당신이 하느님이시기에 당신이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시고도 “너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라고 한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이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받으신 육체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육체를 거두심으로써 세상을 떠나셨고, 인간으로써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로 가셨지만, 그분의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영광 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에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주신다. 성령 안에서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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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가 날마다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 주님의 사랑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옳은 일인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 구원 업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을 전하는 모든 이, 우리의 부모님, 형제, 친지, 그리고 우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과 일치한 이들이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항구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 ‘항구함의 은총’을 얻으려면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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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당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가지, 상추, 피망, 고추, 토마토, 오이, 깻잎’을 심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심었습니다. 올해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소일이지만 생명을 키우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 일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면서 조금씩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입니다. 수시로 자라는 잡초를 뽑아 주면서 마음에 자라는 분심, 잡념, 욕심도 뽑아내면 좋겠습니다. 작년처럼 이웃들과 나눠 먹으려 합니다.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도 출근하면서 인사하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분들은 늘 작은 일이라도 하신다고 합니다. 마당에 심은 모종들이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일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영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쾌락’을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러는 “권력”을 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줌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정신적으로 힘겨운 상황, 신체적 억압 속에서도 정신의 자유, 정신적 독립의 흔적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인생이 던지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고, 거기에 계속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추구할 때, 믿음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와 같은 이론을 정립하여 “의미치료(Logotherapy)"를 확립하였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작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대교구 로버트 배런 주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17세기 위대한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인류의 모든 문제는 홀로 방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 상황을 삶의 중대한 질문과 진지하게 대면하면서 방 안에 홀로 앉아 ‘내적 수행으로의 초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네 복음서 중 하나를 통독해보기를 권한다. 이참에 영성 서적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묵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 묵주기도는 가톨릭 전통에서 가장 탁월한 기도 중 하나다. 파스칼의 말이 맞는다면,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들은 방에 홀로 앉아 영적 묵상을 하면서 해결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격리 생활은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부활시기에 우리는 미사의 독서로 사도행전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에게 삶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박해와 고통은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협조자를 만났을 때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기뻐하였습니다.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면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황무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믿음의 결실들이 아시아의 각 지방에서 맺어졌습니다.
우리들의 복자, 성인들 역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바로 한국 교회의 ‘사도행전’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하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어느 박해의 시대보다 더 커다란 배교의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물질과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다원주의와 이성 중심의 생각’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상대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 새로운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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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하느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 모든 규제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나의 잘못을 용서하시며 내가 가장 큰 고통에 시달릴 때 내 옆에 가장 가까이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분은 나를 통하여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는 가장 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은 나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 바로 아버지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께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새날 새 아침에 나를 깨우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쉬게 하시며 목마름을 물로 해결해주시고, 팔 다리를 움직이며 입을 열어 주시어 말을 하고 귀를 열어주시어 듣게 하시고 앞으로 걸어가게 힘을 주시였습니다.
오늘도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에게 나가려고 성당 제대 앞에 엎드려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시간 장소 주시어 믿음과 사랑을 드리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복도에 십자가를 잡고 주님 오늘 저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주님이 지고 가신 것처럼 지고 주님을 따르려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은 바로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주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올바로 이끄시고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주시였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심 같이 나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도록 하시였습니다. 성가 400번 오늘 아침 미사 때 시작 노래를 들으며 성전에 들어가며 “ 주님과 나는 함께 걸어가며 지나간 일을 속삭입니다. 손을 맞잡고 산과 들을 따라 친구가 되어 걸어갑니다.....”
이 감미로운 노래 말과 음악은 미사동안 감동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무엇이 나와 주님 사이를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손을 잡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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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조영만 요한 세례자 신부님]
<완전한 일치>
사실 사제의 입장에서 강론을 한다는 일이 당연하면서도 참 어려운 일인데, 그중에서도 부활 시기가 되면 꼭 만나야 하는 요한복음 강론은 여타 공관 복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론이나 묵상이 참 어렵습니다.
요한 복음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놓고 벌이는 거대한 ‘묵상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과 그 공동체가 그 시대의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고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음성으로 당신이 친히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신하십니다.
요한복음서 속에서의 예수님은 번뇌하시거나 피땀을 흘리시거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메시아의 수순대로 밟아 가십니다. 당신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주도권을 마치 당신 스스로 행사하시는 하느님처럼 그려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저 뛰어난 인간이라거나, 아니면 사람으로 났다가 훌륭한 업적을 통해 하느님(神)이 된 어떤 성현 정도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지창조 이전부터 말씀으로 함께 하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셨노라고, 그 하느님께서 몸소 임재하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니, 이제 우리에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 한 분 뿐이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이제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나의 인생 안에서 몸소 행사하시는 분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리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인생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기도도 그렇고 성체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달라고 청하는 것이 기도라 하지만, 실상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그리스도의 그 농밀한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를 미사 통해 먹고 마심은 바로 그 친교에 우리도 함께 동참하는 본질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미혹해 모르는 것도 많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 속에 머무르는 사람은 압니다. 모든 것이 명약관화한 빛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턱없는 두려움과 불안함, 불만과 욕심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꾸만 이 세상과 머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보다는 세상의 자리를 더 넓혀가려고 안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된다고도 많이들 말씀하시고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다고도 말씀들 많이 하시지만, 정작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십시오. 주십시오...’는 필요할 때마다 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구한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관심사였지, 하느님의 관심사는 구하지 않았던게지요.
하느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와 나누었던 그 일치 속에 자녀인 우리도 함께 머물기 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도 그 일치를 살고, 우리도 그 사랑을 살며, 우리도 그 친교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만을 바라십니다.
부디 하느님의 관심사가 내 일생을 통한 관심사가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내 좋자고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좋으시라고 살아가는 그 자녀들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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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줍니다.
이를 좀 더 보면,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둘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는 말씀입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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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 16,24)
주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한가롭기를 원했고, 잃지 않기를 원하면서
가난하기를 원하지는 안했습니다.
능력을 갖추고 싶어 했고, 존경받고 싶어 했고, 잘 난 사람이고 싶어 하면서
낮은 사람이기를 원하지는 안했습니다.
편협 되게 사랑하면서, 더불어 고통 받으려 하지 안했습니다.
괴로워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 것도 아닌데,
괴로워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하지 안했습니다.
입으로는 날마다 죽겠다 말하고는
실제로는 조금도 죽어 살지 안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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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16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청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는 요즘 매일 오후에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숲속길을 걷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여러 가지 필요한 청들을 주님께 드리면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이 성령을 청하지 않았고, 나도 성령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보호자이신 성령의 이끄심에 나의 온 존재를 '내어 맡기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 많은 것을 달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청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많은 청 안에, '성령을 달라는 청이 있고, 그 청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 보고, 오늘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나의 존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먼저 청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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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이에 나 있음에>
요한 16,23ㄴ-28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그사이에 나 있음에>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온 날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날
그사이에
나 있음에
세상은 더디더라도
살만해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아름다워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평화로워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하느님 닮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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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선입견이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하여 실제 체험에 앞서 갖는 주관적 가치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선입견 없이 받아들여야 그 대상의 고유함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고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치소에 가서 특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얼굴에 짙은 흉터가 있고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앉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제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저의 잘못된 선입견이었습니다. 그들의 인상은 저보다 더 좋아 보였고, 부족한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습니다. 구치소 안에서의 강의를 통해 제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선입견을 부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입견을 부수는 방법은 직접 마주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만약 마주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부정적 생각의 선입견을 절대로 없앨 수가 없습니다.
늘 사랑이라는 긍정적 마음으로 직접 마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선입견을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필요한 사랑의 마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입견 없이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주님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으며, 이 청을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선입견을 사랑을 잃어버리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의 청을 들어주실까?’, ‘이를 받을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 ‘하느님께서 과연 계시는 것일까?’ 등의 물음으로는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는 아기를 떠올려 보세요. 아기는 부모에게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청합니다. 이렇게 청한다고 부모가 화를 내고 절대로 청하지 말라고 혼을 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도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청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부정적인 선입견을 모두 벗어던지고 사랑 그 자체만을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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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예전에 본당신부일 때, 봉성체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다리가 아프셔서 걸을 수가 없다며 늘 집에만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제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다. “신부님, 저 이제 살 만큼 살았어요. 주님께 저 좀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어떻게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저 웃으며,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을 때 부르실 거예요.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씀드릴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할머니의 가족으로부터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할머니 집으로 찾아갔는데,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속으로 늘 하느님께 곧바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던 할머니가 그 응답을 받는 것일까 싶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너무 아파 죽겠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이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죽겠다는 말보다 지금 해야 할 것을 떠올리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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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 철부지이니 떼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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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뜻대로>
-주님 뜻이 내 뜻이 되는 삶-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새벽 성무일도 장엄한 시편 136장 26절까지 반복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는 후렴입니다. 주님의 자애로 가득한 참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청명한 날들입니다. 끊임없이 피고 지는 꽃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고 회개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쉬듯이 밥먹듯이 해야하는 이 세 수행입니다.
-“숨 쉴 때마다
온몸과 맘을 적시는
꽃향기
사랑의 향기
존재의 향기
당신의 향기
이 향기로 산다”-
새벽 일어나 출입구를 나설 때 한 숨 가득 들어오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저절로 나온 고백告白입니다. 꽃향기를 쉼쉬듯 주님 향기를, 주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기도와 삶이 하나되어 주님을 날로 닮아갈 때 이뤄지는 기적같은 현실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뜻이 제 뜻이 되게 하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새벽 산책중 예수님 성심상 바위에 잠시 엎드려 바치는 화살기도입니다. 참으로 늘 말씀을 숨쉬며 살고 싶은 마음에 늘 들고 다니는 매일미사책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한결같은 수행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고 참 내가 되게 합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의 신비가 주님을 닮아갈수록 참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설적인 성인이 오늘 우리 분도 수도자들이 기리는 성 파코미오 아빠스입니다. 공주共住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꼽히는 성인은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57년 한 생애 참으로 한결같은 기도로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았던 수도성인입니다. 이집트 상부, 오늘날 룩소로의 타벤니시라는 마을에 머물러 기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너를 찾아와 수도자가 될 것이니 그곳에 머물로 집을 한 채 지어라.” 하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파코미오 수도원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한결같이 항구히 살아온 이들에게 기적은 너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33년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보니 무수히 목격하는 기적들입니다. 10년 이상 겪어 온 한 자매의 삶 역시 신비로운 기적입니다.
“9년 만에 하느님께서 주신 외손자의 선물입니다. 사위와 딸이 한결같이 기다리며 기도해온 결과 주신 외손자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딸 부부는 외손자의 이름을 ‘이도’라 지었고 성명은 ‘정이도’입니다. ‘그리스도’에서 딴 이름 ‘리도’로 ‘리’는 ‘이’로 바꿔 ‘이도’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뤄졌다 하여 감사하는 마음에 ‘이도’라 이름 지었다니 얼마나 갸륵한 젊은 부부의 신심인지요! 정말 한결같이 기도할 때 일어나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할 때 부수적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것만 남습니다. 원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정말 필요한 것 하나만 남으니 바로 이것이 주님 뜻이자 내 뜻이 되는 겁니다.
-“신부님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무엇인가 선물하고픈 마음에 묻는 수녀님에 즉각적인 답입니다.
“수녀님을 좋아합니다.”
당혹감에 젖은 수녀님에게 곧 드린 답변입니다.
“주님만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수녀님과 주고 받은 덕담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한 ‘주님, 당신 외는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만 원합니다.’라고 답했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역시 복음에서 당신 이름으로 청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 하늘길임을 각인시키는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하늘길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유독 눈에 띠는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이미 주님의 “길”을 알고 있던’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바로 여기 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아십니다. 하느님의 길, 하늘길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는 다 들어 주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갈수록 응답되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가 바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복음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구원 섭리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 형제들 하나하나만 봐도 그대로 증명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들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는 결코 ‘우연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바오로와 그 일행의 ‘기도의 선물膳物’임이 분명합니다. 바오로의 참 좋은 협력자이자 동반자인 아폴로입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랑하여 닮아 하나되어 갈수록 그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이며 우리의 모든 기도는 때가 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 기도마다 말미에 KS 마크처럼 붙는 예수님 이름입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과 하나되어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 모두이옵니다.
저희 생명, 저희 사랑,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당신께 대한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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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 드릴 때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 역사의 시작 때부터 기도해 오던 대로 야훼 하느님께 청하되, 이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내가 대신 아버지께 말씀드려 줄 테니 아버지께 가지 말고 내게 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일신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신앙의 도전이 되었을 겁니다. 출신을 뻔히 아는 목수의 아들이 아무리 뛰어난 가르침과 기적을 행한들, 감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니요. 이를 믿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예수님의 자리와 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한 혼돈스러웠을 법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율법에 그다지 목을 메지 않는 듯 보였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새로 등장한 신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믿어 온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면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분이시지요. 이제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겸손하신 하느님께서 아들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 겸손하신 아드님께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26-27)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사에 횡행하는 청탁 요건과 다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께 다가갈 때 더 깊은 결속에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기도는 삼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아폴로가 등장합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사도 18,25)
아폴로는 성경에 정통한 달변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유다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길에 반대하는 유다인들이 기존의 하느님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분하고 대치시키는데 반해 아폴로는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믿음에 투신하지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사도 18,28)
아폴로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분,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에게 있어 야훼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사랑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기에 세상은 믿음에 있어 갈라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이 지혜는,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를 당신 사랑의 유대 안으로 데려가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세상의 잇속은 나누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데 익숙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조화와 일치, 통합으로 이끄십니다. 아버지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다가와 머무르고 청하고 사랑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우리의 사랑에 목마른 분이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과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며, 기도 안에 더욱 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큰 선물인 성령을 주실 것이니,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요한 16,24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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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가치철학의 일곱 가지 가치 중 : 3) 경제적 가치
「경제 가치」는 쾌락과 생명 가치의 다음이다.
현재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금전이 최고 가치처럼 느껴진다. 금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군림한다. 그렇다고 통합적인 성숙한 인간에게는 단지 경제적인 가치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그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경제가 세계관의 기반이며 모든 사회현상의 한 층으로 믿어지고 있기에 생산성 향상의 발전이 사람들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하면 인간을 경제의 발전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경제는 무어라 말해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인간 밖에 있는 것이다.
물론 경제력이 생활의 안정을 주는 것도 있으나, 경제력만 있으면 결혼도 행복하다고 하며 결혼에 신의와 사랑을 도외시하는 경제 제일주의의 가치는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로가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고 국민들도 경제를 일으키는 자가 대통령이 될 적임자로만 척도를 삼는 것은 위험하다.
-헬므트․에르링하겐, <선과 신을 찾는 사람을 위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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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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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_mloeF2J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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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 27)
아카시아
꽃향기
사랑처럼
지극하다.
참된 사랑이
절실한
우리들 삶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삶의 본질은
분명 하느님
이시다.
사랑의
처음과
사랑의
끝도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으로
사랑은
끊어지지
않았다.
사랑은
끝이 없다.
사랑으로
이어져있다.
사랑을
건너면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란
사랑을 만나는
여정이다.
하느님이 없는
방향이란 없다.
사랑과
하느님은
하나이다.
사랑을
먹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을
알게 되면
삶은
달라진다.
삶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사랑이다.
사랑의 여정
그 시작점과
끝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맛보게 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우리를
살게하는
사랑을 청한다.
사랑은
내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것이다.
삶이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방식이다.
사랑을
청하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기쁜 날이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을
오늘도
일깨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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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믿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믿음의 탄생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우리가 이제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출처는 분명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분 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믿을 때 신앙의 여정은 분명 기도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기도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방향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듯 기도의 열매 또한 되살아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분명 믿음입니다. 믿음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 전체를 꿰뚫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부이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바라보시며 우리의 믿음을 영글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우리를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믿음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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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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